헤이데이 12월의 인물 <인순이>

기사 요약글

언제가 내 인생의 전성기였는지에 대한 최종 판단은 마지막에 가서 해도 늦지 않아요.

기사 내용

인순이(사진)

 

‘의외로 가냘프다’는 말 많이 듣죠?
그런 편이죠? 화면에서는 키도 크고 성격도 괄괄해 보이는 게 꼭 여장군 같은데 제 키가 사실 161cm밖에 안 돼요.(그녀는 55 사이즈 의상을 입고, 240mm의 구두를 신었다.)

피나는 몸매 관리를 하겠어요?
뮤지컬 공연에 들어가면 몇 개월에서 몇 년씩, 같은 사이즈의 타이트한 의상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일정하게 체중을 유지해야 돼요. 언젠가 몸통 한가운데 지퍼가 있는 의상을 입었는데 조금만 살이 찌면 옷이 터져 대형 사고가 날 것 같더라고요. 당연히 음식 조절을 하게 되죠. 그런 동기부여가 있어야 나태해지지 않는데 요즘엔 6시 이후엔 식사를 잘 안 해요. 아침에 헬스클럽에 나가 운동도 하고요. 2~3년 전까지만 해도 교만하게 운동을 왜 하나 그랬는데 요즘은 근육량이 떨어졌는지 몸매 유지가 어려워요.

하지만 여전히 무대에서 핫팬츠, 미니스커트를 입을 수 있는 가수죠?
난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내가 ‘여가수’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거예요. 여가수로서 가장 확실하게 변화를 줄 수 있는 게 의상이거든요. 그래서 핫팬츠나 미니스커트, 때론 과감한 드레스를 입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늘 당당한 애티튜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몸을 관리하는 게 내 임무죠. 시간이 흘러 그런 의상이 무리라고 느낄 날이 오겠지만, 굳이 내 나이를 의식하면서 미리부터 몇 살까지는 입어야지, 입지 말아야지 정해놓을 필요는 없다고 봐요. 음악만 해도 너무 ‘요즘 것’들을 따라가면 인기에 연연한다는 얘기를 들을 것 같고, 너무 예전 것을 고집하면 이제 한물갔다는 얘기를 들을 것 같거든요. 스스로도 ‘이 나이에 이 정도면 된 거 아니야?’ 하는 마음 과‘좀 더 과감하고 신선하게 못하겠어?’ 하는 마음이 싸워요. 늘 그 한가운데서 중심을 잡으려고 휘청거리죠.

대부분 ‘이 나이에 무슨’이란 말을 달고 살잖아요. 당신처럼 쿨한 마인드로 인생을 즐길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그런데 나조차도 ‘정도’에 대해서는 늘 고민이에요. 음악만 해도 너무 ‘요즘 것’들을 따라가면 인기에 연연한다는 얘기를 들을 것 같고, 너무 예전 것을 고집하면 이제 한물갔다는 얘기를 들을 것 같거든요. 스스로도 ‘이 나이에 이 정도면 된 거 아니야?’ 하는 마음과 ‘좀 더 과감하고 신선하게 못하겠어?’ 하는 마음이 싸워요. 늘 그 한가운데서 중심을 잡으려고 휘청거리죠.

그‘정도’는 결국 스스로 결정하세요?
아니에요. 신곡에 걸맞은 안무와 의상을 정한다고 치면 나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 나보다 나이 많은 친구들의 얘기를 다 들어봐요. 그럼 보통 답이 나와요. 그리고 이건 태도의 문제인데 자칫 ‘저 사람이 저 나이에 왜 저러지?’ 할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을 보여줄 땐 일부러라도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줘요.

그런 자신감이 바로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인 것 같아요
당당함이 언제부턴가 제 트레이드마크가 되긴 했어요. 음악이 주로 꿈, 열정, 희망, 위로 같은 메시지를 주는 데다 무대 위에서 늘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보여드려서 그런 것 같아요. 대중이 저에게 바라고 원하는 모습도 비슷한데 그게 좋으면서도 가끔은 힘들 때가 있어요. 저도 사람이고 여자인지라 어떤 날은 우울하고 외로운데, 그런 모습을 보이면 꼭 제 몫을 못한 것 같더라고요. 늘 ‘당신은 할 수 있어’ ‘괜찮아 힘을 내’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 때가 있죠.

그렇게 지칠 땐 어떻게 힐링하세요?
연예인 말고, 그냥 ‘사람 인순이’로 돌아가요. 마트가서 장도 보고 영화도 보고 혼자 식당 홀에서 밥도 먹고 그냥 평범한 일상을 즐기는 거죠. 예전부터 딸을 포대기에 싸서 둘러업고 재래시장에 잘 다녔어요(웃음). 동네에서만큼은 화장도 안 하고 옷도 대충 입고 다니면서 그냥 ‘세인이 엄마’로 사는걸요.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다 보니 용기가 필요하긴 했는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인생의 반을 놓치고 사는 기분이 들 것 같더라고요. 또 아무리 바빠도 일 년에 한 번쯤 나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해요. 가톨릭 신자이긴 하지만 절을 찾아가 스님과 차 한잔하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산속에 있는 휴양지에 들어가 최대한 말을 아끼고 책만 읽을 때도 있어요. 다만 올해는 국가적으로 가슴 아픈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집에서 쉬는 날이 많았어요. 너무 미안하고 슬픈 마음이 들어서 편히 쉬어지지가 않더라고요.

타인에 대한 연민이 많은 편인 것 같아요. 작년에는 강원도 홍천에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도 세웠죠?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에서 ‘해밀학교’라고 지었어요. 조손 가정처럼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도 함께 다니고 있고요. 예전에 라디오에서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고등학교 졸업률이 28%밖에 되지 않는다는 뉴스를 듣고 학교를 세우기로 했죠

본인이 자라온 환경과 무방하지 않은 결정이었겠네요?
내 뿌리를 숨길 순 없는데 차라리 드러내놓고 당당히 좋은 일을 실천하는 게 더 낫겠더라고요. 늘어나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제대로 지탱해줄 만한 기반이 없기도 했고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때 ‘내가 이렇게 성공했는데 왜 다문화 축에 끼어야 해? 싫다. 자존심 상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런 인기와 성공이 온전히 내 힘으로만 일군 결과는 아니더라고요. 날 이끄는 어떤 힘이 있구나, 그렇다면 어딘가 쓰일 때가 있겠지 싶었어요.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겠어요?
기초 지식은 있어야 하니까 일단 다문화 카운슬링, 다문화 케어를 할 수 있는 자격증을 땄어요. 오랜만에 발등에 불 떨어져 공부하니 재미있던데요(웃음).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상처받기 쉬운 포인트를 제가 잘 알기 때문에 선생님들한테 이러이러한 점을 조심해야 한다는 팁을 주기에도 편했어요. 그래도 제일 중요한건 재정 지원을 끌어오는 일이예요. 아, 쉽지 않아요(웃음)

당신도 딸이잖아요.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헌신적인 분이었죠. 혼자 여러 식구를 먹여 살리셨는데 제가 가수가 되면서 그 책임을 넘겨받았어요. 그 후부터 엄마가 부엌 근처에도 못 오게 막았던 기억이 나요. 나가서 힘들게 돈 버는데 왜 부엌일까지 하려고 드냐는 거였죠. 돌아가셨지만 많이 그리워요.

가정에도 소홀할 수 없잖아요?
엄마, 아내로서는 기대하지 마세요(웃음). 살림은 손 놓은 지 오래예요. 남편이 다 이해해주니 고맙죠. 결국 남는 건 부부뿐이라는데 점점 그 말에 동감하게 되더라고요.

외동딸 세인 양이 스탠퍼드 대학에 다니는 ‘엄친딸’로 소문이 자자하죠.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 애틋함이 어떨까 싶어요?
‘나는 꼭 잘될 거야, 두고 봐’ 하는 오기로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세인이를 낳고부터 정말 달라졌어요. 별 감흥 없던 것들에도 새삼 의미 부여가 되더라고요. 신경을 크게 못 써줬는데 워낙 독립적인 아이라 알아서 잘 자라줬어요. 엄마가 혼혈인이라는 점이 혼란스러울 법도 한데 오히려 미국에서 자기가 4분의 1은 흑인 이라고 얘기하고 다닌대요. 딸이 많이 보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아 이제 내 시간이 조금 더 많아지겠다’ 싶어서 홀가분한 마음도 들죠.

‘희자매’로 시작해 지금의 ‘인순이’가 있기까지 36년간 많은 일이 있었겠지요.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련은 없으세요?
내 판단 아래 내가 한 행동과 말들인데요 뭘. 오히려 ‘젊은 시절에 이런 걸 좀 더 시도해봤으면 좋았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 그것도 아쉬움이지 젊음에 대한 동경은 또 아니에요. 보시다시피 전 아직 활력이 넘치 거든요(웃음). 같이 춤추는 친구들은 제가 한번 연습을 시작하면 ‘그분이 오셨다’는 표현을 쓸 정도예요. 순간 몰입이 강한 편이라 가끔 저도 무대에서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부르고 춤을 어떻게 췄는지 기억이 안 날 때가 있어요.

내년 초 방영할 KBS의 한 토크 프로그램에 단독 MC를 맡게 되었더라고요. ‘생애 첫’이라는 타이틀을 또 달게 되었네요?
그러게요. 지금껏 수없이 인터뷰를 해오면서도 대답하는 입장이었지 물어야 하는 입장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상대가 입을 열지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제작진 입장에서 저를 단독 MC로 발탁한게 모험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안 해봤다고 불안해하거나 조바심을 내는 대신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나답지 않나 싶어요.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경험을 다섯 번이나 했는데 60대엔 또 어떤 감정이 들 것 같나요?

인순이(사진)

그 질문에 대한 답은<나는 가수다>에서 리메이크해 불렀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가사에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직접 내레이션을 썼는데 한번 들어볼래요? 내 나이 서른 즈음엔 황금기였지, 거침없었지 / 내 나이 마흔 즈음엔 불같은 사랑을 했지.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딸아이를 선물받았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때였어 / 내 나이 오십 즈음 난 달리고 있어. 목적지도 모른 채 하늘 한번 보지 못한 채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난 달리고 있어. 습관처럼 / 조금 있으면 나의 다른 나이 즈음을 경험하겠지. 그때 난 어떤 모습일까.

끝으로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왜 과거형으로 물어요?(웃음) 전성기라면 내가 가장 만족하고, 감동할 수 있는 그 지점이 아닐까요? 그럼 나는 아직 전성기를 못 만났어요. 좋았던 순간은 많지만 언제나 ‘다음’이라는 미지의 시간에 또 한번 기대를 걸거든요. 그래야 또 내일을 상상하게 되니까. 언제가 내 인생의 전성기였는지에 대한 최종 판단은 마지막에 가서 해도 늦지 않아요.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