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 그 시절 떠오르게 하는 ‘그때 그 직업’

기사 요약글

버스안내양과 다방 DJ가 있던 시절,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는 추억 속 직업들을 함께 살펴보자.

기사 내용

 

 

바리스타, 스마트폰 판매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자동차 딜러와 같이 어느 순간 생겨나 지금도 우리 생활 가까이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직업들도 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추억 속으로 사라진 직업들도 있다. 종종 그리운 옛 추억을 회상할 때, ‘아, 그땐 그런 직업도 있었지!’라는 생각과 함께 향수에 젖곤 한다. 다방 DJ, 버스 안내양, 엘리베이터걸 처럼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당시에는 쉽게 볼 수 있었던 추억의 직업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여차장’ 등장이오! 오라이~ 버스 안내양

 

 

‘오라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문득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버스 옆에서는 항상 버스안내양이 대기하며 수많은 승객을 힘으로 밀어 넣곤 했다. 이렇게 ‘여자 푸시맨’의 역할까지 담당했던 버스안내양의 정식 명칭은 ‘차장’으로, 1961년 도입된 여차장제가 버스안내양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절 버스안내양은 여공과 함께 대표적인 여성 직업이자 인기 직종이었다. 기존의 ‘버스안내원’에서 여성을 나타내는 ‘양’이란 말이 붙으면서 ‘안내양’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것이 이름의 유래로, 그 이후 많은 이들에게 널리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17~24세의 여성들이 주로 여차장으로 활동했으며, 요금을 받고 정차하는 역을 승객들에게 안내하는 등 전반적인 업무를 도맡아 진행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1985년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된 이후부터는 버스 안내양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승객들이 직접 요금함에 요금을 넣고 버스에 승차하는 문화가 생겨나면서, 버스 안내양 없이 운전기사 1명이 모든 것을 관리하는 형태로 변했기 때문. 지금은 카드로 편리하게 승·하차를 하고, 안내방송이 정류장을 알려주는 등 대부분 업무는 기계가 대신하지만, 버스안내양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추억이 되고 있다.

 

 

 

 

또 한편의 영화를 만들다, 영화 간판장이

 

 

지금은 전국 어느 영화관을 가더라도 다양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한 극장에서 한가지 영화만을 볼 수 있었다. 피카디리, 단성사, 대한 극장, 할리우드 극장 등 시니어 시대라면 들어봤을 법한 여러 극장이 존재했을 당시, 그 극장들의 간판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것은 영화 간판장이들이 직접 그린 영화 간판이었다.



비록 현재의 영화 포스터처럼 하진 않았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던 영화 간판은 직접 손으로 그리는 예술이자, 하얀색 빈 간판을 캔버스 삼아 그리는 또 한편의 영화였다. 시대가 흐르면서 인쇄 기술의 발달로 극장들은 점차 실사화된 포스터를 활용했고, 대부분의 영화관이 ‘멀티플렉스’ 형식으로 변하면서 간판장이는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광주극장에는 이 시대 마지막 간판장이가 직접 손으로 그리는 영화 간판이 아직도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올라갑니다” 친절한 엘리베이터걸

 


기계음이 아닌 “올라갑니다.”라는 차분한 목소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들리던 때가 있었다.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던 엘리베이터걸은, 80년대까지만 해도 큰 빌딩이나 백화점에 가면 자주 볼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걸의 업무는 주로 층수 안내와 해당 층에서 판매하는 상품에 대한 설명이었다.



지금의 항공 승무원과 같이 그 당시 외모가 돋보이는 직업이었지만, 겉보기엔 간단한 일인 것처럼 보여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온종일 좁은 공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폐소공포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재 엘리베이터걸을 보기 어려워진 이유는 음성기술의 발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부가 인력난을 겪고 있는 산업 현장에 일손을 공급한다는 차원에서 95년까지 엘리베이터걸, 골프장 캐디 등의 정원을 대폭 감축한 것이 직접적인 이유로 통한다.
 

 

 

 

7080시대를 대표하는 ‘모두의 오빠’, 다방 DJ

 


요즘 세대에게 카페가 있다면, 7080세대에게는 음악다방이 있었다.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점에서는 언뜻 다른 점이 없어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음악다방’의 형태로, 다방 DJ라는 직업이 있었다. 다방 DJ는 카페 내 부스에서 음악을 선곡하고, 손님들의 사연을 받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읽어주곤 했다.



그 시대의 아이돌이라 칭할 정도로 뭇 여성 손님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다방 DJ 덕분에 음악다방에는 젊은 손님들의 출입이 끊이질 않았는데, 그곳에서 여러 아티스트들이 탄생했다는 후문도 널리 들려오곤 한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각 가정에 오디오와 라디오가 보급되고, LP판 대신 CD를 쓰게 되면서부터 음악다방과 다방DJ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은 다방DJ를 실제로 보긴 어렵지만, 그 때 그 추억은 <쎄시봉>이나 영화 <써니> 등의 영화를 통해 길이 기억되고 있다.
 

 

 

 

 

‘그릇 때워요~’ 구수한 목소리의 땜장이

 


스테인리스 재질의 주방기구가 보급되면서 지금은 주전자나 냄비 등에 구멍이 날 일이 없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금이 가거나 구멍이 뚫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솥, 주전자, 냄비 등의 각종 쇠붙이는 지금처럼 쉽게 구할 수 없으므로 버리지 않고 때워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시절 우리 곁에는 늘 땜장이가 있었다. “그릇 때워요~”라는 구수한 목소리가 들릴 때면, 기다렸다는 듯 모아뒀던 그릇들을 땜장이에게 맡겨 두곤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땜장이들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땜질을 시작했다. 화로에 불이 피도록 풀무질을 한 뒤 땜인두를 꽂아 빨갛게 달구고, 준비한 땜납을 뚫린 구멍에 맞춰 인두로 녹이는 과정을 거친 다음, 평평해지도록 망치로 ‘땅땅’ 소리를 내며 수없이 두드렸다.



동네 사람들에게 인기 만점이던 땜장이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비록 지금은 볼 수 없게 됐지만, 한국 역사 속에 오래도록 존재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마음이 벅차오르게 한다.


 

 

 

지금까지 7080시대를 대표하던 추억의 직업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다. 예전보다 더욱 풍요로움을 누리게 된 요즘이지만, 때로는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지쳐 옛 추억에 기대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간 바빠서 만나지 못했던 친구와 함께 오랜만에 그 시절 다방 DJ, 버스안내양에 대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눠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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