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표가 있는 삶 신성우

기사 요약글

도전엔 늘 이유가 있었고 과정엔 성패와 상관없는 의미가 생겼다.

기사 내용

조각가를 꿈꾸다 가수가 된 청년은 하루 40개의 일정을 소화했다. 현존하는 모든 교통수단에 몸을 맡기며 일분일초를 쪼개 쓰던 그 시절,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 투성이였다. 하지만 일의 즐거움이나 당위성에 끝끝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던 청춘을 지나, 인생의 방향키를 자신이 틀어 잡으면서 그는 변했다. 도전엔 늘 이유가 있었고 과정엔 성패와 상관없는 의미가 생겼다. 그러자 매사가 느낌표의 연속이었다.

 

파스텔 톤의 의상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습니다
늘 어두운 옷이 나랑 맞다고 생각했는데 입어보니 의외로 또 괜찮네요(웃음). 이래서 뭐든 해보기 전엔 모른다고들 하나 봐요.
 

해보기 전엔 몰랐던 것. 아마 뮤지컬의 매력도 마찬가지겠죠? 1998년부터 시작해<드라큘라> <삼총사> <잭 더 리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굵직한 뮤지컬을 공연했지만 처음엔 고사했다고요?
그랬죠. 20년 넘게 뮤지컬을 하고 있지만 처음엔 왜 노래로 대사를 할까?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런데 의식적으로 자꾸 좋은 작품을 보니까‘멋지다. 괜찮겠는데?’ 하는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죽어라 연습해 무대에 서보니 완전 신세계였어요. 매 공연마다 관객의 리액션이 다르고 연기하는 제 마음도 달라졌죠. 한 번도 같은 공연을 했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그런 신선한 자극이 결국 음악 작업에도 좋은 영향을 주더라고요.‘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규정해놓고 많은 기회를 차단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달았지요.
 

그래서일까요? 신성우 씨는 늘 다양한 기회를 맞이하는 사람 같아요. 가수이자 배우고 작사·작곡가인 동시에 음악감독이기도 하죠.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가 하면 조각가로도 활동하고 있어요. 어떻게 매번 다른 도전을 할 수 있나요?
일단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이었고 뭔가 시도했다고 해서 꼭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안 되면 어떻게 하지?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하는 고민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재미있어 보이면 그냥 뛰어들었죠. 그때마다 성패와 상관없이 과정 자체에서 많이 배우더라고요. 운 좋게 좋은 성과를 낸 날도 많았고요.

 

 

현재 출연 중인 뮤지컬<삼총사>가 끝나는 동시에 5월 18일부터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공연을 앞두고 있어요. 그렇게 쉴 새 없이 뛰면서도 지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네요.
요즘 정말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없을 만큼 촘촘하게 살고 있어요. 월화는 강의, 수토는 뮤지컬, 목금은 드라마 촬영으로 바쁘죠. 6월에 있는 개인전 준비도 해야 하고 집에 가서는 젖병 닦고 아기도 안아줘야 해요(웃음). 예전엔 6개월 열심히 일하고 6개월은 베짱이처럼 놀자는 주의였는데 가족이 생기고 보니 이젠 턱도 없어요.
 

늦깎이 아빠가 된 소감은 어때요?
예쁘죠. 나와 있으면 자꾸 생각나요. 우린 나이 차이가 크니까 나중에 영화 <시네마천국>의 알프레도와 토토 같은 부자 사이가 되면 좋겠어요. 친구 자식 중엔 벌써 장가간 녀석이 있는데 저는 이제 갓 백일 지난 아들의 아빠네요(웃음). 하지만 그 나름의 장점이 있어요. 젊을 때 결혼한 친구들이 좌충우돌하며 가정을 꾸린 데 비하면 저는 확실히 여유나 안정감이 있거든요. 준비된 상태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나 쁘진 않은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남들이 말하는 인생의 순서가 꼭 대단한 것은 아닌 것 같죠.
 

열여섯 살 연하의 부인은 어떤 분이죠? 과거 언급한 이상형처럼 낮에 폭탄주를 같이 마실 수 있는 친구 같은 분인가요?
집에서 좀 답답해 하고 있으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오세요”라며 흔쾌히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해줄 수 있는 여자예요. 제가 오지로 몇 달씩 오토바이를 타러 간다고 하면 말리긴커녕 아마 “저도 따라갈래요. 뒷좌석에 태워 주세요” 할걸요. 그만큼 유쾌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에요.
 

가족 얘기가 나왔는데 어머님이 여군이셨죠. 초등학생인 남매를 서울로 올려놓고는 홀로 내려가실 만큼 독립심을 강조하셨다고 들었어요. 전형적인 여장부가 아닐까 싶은데요.
예전엔 씩씩하셨는데 지금은 연 세가 드셔서 그런지 소녀 같으세요(웃음).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강한 분이죠. 넓은 세계를 보라며 여동생과 저를 서울로 보내셨는데 그 어린애들이 어떻게 자취하며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있던 시절도 아니라 어머니한테 시시콜콜한 것들을 묻고 상의할 기회도 없었죠. 작게는 오늘 먹을 반찬에서부터 크게는 제 진로까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며 살았어요. 버거운 날도 있었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단단하게 컸겠죠? 지금도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기면 놀라거나 걱정하기보단 해결책부터 생각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저도 신발 끈을 묶어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스스로 신발 끈을 묶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어찌 됐든 가수, 조각가로 모두 활동하고 있으니 운이 꽤 좋은 사람 같아요. 4천만원대에 판매된 작품이 나 올 만큼 조각가로서도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내 작품이 얼마나 비싸게 판매될지 보다는 감상하시는 분들이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볼지가 더 궁금해요. “이게 뭐 같아요?” 하고 물었 을 때 되돌아오는 대답이 정말 각양각색이거든요. 재밌죠. 음악, 뮤지컬, 조각 모두 제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각각의 방식인데, 그것들이 동떨어지지 않고 서로 좋은 시너지를 일으키니 행복합니다. 노래나 연기를 하다 지치면 홀로 조각을 하며 에너지를 채우는데, 조각을 하다 보면 또 좋은 멜로디가 떠오르더라고요.

 

활동한 지도 벌써 25년이 넘었습니다. 어떻게 가수가 됐죠?
어릴 적에 어머니가 라디오를 한 대 사주셨는데 주파수를 맞추다 보니 신기한 노래가 나오더라고요. 그게 록이었어요. 마음을 홀딱 빼앗겼죠. 딥 퍼플의 ‘하이웨이 스타’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아 중학교 때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할 정도였지만, 사실 가수보단 조각가가 될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중앙대 미술학부에 들어가 조소를 공부했고요. 그런데 독일 유학을 준비하던 차에 유학 자금을 벌고 싶어 음반을 내면서 진로가 바뀌었어요.

데뷔 후 소녀들의 ‘테리우스’로 등극해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죠?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아, 미리 덧붙이자면 테리우스란 애칭이 한때는 꽤 불만이었어요. 외모 때문에 음악적 성과가 좀 가려지는 느낌이랄까요? (그는 120여 곡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을 만큼 작사, 작곡에 능하다.) 지금은 그 애칭이 제 캐릭터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알기 때문에 늘 고맙게 생각하죠. 팬들이 저한테 보여주시는 관심과 애정 앞에선 늘 놀라운 마음이 들어요. 소녀 팬들이 결혼해서 신랑을 데려오고 얼마 뒤엔 아이와 함께 나타나는 흐뭇한 광경을 보면서 이것도 가수가 누리는 하나의 행복한 특권이겠다 싶었죠.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큰 사랑을 받나 싶어서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진 박수 받은 만큼 열심히 보답하려고요.

지나온 시간을 더듬어보곤 하나요?
거의 매일. 문득문득 그렇죠. 다행히 20~30대에 내가 그렸던 50대의 내 모습이 지금과 얼추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 잘못 산 것 같지는 않고요. 아! 팬들이 나한테도 없는 옛 사진, 기사를 보여줄 때마다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했지 싶은데 제 언행이 모두 기록으로 남는 걸 보면 진짜 잘 살아야 되겠더라고요(웃음)

로커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신성우 씨야말로 영원한 청춘일 것 같아요. 나이를 실감하는 순간은 언제예요?
젊은 친구들이랑 술 한잔하자고 나선 자리에서 “해장국 어떠니?” 할 때 나오는 반응이 있어요. 안주 취향마저 아재 같다 이거죠(웃음). 또 “고등학생 때부터 팬이었어요” 하며 인사하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그때마다 속으로 놀라요. ‘앗 저분이 나보다 어리다고?’(웃음). 그럴 때마다 새삼 내 나이를 떠올리며 놀라지만 대중에게 영원한 청춘처럼 보여야 된다는 강박관념은 없어요. 다행히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제 모습을 좋게 봐주시는 것 같고요.

 

많은 사람이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세우곤 하는데 신성우 씨가 꼭 이루고 싶은 꿈은 뭐예요?
바이크로 실크로드 왕복하기? 그 엄청난 여정을 달리다 보면 타이어 펑크도 한 번쯤 날 거고 소수민족을 만나 손짓 발짓 다 하며 얘기도 나눠보지 않겠어요? 그 지역 악기를 배워 훗날 음악에 접목할 수도 있을 테고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즐겁고 근사한 경험이 기다릴 것 같아요. 내 삶이 그대로 담긴 자서전 같은 노래를 만들어 불러보고도 싶네요. 친구들 앞에서도 부르고 죽기 전에도 부를 수 있는 그런 노래요.
 

나이가 들며 깨닫게 되는 많은 진리가 있잖아요. 그중 하나를 소개한다면요?
왜 어르신들이 그런 얘길 하시죠. 사람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놔주는 건 더 중요하다고.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아무리 주먹을 꽉 쥐어도 손 틈으로 빠져나가는 모래가 있게 마련이더라고요. 사람은 계속 변하고 그이의 가치관이 나와 맞지 않는 쪽으로 자꾸 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경우가 생기죠. 중요한 건 그 변화가 순간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잘 감지해야 한다는 거예요. 왜 저러나 싶다가도 금방 사과하며 긴장감을 푸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반면에 상식적인 룰이나 존중을 저버려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죠.
 

끝으로 인생의 전성기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그건 남들이 특정해주는 어떤 시기가 아닐까요? 제가 스스로 내 전성기가 언제였다고 말하긴 힘들 것 같아요. 그보단 뚜벅뚜벅이라는 말이 더 와닿죠. ‘외부에서 내 인생의 토막토막을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오르막 내리막 개의치 않고 부침 없이 늘 똑같은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그 사실이 훨씬 더 자랑스러울 것 같아요. 아, 중간중간 사소한 데 감탄하고 행복해하며 느낌표도 팍팍 찍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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