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교수 편

기사 요약글

50대 명사 - 신영복 교수 편

기사 내용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잘 알려진 신영복 교수. 좀 더 친숙한 설명을 곁들이자면 소주 ‘처음처럼’의 글자를 탄생시킨 서예가이기도 하고 사회철학자이자 경제학자, 한학자이자 인문학자이다. 지난해 성공회대 강단을 떠난 그가 새 책 <담론>을 계기로 또 한 번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인고의 세월로 다져온 그의 삶과 철학을 키워드로 정리했다.

공부 :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

그가 늘 강조해온 공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책 펼쳐놓고 필기하는 공부가 아니다. 공부(工夫)의 한자를 풀이하면 하늘과 땅을 이어 통합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인데,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성찰, 그로부터 비롯된 깨달음이 곧 공부라고 설명한다.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그는 20여 년의 수감 생활 동안 인생의 관점과 가치관이 변하는 체험을 거듭했다. 이른바 ‘먹물’이었던 그가 다른 재소자들 사이에 스며들기란 쉽지 않았을 터.‘너와 나는 다른 부류’라는 미묘한 분위기가 서로를 가로막았고, 덕분에 그는 5년간 ‘자신만 모르는 왕따’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바위를 다듬는 파도처럼 그동안 그가 쌓았던 완고한 인식의 틀이 조금씩 깨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한 친구에게 어느 날 접견 신청이 들어왔어요. 몇 년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던 친구라 다들 깜짝 놀랐죠. 도대체 누가 왔었냐고 묻는데도 웬 재수 없는 녀석이 왔다고만 하지 구체적인 얘기를 피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재가한 엄마가 키운 의붓아들이 면회 신청을 했었대요. ‘도대체 여길 왜 왔냐’ ‘남 징역살이 하는 거 보러 왔냐’고 화를 냈더니 “당신 어머니가 내 어머니가 되지 않았으면 지금쯤 내가 거기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죄송해서 왔다”는 말을 하더래요. 순간 ‘내가 그 친구와 같은 환경에서 컸다면 지금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 수도 있었구나’ 싶었어요. 나 자신에 대한 참혹한 반성이 드는 순간이었죠.” 이런 깨달음의 순간들이 모여 주변 재소자들과 벽을 허물게 된 그는 자신이 진짜 ‘공부’를 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가 자신의 수감 생활을 두고 ‘사회학, 역사학, 인간학을 배운 대학 시절’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앎’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변화시켜갔던 그는 ‘머리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공감과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되 이를 통해 나를 변화시켜 진정한 공존을 이뤄내는 것’ 그것이 공부라고 이야기한다.

관계 : 서로 관려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비롯됐는가? 신영복 교수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중학생 때 담임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제각각 새해 각오를 발표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어요. 다들 눈치껏 심부름 잘 하기, 부모님 말씀 잘 듣기 같은 각오를 늘어놓는데 중간에 한 녀석이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기 때문에 자기는 각오가 없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어린 나이였지만 참 와 닿는 말이었어요. 그때 그 일이 내 잠재의식 속에 들어와 조금은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끔 만들어줬지요. 내게 사색적인 면이 있다면 다 그 친구 덕분입니다.”

이처럼 살다 보면 별의별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것들이 모여 오늘의 나를 만들게 됩니다. 타인을 배제한 나만의 고유함, 불변의 정체성이 과연 존재할까요?

정체성 :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

사형수로 무기징역수로 암담한 시절을 보내던 그가 자살하지 않고 버텼던 딱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바로 햇볕. 하루 2시간 무릎 위로 쏟아지는 네모반듯한 햇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손해보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단다.

“사람들이 욕망을 주입당하고 살지만 작은 햇볕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게 사람입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삶에 대한 성찰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진짜 내 삶, 정체성을 찾는 문제도 아주 중요하죠. 한 동화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아들과 숲 속을 걷던 아버지가 버섯 하나를 가리키며 저건 독버섯이니 조심하라는 얘길 했습니다. 이 얘길 들은 독버섯은 풀이 죽지만 옆에 있던 다른 버섯친구가 이런 말을 해줍니다. 괜찮아. 독버섯은 사람들이 하는 소리고 너는 그냥 우리에게 좋은 친구인걸.”

과정 : 일이 되어 가는 경로

초원을 질주하는 아메리칸인디언들은 문득 말머리를 돌려 자기가 달려온 길을 한동안 쳐다본다고 한다. 왜일까?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 영혼이 미처 쫓아오지 못할까 봐서다.

우리는 효율성과 거리로 ‘길’을 재단하곤 하지만 길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발자국도 남기고, 사람도 만나고 길가에 피어 있는 꽃도 만나야 하죠. 실컷 달려가면 끝이 보일 것 같지만 늘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끝이 없으니 궁극적인 목표가 있을 수 없겠죠. 목표가 없다면 결국 과정이 남는 겁니다.”

함께 맞는 비 :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소주 ‘처음처럼’에 적힌 글자가 그의 작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서예가로도 유명한 그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 캠페인 슬로건이었던 ‘사람이 먼저다’를 쓰기도 했다.

신영복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재직하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는다. 1988년 8·15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하게 되는데 출소 당일 그의 지인들이 교도소에서 보낸 그의 편지를 모아<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출간했다.

이후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던 그는 2014년 겨울 학기를 끝으로 완전히 강단을 떠났다. 최근 발간한<담론>은 그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 책으로 동양 고전의 깊은 사상을 전하는 한편 긴 수감 생활 속에서 느꼈던 개인적인 소회를 담담히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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