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나도 은퇴병? 노익장과 노인장은 종이 한 장 차이

기사 요약글

젊은 층이 많이 모이는 포털사이트에는 이런 류의 글이 종종 올라온다.

기사 내용

‘버스에서 좌석에 앉아 있는데 “젊은 놈이 왜 양보를 안 하냐”며 면박을 받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서 있는데 어떤 노인이 말도 없이 막 밀치고 올라가더니 “왜 거기 길을 막고 있느냐”며 화를 냈다.’ ‘은퇴한 아버지가 하루 종일 집에서 TV만 보고 계신다. 집이 점점 불편하다’

 

실제로 2012년 서울메트로(1~4호선), 서울도시 철도공사(5~8호선)가 발표한 통계를 보면 노약자석 자리다툼 관련 민원은 2009년 252건에서 2011년 536건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가장 많은 다툼이 벌어지는 연령대는 20~30대 청년층과 65세 이상의 노년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은퇴한 남편들 때문에 못 살겠다는 아내들이 ‘은퇴남편증후군’을 호소한다. 오죽하면 아내들 사이에서 ‘이사 갈 때 남편이 자기를 버리고 갈까 봐 짐칸에 가서 먼저 앉아 있더라’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니더니 반상회까지 따라오더라’는 웃기면서도 짠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이유는 명확하다. 은퇴로 인해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며 억눌러왔던 심리적 고삐가 풀리게 된다. 이런 변화가 ‘나도 있다. 나를 봐 달라. 나를 인간답게 살게 해 달라’는 비뚤어진 호소이자 위악적인 절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은퇴 이후 다시 ‘사춘기’가 시작되는 것일 뿐, 누구나 은퇴병에 걸릴 수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심리적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살아왔던 시대에 비해 외부 환경은 빠르게 변하고 내적인 변화는 더딘 만큼,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 이 글을 통해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은퇴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보면서, 은퇴 이후에도 자신의 설 자리는 스스로 만드는 멋진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이영민(전 조선일보 기자)

 

 

 

7가지 은퇴병의 징후


# 1 욱하는 성질머리
“아오 빡쳐”

피가 꺼꾸로 솟는다는 말을 쓰기 딱 적절한 상태. 화를 내는 이유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세탁기 작동법을 몰라서, 길에서 젊은이들이 떠드는 게 시끄러워서, 아들이 늦게 와서’ 등 사소한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낸다. 마치 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참을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 2 소녀 감성
“저 마지막 잎이 떨어지면…”

남자가 나이가 들면 아줌마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그 정도가 과한 경우가 있다. 드라마를 보다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거나 밥을 먹다가 가족 간의 오붓한 식사에 감동한다. 옆에서 보기에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감정의 변화를 선보인다.


# 3 병원 만능주의
“이 보시오. 의사 양반. 혹시 내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이오?”

나이가 들수록 평소 자신의 건강에 더욱 신경 써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은퇴 이후에는 사소한 증상에도 죽을 병에 걸린 것처럼 과장된 엄살을 떨고, 내가 아픈데 가족들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서 서운하고, 이러다가 콱 죽어버리면 억울할 것 같기도 하고.

 


# 4 게으름&귀차니즘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나갈 계획 없음. 누구도 올 예정 없음. 특별히 할 것도 없음. 은퇴를 하면 시간이 많고, 할 일이 사라진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면, 대개 잠옷 차림으로 집 안을 배회하며, TV 시청을 하거나 컴퓨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점점 초라하고 꼬질꼬질한 행색의 뒷방 늙은이가 되어간다.


# 5 관심병
“관심받고 싶어 하는 게 뭐가 나빠?”

은퇴 후 자신감이 떨어지고 자기 정체성이 약해지면, ‘다른 사람이 보는 나’와 ‘그들의 평가’에 민감해진다. 특히 은퇴한 남자라면 그 대상이 아내에게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아내에게 목을 메다 보니 마치 젖은 낙엽처럼 아내에게 착 달라붙어서 아내의 스토커가 된다.


# 6 미친 존재감
“내가 나인데 너 따위가 감히?”

약해진 자신의 존재감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일에 과하게 자신을 앞세운다. 단, 이들에게 지금의 나란 의미가 없다. 그저 ‘왕년의 자신’이 어떠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약간의 허세와 허풍은 이야기를 위한 양념이다. 단지 뭣도 모르는 젊은 층들이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게 답답할 따름이다.

 

 

폭포증후군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의 저자 앤서니 라빈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타성에 젖은 채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들의 상태를 ‘폭포증후군’이라고 했다. 인생을 강물에 비유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은 채 흘러가는 대로 자기를 맡기는 사람은 결국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폭포처럼 되고 만다. 은퇴 준비 없이 흘러가다가 은퇴를 맞이해 이 폭포로 떨어지는 경험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스트레스다. ‘월급’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살다가 그게 끊어지면 금단증상이 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불량노인구락부

일본에는 ‘모범생처럼 살지 말고 세상을 삐딱하게 대하는 노인이 되자’는 불량노인 운동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는 일본의 불교 조각가 세키 간테이의 책 <불량 노인이 되자>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간테이의 주장에 동의하는 어른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불량노인구락부’다. 불량노인구락부는 가족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누리겠다는 노인들을 회원으로 받는다. 연 1회 정기총회를 여는데 회원들이 자신의 불량 활동을 이야기한다. 권장하는 활동은 0.1점에서 100점까지 수치화되어 있다. 누계 1000점이 되면 ‘대형’의 칭호를 준다고 한다.
불량 노년 행동 점수표를 보면 ‘거리에 침 뱉기 0.1점 / 술 취하기 1점 / 청년들과 어울려 다니기 2점 / 혼자 여행 가기 10점(아내 동행 시 -30점) / 젊은 애인 만들기 100점’ 등이 있다.
이는 체면을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 대한 노인들의 가벼운 반항인 셈. 발상의 전환만으로 은퇴 후 행동 변화를 문제가 아닌 자연스러운 변화로 인식하고, 어디서나 당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은퇴병 당사자를 만나다

허리는 굽어져도 꼿꼿하게

은퇴한 사람들은 자기 존재에 대한 자부심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은퇴 전에는 자신의 노력과 관계없이 자신이 다니는 직장, 자신이 맡은 직책이 자신의 존재감을 대변해준다. 그런데 은퇴하면 이런 방패막이가 사라진다. 이런 증후군을 극복하려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일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방통대에 진학해 다시 공부를 하는 일, 복지의료기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일, 젊은 청년들의 멘토가 되는 일 등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행복한 노후는 국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현역 시절의 허세와 체면은 다 버리고, 실질적인 ‘일’에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송양민(가천대학교 보건대학원장, <100세 시대 은퇴대사전> 저자)

 

 

대기업 다니다가 퇴직한
한상철 씨(62세, 가명)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나도 모르게 고집이 많아지고, 지인들과 소통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갖은 고생을 하며 철야 근무, 주말 근무까지 하면서 가족을 부양했는데 은퇴를 하고 보니 아내는 집에서 편하게 살림만 하는 것 같고, 아이는 미래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이가 대학을 졸업한 지 1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취직도 못했다. 이때부터 잔소리가 늘었다. 나는 조언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식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자식들이 나를 피하더라. 아내도 아이들을 그냥 방치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 할 말이 많아졌는데, 정작 가족들은 그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말이 아니라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되풀이되다 보니 가족들과의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그러다 문뜩 나 자신을 돌아보니 어느새 어릴 적에 굉장히 싫어하며 ‘꼰대’라 불렀던 아버지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개인 사업 하다가, 가게를 정리한
박영식 씨(59세, 가명)

“작은 노래방을 운영하다가 작년에 영업도 잘되지 않아서 다른 일을 해보려고 가게를 정리했다. 그런데 아직 새롭게 할 만한 일을 찾지 못했다. 처음엔 여기저기 일을 찾아다녔는데 자연스럽게 집에 있는 시간이 늘더라. 아내도 이해를 해주는 것 같았는데 점점 눈치가 보였다. 가족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으니 1~2년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서운했다. 아내도 예전에는 식사를 차려주기 위해 외출을 자제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자기 볼일을 편하게 보는 편이다. 자식들이 다 독립한 상태라서 아내가 외출하면 빈집에 홀로 있게 된다. 평소에 스스로 밝은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죽을 때가 된 건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 든다. 이유 없이 우울해지기도 해서, 이런 게 우울증인가 싶기도 하다.”

 

 

두 가지 관점에서 본 은퇴병과 해결책

심리적 관점

은퇴병을 겪고 있는 중장년의 마음은 어떨까?

첫 번째는 분노다. ‘젊음을 바쳐 일했는데 이런 식으로 내버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는 심정이 끓어오르게 된다. 정년을 다 채우거나 자신의 의지로 퇴직을 해도 이 감정을 피할 수는 없다. 이 분노가 자신을 향해 스스로를 탓하면 좌절감이나 우울감이 더 심해진다.

두 번째는 보상 심리다. 일에 묻혀 살 때는 무시하고 지내왔던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와서 서운한 마음을 키운다. 예를 들어, 아내가 자신보다는 자식을 더 챙기면 ‘나를 퇴물 취급하는구나!’라고 느끼는 것도 그 속에는 보상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생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은퇴병에 더 취약하다. 은행 업무를 보고 공과금을 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공연을 예약하고, 장을 보는 것 등 일상의 디테일에 익숙하지 않다면 은퇴 후 현실에서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에 빠져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움이 심해진다.

네 번째는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다. 은퇴는 나의 정체성이 찢겨져 나가는 것과 같다. 특히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해왔거나 직장 내 직급으로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살았던 사람일수록 은퇴 이후에 자아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은퇴병은 이런 감정적인 혼란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리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트라우마를 겪더라도 그 경험을 인생이라는 큰 그림 속에 통합시켜 의미 있는 내러티브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정신 건강이 더 좋아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더 성숙한 자아를 갖게 된다. 은퇴라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자 스트레스를 ‘직장이나 사회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라고 새롭게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다면 ‘은퇴증후군’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다.

김병수(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부교수)

 

일본의 선행 경험

장수 대국 중 유독 일본에서 은퇴병의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유사 경로를 걷는 우리나라가 안심할 수 없는 이유다. 은퇴병은 궤도 이탈 후 복귀 과정에서 겪는 심적인 병리 현상이다. ‘회사 인간에서 가족 복귀’로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이다. 원인은 다양하다. 먼저 익숙한 돈벌이 현장과의 결별 충격이 크다. 출근이 없어졌고 명함이 사라졌다. 그 대신 불현듯 가족이 눈앞에 다가왔다. 뒤늦게 가족 관계 회복을 시도하지만 가족의 복수는 매몰차다. 대화는 허공을 가르고, 은퇴자는 투명인간 신세로 전락한다. 성격을 못 죽이니 더 문제다. 양보나 타협 없이 가장의 무게만 내세우면 이미 끝난 권력은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삼식이’로 비유되는 남편의 칩거는 그나마 낫다. 힘들어도 집안 갈등일 뿐이다. 그래 봐야 황혼이다. 그러나 문밖 출입은 더 위험하다. 고독과 갈등에 대한 해결책이 종종 사회 병폐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본에선 ‘망주(妄走)노인’, ‘폭주(暴走)노인’으로 불린다. 내리 달려왔던 산업 전사가 기형화된 고령 괴물로 전락한 탓이다. 실제 고령 범죄가 증가세다. 단순 절도부터 강력 범죄까지 고령 초범이 적잖다. 이를 막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은퇴 연착륙이다. 적극적인 사회 진출이나 활동의 연장이 필요하다. 사회와의 단절을 극복하고 소통이 늘면 고독과 무연 사회가 심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친구를 사귀거나 동호회 활동에 참가하는 것도 좋다. 직장 인맥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친구를 만드는 것이다.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대인 관계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어쨌든 심중을 터놓고 얘기할 대화 파트너를 확보해야 한다. 물론 그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은 ‘은퇴하지 않는 것’이다. 건강과 의지가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하는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존재감을 확인하는 적극적인 활동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은퇴를 하지 않으니 자연히 은퇴병도 오지 않는다.

전영수(한양대 국제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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