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북한

기사 요약글

두려움을 걷어 내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북한의 모습.

기사 내용

1. 평양의 고층 건물들. 2. 우리네 마트와 별반 다르지 않은 북한의 상점.
3. 제법 많은 이들이 이용하고 있는 택시. 4.‘이딸리아료리 전문식당’에서 피자와 스파게티를 즐기는 평양 시민.

 

평양의 시간과 서울의 시간
통일TV 대표 진천규

Q. 북한을 여러 번 다녀오셨습니다.
1988년<한겨례신문>의 창간 기자로 입사해 판문점에 출입하며 북한 취재와 인연을 맺었지요. 지금까지 네 차례 북한을 방문해 2000년 평양 정상회담 당시 6.15 공동선언 현장에서 단독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맞잡은 사진을 찍는 등 남북관계의 결정적 장면들뿐 아니라 평양, 원산, 마식령 스키장, 묘향산 등 북한의 다양한 변화상을 취재했습니다.

Q. 2017년에는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단독 방북 취재에 성공했습니다.
이때 방북하여 변화한 평양의 현재 모습을 담아 지난 7월,<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보통의 북한 사진에서 볼 수 없었던 사진이 많습니다. 주민들의 집 안 내부 사진부터 일상적으로 택시와 휴대폰을 이용하는 모습도 담았거든요. 옥류관 냉면과 피자를 즐기는 모습도, 퇴근 후에 맥주집에서 대동강 맥주를 마시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평양 시민들의 다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책 제목처럼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다르지 않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Q. 계속 북한을 방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목표는 오직 하나,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출발점에‘문화적 통일’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이를 위해 남과 북이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교류하며 동질성을 회복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플랫폼 역할을 할 케이블방송사‘통일TV’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걸 사진과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알리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다르지 않아요.

평양의 지하철 모습.

 

북한과 평양 사람들
포토그래퍼 에도 하르트만

Q. 북한을 촬영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 아닌가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모두 네 차례 평양을 방문했는데, 저 역시 관광 형태였습니다. 사실 북한에 도착해서 선뜻 작업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관광이 좀 길어지면서 북한 정부의 승인을 받은 중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자(고려스튜디오)를 알게 되어 프로젝트를 함께하면서 촬영을 할 수 있었죠. 그래도 촬영을 할 때면 북한, 서양인 가이드 2명이 1~2m 간격으로 제 곁에 있었어요. 또 디지털 작업만 허용하고 작업 결과물을 수시로 확인했고요.

Q. 평양의 건물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특히 건축물 사진에 몰두한 건 건물 하나하나에 정치적 이유를 담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학교부터 작업장까지 모든 건물이 정부 소유이거나 정부를 위해서 운영되죠. 도시 여기저기 놓인 스피커에선 정치사상 선전 메시지가 흘러나오고요. 사람들이 매일 드나드는 건물 자체가 사회와의 연결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지요.

▼최근에 그동안 촬영한 사진들을 모아 사진집을 출간했다.

Q. 북한 사람들도 많이 찍었죠?
북한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관광객이 아닌 포토그래퍼로서 그들에게 다가갔을 때는 더욱 그렇죠. 자유롭게 웃고 떠들던 사람도 촬영을 시작하면,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거든요. 정제되지 않은 일상의 모습을 담아내는 걸 꺼려하는 듯 보였죠. 그래서 역으로 저는 삼각대를 들고 다니면서 촬영했어요. 순간을 포착하는 데에 더딜 순 있지만, 공개적으로 기록할 때 보이는 북한 사람들의 반응을 담을 수 있었거든요. 카메라나 외국인에 대한 어색함, 국제사회에서의 고립 이런 것들 말이지요.

Q. 북한에서 찍은 사진들로 상을 받고 암스테르담에서 전시도 했습니다.
전시장 맨 꼭대기 층에 평양 지하철역을 360도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VR 안경과 헤드폰을 설치했지요. 평양 지하철역은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영감을 받은 역인데, 마치 북한 사람들과 함께 출근 열차를 타는 기분이 들게 했죠. 사람들이 제 사진을 통해 평양의 삶을 느끼고 상상하길 바랐습니다. 이 공간을 체험한 관람객 중 한 분이 제게‘이제야 북한 사람들이 사람처럼 보인다’고 말해줬어요.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에 2500만 명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겁니다. 그들은 괴물도 좀비도 아니죠.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고, 오후면 하교하는 아이들을 집에 데려올 걱정도 합니다. 북한 사람들에게 북한은 가난하고 답답하며 통제로 가득한 곳만은 아니라는 걸 세계의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북한(평양)과 친해지길 바랄 뿐이죠.

네덜란드 포토그래퍼 에도 하르트만이 4년간 네 차례 평양에 방문해 촬영한 사진들.

 

북한 여성의 삶
통일연구위원 박영자

Q. 북한, 그중에서도 여성에 대해 연구한다고요?
새터민 여성들을 만날 때면 강한 자기주장과 억척같은 생활력을 지닌 동시에 가정에서는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습에 놀라곤 했어요. 이런 역설적인 태도는 어디서 왔을까 궁금했죠.

Q. 남녀가 모두 국가에 소속되어 일하지 않나요?
1970년대부터 북한의 공장 생산율이 떨어지면서 아내를 부양가족으로 등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근로자가 700g의 쌀을 받는다면 부양가족은 400g의 쌀을 받는 거죠. 집에서 아이도 키울 수 있으니 부양가족으로 등록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여성들이 전업주부가 됩니다. 쉽게 말해 구조조정이죠. 그러다가 1984년에 김정일이 전업주부를 대상으로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고 남은 부산물로 생활용품을 만들어 판매하는‘가내작업반’ 활동을 독려했어요. 수세미, 도마 같은 생활용품이나 옷처럼 꼭 필요하지만 배급이 원활하지 못한 것들을 만들어 팔며 쌓은 장사 수완이, 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 시스템 붕괴와 북한의 배급이 불안정해지는 것과 맞물리면서 장마당 위주로 경제가 돌아가는 구조를 만들었죠. 재봉 기술이 뛰어나거나 물건을 만드는 능력이 있는 여성들이 만든 물건을 암시장에 팔면서‘돈주’라고 하는 신흥부유층이 생겨났습니다. 장마당에서는 돈이 될 만한 건 다 팔아요. 랍스터도 팔 정도죠. 남한 화장품도 인기인데, 상표 떼고 방문판매 방식으로 몰래 팔아요. 남자들은 군대에 가 있거나 공장 등에 소속된 상황이라서 여자들에 비해 점점 무력화되었죠.

Q. 여성이‘돈맛’을 알게 된 거네요.
맞아요.‘돈이 있으면 출신 성분이 안 좋아도, 남편이 없어도 인정받는구나’‘돈이 곧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구나’를 알게 되었죠. 또 하나, 배급제에서는 내가 무엇을 입을지, 먹을지 선택할 수 없죠. 하지만 시장에서는‘내가 가진 돈으로 무엇을 살까?’라는 기호의 고민이 생겨요. 남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고민, 즉 유행에 따라서 판매 물품도 바뀌지요. 이렇듯 사회의 다양한 가치와 권력이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걸 소비의 정치라고도 합니다.

 

장마당의 주체적인 운영자는 모두 여성이다. 여성의 사회적 위치는 경제력을 갖게 되면서 확연히 달라졌다.

Q. 북한에도 결혼 적령기가 있겠죠?
12년제 학제로 운영되는 북한은 6~7세에 국립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기 때문에 17세면 교육을 마치죠. 그럼 남녀 구분 없이 군대에 입대(여성은 7년, 남성은 10년 복무)하거나, 돌격대(청년노동)로 국가나 건축 현장에서 2~3년 일합니다. 그러고 나면 여자는 24세쯤 돼죠. 결혼 생각을 하지만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가 없어요. 남자는 군복무를 마치면 27세가 넘고 사회에서 자리 잡는 시간을 감안하면 결혼 연령은 더 늦어지죠. 그래서 북한의 부부들은 나이 차이가 납니다. 남자들의 결혼 상대 1순위가 여자의 경제력이에요. 군대 다녀와서 자리도 못 잡은 남자에게 여자의 경제력은 크게 다가오죠. 또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낳으면 고생한다는 인식이 강해서 결혼을 미루거나 동거를 선호합니다.‘이 사회에선 희망이 없다’ 싶어서 탈북하는 여성도 많죠. 그래서 탈북자의 70% 이상이 여성이에요.

Q. 여성의 가사 노동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요?
저발전 국가는 가사 노동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요. 고난의 행군 이후로 절약이 몸에 배어서 먹는 것도 간소하고, 살림도 많지 않으니까 가사 노동에 쓰는 시간 자체가 많지 않아요. 국수 한 다발이면 삼시 세끼를 먹거든요.

Q. 며느라기, 시월드는 북한이라고 예외가 없겠죠?
남한은 가족 이기주의가 굉장히 강하잖아요. 북한에서 가족은 국가의 세포예요. 국가는 어버이 수령과 어머니 당 아래의 대가족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의 삶에 크게 관여하는 문화가 없어요. 부모가 자식을 독점하려 들지 않죠. 또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어서 같은 동네에 살지 않으면 부딪힐 일이 거의 없어요. 어디를 이동하려면 인민반장부터 당에서까지 도장을 받아야 하니까 가족 간의 교류가 많지 않죠. 하지만 국가의 개입이 약해지고 시장경제가 퍼져나가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