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참 좋은 시절' 김영철

기사 요약글

61세 사람, 남자, 아빠. 꼭 그만큼의 김영철을 들려 달라 청했다.

기사 내용

김영철 사진1. 20대에 출연한 영화<하얀미소>(1981년 개봉)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동안 그의 머리엔 하얀 서리가 내려 앉았다. 1977년 T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근 40년간 드라마, 영화를 넘나들었으니 웬만한 인간 군상은 다 그려본 셈인데, 아직도 나이 든 사람들에겐 ‘궁예’로, 젊은 사람들에겐 ‘모욕감을 느낀 보스’로 곧잘 통한다. 두 캐릭터는 모두 ‘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주로 냉철한 이미지의 김영철을 떠올리곤 한다.

촬영 4시간, 인터뷰 4시간. 도합 8시간 그를 대하며 느꼈다. 실제의 그는 울근불근 올라오는 ‘성깔’을 애써 다스리는 냉철한 배우지만, 또 한편 ‘칭찬과 환호’에 스르륵 빗장을 풀어버리는 ‘철부지 소년’ 같은 중년이기도 하다고. 

 

 

2달 전 환갑을 맞았다. 예전 같으면 잔치라도 했을 법한데?

 

어이쿠 잔치가 웬말인가 조용히 미역국이나 끓여 먹었지 뭘. 와이프한테 새삼 고맙더라. 그날 “너라도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다 했다.

 

 

‘내 나이가 벌써’ 하고 놀랄 때도 있나?

 

아직 팔팔하니까 딱히 의식할 필요는 없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면 그때나 나이 생각하지 않을까. 굳이 따지고 의식하는 것보단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원래 더 멋지거든. 염색을 안 하는 것도 하얀 머리가 더 자연스러워서다. 다행히 대중들도 이런 중년의 모습을 선호하는 분위기고. 내가 현재 방송연기자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요즘 확실히 대중문화를 좌우하는 건 중장년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선호도, 구매력이 엄청나다. 인생을 즐기며 사는 시니어가 그만큼 많은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좋더라.

 

 

인생을 즐긴다. 말은 쉬운데 그 방법은 참 애매하다.

 

평소 해보고 싶었던 걸 하나라도 실현해보는 것. 그게 인생을 즐기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나는 내비게이션도 없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도 제대로 활용 할 줄 모른다. 그러면서 능숙하게 쓰는 사람을 보면 ‘배워야지’ 생각은 한다. 미국에 가면 또 그렇게 영어 공부에 대한 열망이 타오른다. 다 생각에서 끝난 것 들이지만 딱 하나 ‘죽기 전에 할리데이비슨을 타겠다’ 는 계획은 지켰다. 위험하다는 아내의 만류로 지금은 오토바이를 처분했지만 정말 지난 3년간 원 없이 전국을 누볐다. 왜 진작 이 재미를 몰랐을까 싶은 날이었다.

 

 

떼로 줄지어 다니는 그 할리데이비슨 무리에 김영철이 있었다?

 

그렇지. 지인 소개로 미국에서 처음 오토바이를 배웠는데 프로들의 호위 덕분에 멕시코까지 다녀왔다. 그 후엔 4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한국의 한 동호회에서 활동했고. 전문용어로 ‘한 바리 하자’는 말이 ‘같이 드라이브를 가자’는 뜻인데 바바바박 굉음을 내면서 2박 3일씩 캠핑을 다니는 재미가 기가 막히다. 분당에서 단양까지 단양에서 또 목포까지 못 갈 데가 없다. 텐트 쳐놓고 와인 한 잔씩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길 하다 보면 나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다 친구가 된다. 신호 대기 차선에 서서 옆 자동차에 손 흔들어주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물론 사람들은 헬멧 속 아저씨가 김영철일 거라는 생각은 못하겠지. 이런 게 인생 사는 재미 아니고 뭔가.

 

 

그렇게 좋아하는 취미인데 ‘하지 말라’는 아내의 권유에 딱 접었다. ‘말 잘 듣는 남편’ 같다.

 

요즘은 아내의 의견을 많이 따른다. 알겠지만 우리 부부는 이혼 위기까지 갔다 재결합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서로 많은 배려가 필요했다. 내가 애처가 스타일은 아니라도 가끔 아내가 우울해 보이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데려가 와인 한 잔을 기울이는 노력 정도는 한다(웃음). 기분 좋으면 밥도 해놓고, 주스도 갈아놓고, 연포탕 먹다 맛있으면 포장해 가서 끓여주고 그 정도지 뭐.

 

 

즐겁게 살기 때문인가. 흰머리만 빼면 40대는 저리 가라다. ‘젊게 사는’ 비결이 있나?

 

운동. 매일 아침마다 거꾸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데 이게 위나 내장을 아주 튼튼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어릴 적부터 지켜온 습관이다. 촬영장 같은 곳에선 자주 까치발을 들어 몸에 긴장을 주는데 뱃살 빼기에 효과가 있다니 귀가 솔깃하지 않은가. 그 밖에 탤런트 골프단 ‘이글이글’, 영화배우 골프단 ‘싱글벙글’의 멤버로 한 달에 두 번 이상 주기적으로 골프를 치는 것도 꽤 도움이 된다. 육식은 좀 절제하고, 저녁 8시 이후엔 금식하는 방법도 권할 만하다.

 

 

김영철 사진2
 
 

패션 센스도 ‘회춘’에 한몫을 한다. 이런 멋진 카디건은 직접 구입한 것인가?

 

그렇긴 한데 다 10년 전 것들이다. 사오십 대에는 정말 해외에 나갈 때마다 2~3일씩 쇼핑을 다녔다. 툭툭 떨어지는 느낌이 좋아서 아르마니 옷을 특히 많이 사 입었지. 1년에 한 번씩 뉴욕으로 작은 아들을 만나러 가는데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바로 구제숍이다. 원래 천 불이 넘는 명품 옷을 백 불에 건질 수 있으니 신난다.

 

 

그러고 보니 장가 안 간 아들만 둘이라고 들었다.

 

서른세 살짜리 큰 놈은 수원에서 회사를 다니고, 중학교 때 미국 유학을 떠났던 스물여덟 살짜리 작은놈은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속 한 번 안 썩이고 자라준 고마운 놈들이다. 나는 대견해 죽겠는데 녀석들은 오히려 제 아비를 동생 같다 그러더라(웃음).

 

 

작품 속에서만 보면 차갑고 엄한 아버지일 것 같은데?

 

전혀, 그냥 형 같은 아버지다. 지난겨울엔 작은놈이랑 둘이서 3일간 여행을 갔는데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와인을 16병이나 마셨다. 그렇게 툭 터놓고 얘기하다 보면 내 자식이지만 객관적인 평가를 하게 되는데 큰아이도 그렇지만 둘째 아이가 인간적으로 참 괜찮은 편이다. 고등학교 때 용돈을 2천 불 준 적이 있었는데 학교 애들을 몽땅 불러 똑같이 나눠 썼더라.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할머니랑 단 둘이 어렵게 살고 있는 중학교 친구를 찾아가 꼭 밥을 사준다. 그럴 때 보면 애새끼가 참 잘 컸지(웃음).

 

 

반대로 김영철은 어떤 아들이었나?

 

사고뭉치(웃음). 친구들 ‘삥’ 뜯기, 치고 박고 싸우기, 수업 땡땡이 치기, 소사 아저씨한테 라면 끓여 달라기…. 지금 생각하면 완전 불량 청소년이었지.

 

 

왜 그런 탈선을 했나?

 

딸 하나(누나)를 데리고 황해도에서 내려온 부모님은 먹고살기 위해 큰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어머니는 별다른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는 입장이었는데 재봉 일에, 고기 장사에 잡화점에 당구장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 가게가 잘못돼 집안이 폭삭 망했다. 그러면서 나도 엇나가기 시작했고. 마음고생 시켜드린 만큼 효도를 하고 싶었는데 내 나이 서른아홉 살, 마흔한 살 때 어머니 아버지가 차례로 돌아가셨다. 이제 막 돈을 벌기 시작할 때라 조금만 기다리셨다면 좋은 구경도 시켜드리고, 진귀한 음식도 원 없이 사드렸을 텐데. 마음이 안 좋다.

 

 

만일 배우를 안 했으면 지금쯤 뭘 했을 것 같은가?

 

깡패가 됐으려나(웃음). 유일하게 재미를 느낀 영역이 어떻게 연기였을까? 입문 과정이 어쨌든 일단 발을 들인 뒤에는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남들 대본 한 번 볼 때 두 번 세 번 보는 것. 그게 내 생존 방식이었으니까. 그때 같이 공채로 들어왔던 연기자 중에 살아남은 사람 몇 안 된다. 나보다 출연료를 20배 더 받던 사람들, 지금 내 출연료의 반 값이다. 내가 대충 살진 않았던 모양이다.

 

 

악바리 근성을 얘기하니까 묻고 싶은데 김영철의 진짜 성격은 어떤가?

 

옛날엔 대단했지. 감독이 헛소리하면 집에 확 와버렸거든. 후배가 버릇없이 굴라치면 다들 민망해할 정도로 심하게 혼냈다. 잘못된 건 꼭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니 어쩌겠나. 그런데 스태프 사이에서 내가 ‘가장 일하기 힘든 배우 1위’로 꼽힌다니까 얼마나 뜨악해. ‘그동안 괜히 여러 사람 눈치 보게 만들었구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까 성질 좀 죽여 야지 안 되겠더라. 물론 지금도 엄청난 절제가 필요하긴 하다. 나이 들면 자연히 성질도 좀 죽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불끈불끈하는 거 보면 참 이상하지.

 

 

살면서 은퇴를 생각해본 적 있나?

 

배우는 건강만 잘 지키면 은퇴랄 게 없는 직업이다. 이순재 선배님이 여든둘인데 얼마나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가. 나는 평생 회사 생활을 해본적이 없으니 은퇴를 앞둔 분들의 고민이나 애환을 백 프로 이해하진 못하지만 중·고등학교 동창회에 가보면 그들이 중심을 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 수 있었다. 친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회식비 조로 얼마간 돈을 쥐어주는 일인데 그 돈으로 모임을 갖은 날에는 꼭 전화가 온다. “영철아 그 때 보내준 돈으로 오늘 몇 명이서 뭘 먹었다. 고맙다. 얼마 남았는데 그건 다음에 꼭 같이 식사할 때 쓰자.”

 

 

마음 씀씀이가 좋은 친구다.

 

아니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뿐이지. 그 옛날 철없던 시절에 그 친구들이 나한테 얼마나‘삥’을 뜯겼는데(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김영철에게 ‘헤이데이’는 언제인가?

 

바로 지금. 일이 점점 더 재미있어서 큰일이다. 요즘 영화<기술자들>을 찍고 있는데 며칠 전에도 부하한테 뒤처리를 맡기고 황급히 현장을 떠나는 신을 찍다 나도 모르게 “야 인생 뭐 있냐” 하는 애드리브를 쳤다. 자꾸 뭔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열정이 생긴다. 성실한 후배를 보면 내가 가진 얼마간의 노하우를 다 전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고. 심지어 촬영장에 가서 다 같이 회를 먹을까, 고기를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나한텐 큰 즐거움이다. 매일매일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니 난 참 행복한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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