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을지로 반나절 나들이

기사 요약글

을지로는 레트로 서울의 성지다. 예술가의 작업실과 카페, 노포 식당을 찾아가기 위해 미로 게임을 하듯 휴대폰 속 지도를 보며 골목을 걷는다.

기사 내용

 

두 대표가 빈티지 물건 하나하나를 모아 꾸민 죠지서울.

 

 

RETRO 1 _ 죠지서울

 

번듯한 간판 하나 세우지 않았지만 카페 안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일본인 관광객까지 카페 내부와 메뉴를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케이크와 귀여운 하트 수제 곤약젤리가 올라간 소다 음료가 인기 메뉴.

“작업실 겸 카페, 바, 빈티지 숍 등으로 사용하려고 마련한 공간이에요. 핑크팡팡 케이크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입소문을 타면서 카페를 찾는 분이 많아졌고 그제야 공간의 정체성이 카페로 정해졌어요.”

 

 

이곳의 인기 메뉴 소다와 핑키밍키브라우니.

 

 

우연히 문을 연 카페치고는 음료와 베이커리에 대한 음식과 패션 분야에 종사하던 두 대표의 철학이 확고하다. 재료비가 많이 들더라도 좋은 재료만 쓴다.

“풍미가 좋은 동물성 크림을 사용하는데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모양이 무너져 그때그때 만드느라 손님이 많이 기다려야 해서 죄송하지만 대신 맛은 더 좋아요.”

을지로를 선택한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도 시원시원하다.

“을지로라는 지역이 주는 느낌 자체가 좋았어요. 또 카페, 식당을 찾아 골목골목을 다니는 것도 재밌었죠.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개업 초기 때의 간판이 고스란히 걸려 있다.

  

 

RETRO 2 _ 을지OB베어

 

서울에서 맥주 핫 플레이스를 꼽으라면 단연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다. 가게 20여 개가 늘어선 골목에서 노맥(노가리와 맥주) 메뉴를 처음 개발한 을지OB베어는 38년째 같은 자리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을지OB베어의 또 다른 자랑, 레트로 맥주잔 컬렉션.

 

 

노가리 1000원, 500cc 맥주 3500원. 저렴한 가격에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 커플도, 인근 상가 주민들도 부담 없이 가게를 찾는다. 을지OB베어가 특별한 진짜 이유는 이 공간에 을지로 사람들의 삶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강효근 씨에게 가게를 물려받아 운영 중인 딸 강호신 씨.

 

 

지금은 낮 12시에 문을 열지만 2013년까지는 여느 호프와는 다르게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영했다. 밤샘 작업 후 맥주 한잔 마시러 오는 인쇄소, 철공소 골목 노동자 손님들을 위해서였다.

지금도 그 시절을 잊지 못해 이른 아침 가게를 찾는 어르신들이 있다. 오후 10시에 문을 닫았던 이유도 애틋하다. “가게 문을 일찍 닫아야 손님들이 그때라도 들어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것 아니냐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40년간 을지로 인쇄 골목을 지킨 금박인쇄 장인 김용춘 씨와 그에게 주말마다 ‘다시 세운 인쇄기술 학교’ 수업을 듣는 독립 출판인 이창석 씨.

 

 

RETRO 3 _ 현대금박

 

기술을 배우려 시골에서 올라와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먹고 자며 기계 닦기만 1년. 밤에 몰래 기계를 만지며 기술을 배우던 소년은 40년이 흐른 지금 금박인쇄 장인이자 레터 프레스 기계를 해체, 수리하는 전문가로 성장했다. 김용춘 사장의 이야기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들어진 레터 프레스. 지금은 생산이 중단되었다.

 

 

산업의 황금기를 겪다 보니 세월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버렸다. 고생만 한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이던 그는 이제 은퇴를 생각한다. 시간이 날 때면 골목골목 후배들이 하는 가게를 돌곤 한다.

 

 

금박 외에도 엠보, 디보, 복권 스크래치까지 다양한 작업을 한다.

 

 

그렇게 서로 어려운 일을 살핀다. 최근에는 서울시와 협약을 맺고 ‘다시 세운 인쇄기술 학교’를 시작했다. 디자이너, 책 편집자 등 다양한 직군, 연령대의 열 사람이 주말마다 그의 작업실에 모여 기술을 전수받는다. 이후에는 을지로에 설립 계획 중인 ‘서울시 인쇄학교’에 기계도 기증할 계획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셔터 아트 프로젝트. 철공소 골목 곳곳에서 그림과 작품을 만날 수 있다. 

 

 

RETRO 4 _ R3028

 

높은 빌딩들의 그늘 사이에 목공소와 철공소 골목이 있다면, 그 골목에는 작지만 힘차게 움트는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실도 있다. 2016년에 중구청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을지로 산림동에 작업실을 얻은 아티스트 그룹 R3028은 지역을 기반으로 창작, 전시, 공연, 교육 등의 예술 작업을 진행한다.

고대웅, 이원경, 류지영 세 명의 작가로 이뤄진 그룹은 철공소골목에서 소음과 어우러질 수 있는 음악 공연도 하고, 철공소 사장님들과 함께 공간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설치물도 만들며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을지로에 대한 사랑도 깊어졌다.

“을지로는 시간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해요. 낡고 허름해 보이는 건물 하나하나가 모두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어요. 단번에 지어진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증축되었거든요. 한 건물에 초가, 기와 등 다양한 시대의 건축법이 숨어 있어요.”

 

 

R3028 작업실 한 편 고대웅 디자이너의 공간.

 

 

세 사람은 지역의 역사를 속속들이 찾아보고 오래된 지도와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 을지로의 이야기들을 모아서 자료화하고 있다. 을지로 일대를 걸으며 진행한 인터뷰 내내 을지로 골목골목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아까 걸었던 골목길은 조선시대의 대로(大路)였어요. 그 길을 따라 아픈 사람들이 혜민서로 향했죠. 지금 커피 한약방 자리가 백성들을 치료하던 관청이었죠.”

R3028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예술과 기술의 협업, 저희가 디자인한 걸 장인들 작품으로 만드는 일, 교육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요. 동시에 저희가 쌓은 인프라를 예술가들이 활용할 수 있게 형식을 만드는 중이에요.”

  

  

2018년 5월 오픈한 서점 다다.

 

 

RETRO 5 _ 서점다다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세운상가. 서울시에서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오래된 가게와 차가운 성질의 물건만 즐비하던 세운상가에도 최근 몇 년 사이 젊고 따뜻한 기운이 스몄다. 카페와 예술가의 작업실, 갤러리 등이 들어온 것. 지난봄에는 작지만 정말 ‘괜찮은’ 책만 모아 소개하는 큐레이션 서점이 상가 3층에 들어섰다.

 

 

책을 사면 선물해주는 엽서들.

 

 

전자상가에 책방이 들어선 것부터가 이색적인데 오래된 가게들 사이에서도 서점 다다는 이질감 없이 부드럽게 조화를 이룬다.

“원래 독립 출판을 했어요. 사무실을 알아보던 중 서점 자리를 만났죠. 한눈에 반했어요. 세운상가라는 이름에는 ‘세상의 모든 기운이 모인다’는 뜻이 담겼대요. 이 건물 자체가 서울의 역사와 일맥상통해요. 원래도 조그맣게 서점을 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는데 이를 실현해준 공간이죠.”

세운상가의 이름처럼 세상의 모든 기운이 이혜진 서점장의 일을 응원한다.

 

 

서점 주인 이혜진 씨는 읽기 쉬운 책보다 삶의 어려움이나 갈증을 해결해줄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한다.

 

 

“가게를 지나는 어른들이‘너 뭐 해 먹고 살래?’라며 걱정해주시죠.”

어른들의 걱정과 달리 그녀는 야무지게 책방을 운영한다.

“책을 많이 진열해놓지 않았어요. 물건도 책도 넘쳐나는데 진정으로 나를 성장시킬 만한 것은 많이 없는 것 같아 아쉬웠어요. 홀로 주제를 정해놓고 수소문해 괜찮은 책을 모았어요. 이제는 그걸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유토피아’를 주제로 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추천해줄 입문 책도 준비했다. 종종 서점을 찾은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럴 땐 이 책을 보면 좋아요!’ 하고 책을 처방해주기도 한다.

“저는 고난도의 인생 속에 녹아드는 책들을 추천해요. 어쨌든 삶은 고난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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