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가장이 됐습니다

기사 요약글

어제까지 가정주부였던 그녀들이 홀로 생업 전선에 뛰어든 이유는 다양합니다.

기사 내용

사별, 이혼, 남편의 실직이나 투병 등이 그 예죠. 특별한 기술이나 경력 없이 일자리를 구하기란 쉽지 않아서 단순노무직,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게 예사입니다. 몇 푼 되지 않는 월급이나마 알뜰살뜰 모아 식구들을 거두고 보살펴야 하는 고단한 그녀들의 삶을 들여다봤습니다.
 

Q1 여성 고용 환경은?

여성 고용환경 조사
[임시직] [상용직]
20대54만명 50대64만명 20대115만명 50대53만명

출처 통계청, 2012년
 

Q2 자산을 깎아 먹는 생애 주요 사건들

자산을 깎아 먹는 생애 주요 사건들
29% 41%
남편의 사망 남편의 은퇴

출처 한국노동패널, 2011년


Q3 여성의 취업 유형

여성의 취업 유형
69.7%전문·관리·사무직 56.3%서비스·판매·단순노무직
20∼30대 40∼50대

출처 서울시, 2011 경제활동인구·사회조사


Q4 만 65세 이상 여성 노인 빈곤율

만 65세 이상 여성 노인 빈곤율
47.2%우리나라 15.2%OECD 회원국 평균

출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한국 여성 노인 현황, 2011년


Q5 경제활동 참가율

만 65세 이상 여성 노인 빈곤율
결혼한 82년생51% 미혼 여성84.8% 이혼·사별한 여성83.4%

출처 한국노동사회연구소‘82년생 여성의 노동시장 실태분석’ 보고서, 2017년


INTERVIEW 1

박선우(가명) 씨
남편과의 사별로 가장이 되다
 

유난히 건강했던 남편은 막내딸이 세 살이 되던 해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다 저세상 사람이 됐다. 야유회 중이었는데 물에 빠진 동료를 둘씩이나 구하고 정작 본인은 빠져나오질 못한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정신이 반쯤 나간 사이 장례식이 끝났 다. 집에 돌아와 시시각각 느껴지는 남편의 빈자리에 또다시 오열했지만, 남은 세 딸과 배 속의 태아까지 네 아이를 생각해 어떻게든 기운을 차려야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나를 이용해 아주버님이 남편의 생명보험금을 꿀꺽한 사실을 나중에 알고 나는 독해지기로 작정했다. 갓 태어난 아들을 친정집에 맡긴 뒤 전세금을 빼서 달동네에 허름 한 주택을 샀고, 지하와 옥탑에 세입자를 들여 고정 수입을 마 련했다. 일은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무작정 뛰어든 통에 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해 서빙, 건물 청소, 전단지 배포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밖에 나가 보람과 재미를 느끼는 날도 아주 없진 않았지만, 모 멸과 멸시를 감내해야 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는데 사는 게 고 달프기는 집에 있는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저희들끼리 밥을 해 먹겠다며 연탄불 앞에서 설치다가 화상을 입기도 했고, 겉 보기엔 멀쩡하나 알고 보니 정신분열을 앓던 세입자가 해코지 를 해오는 통에 두려움에 떨며 엄마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아찔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방패막이처럼 든든하던 남 편 생각이 간절했다.

살림살이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연로하신 친정 부모에게 언제까지 막내를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4년 만 에 아들을 집으로 데려왔다. 막내딸은 그때까지 제 동생을 ‘외할머니 아들’로 생각했는데 “오늘부터 같이 살 거다”라는 말에 어리둥절해하던 그 아이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입 하나가 늘어난 만큼 어깨가 더 무거워진 그즈음 미국에 사는 사 촌언니와 연락이 닿았다. 일자리 를 찾아 용감하게 LA로 건너간 언니는 미국 남자와 재혼해 제법 여유롭게 지내는 모양이었는데, 나더러 그쪽(LA)으로 와 같이 살자는 거였다. 벌이야 한국에 비할 것도 아니고 아이들 영어 가르치기에도 좋으며, 풍족한 사람을 만나 재혼까지 하면 금 상첨화가 아니겠냐는 언니의 꾐에 마음이 기울었던 것도 사실 이다. 그러나 홀로 LA에 건너가 적응할 동안 넷이나 되는 아이 들을 누가 보살펴준단 말인가. 결국 이민은 해프닝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재혼하자며 매달린 남자도 몇 명 있었지만 나는 지금껏 홀로 4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길렀다. 5년 전 막내까지 결혼시 켰으니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낸 셈인데 아직도 근근이 건물 청 소를 나가며 손주들 과자값을 벌고 있다. 지난날을 떠올리면 내 몸이 어떻게 그 모진 세월을 통과했는지 새삼 아득하지만, 아마도 새끼를 품은 어미라 견디는지도 모르게 견뎠다는 생각이 든다.
 

INTERVIEW 2

박하령(가명) 씨
아픈 남편 대신 생활전선으로
 

영업 맨이던 남편은 늘 활달하고 패기가 넘쳤다. 리더십 강하고 판단이 빨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업해야 한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 말이 씨가 됐는지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사업을 하겠다며 정말 회사를 그만둬버렸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불안감이 컸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두 아이가 태어난 뒤로 ‘잘 살아보세’가 삶의 모토가 된 그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내 명의로 노래방을 차려 밤낮없이 일했다. 덕분에 아주 부자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여유로운 삶을 살아왔기에 나는 남편을 믿고 지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장밋빛 미래를 보장할 것 같던 사업은 우리를 큰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퇴직금과 가게 정리한 돈을 모두 보태 사업 자금을 댔지만 충분하지 않았고, 수월할 것 같던 거래처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동업자 중 하나가 자금을 횡령해 잠적하면서 전세금까지 투자했던 우리 집은 하루아침에 알거지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남편은 충격으로 쓰러져 뇌수술까지 받았다. 일일이 털어놓을 수 없었던 압박감, 사람에 대한 배신감, 식구들에 대한 죄책감 등 남편이 삭여야 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었다. 수술실 앞에서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며 애 아빠를 기다렸던 나는, 그 후 재활이 필요한 남편을 대신해 가장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처녀 적작은 회사에서 경리 일을 봤을 뿐 이렇다 할 경력이 없던 나는 급한 대로 집 근처 고깃집에 들어가 접시를 닦았고, 그 후 병원에 간병인으로 취직해 일했으며, 몇 년 전부터는 지인의 도움으로 미싱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원피스나 블라우스 같은 여성복을 만드는 곳인데 손이 빠르고 성실하다는 이유로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일하고 있다. 이만큼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까지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다 말하자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거다. 그만큼 세상은 물정 모르는 아줌마에게 냉소적이고 몰인정한 곳이었는데‘혹한’을 겪을수록 그 속에서 버텼던 남편이 가엽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더 잘해주려고 마음을 썼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남편은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일을 시작하더니 요즘은 지게차 운전을 배우느라 열심이다. 우리 내외의 고생이야 그렇다 쳐도 어릴 적부터 철이 폭 들어버린 남매를 보면 가슴 한편이 시린데, 일찌감치 마트 직원으로, 텔레마케터로 일을 시작해 다달이 생활비를 보탠 덕분에 얼마 전에는 지하 단칸방을 벗어나 아파트로 이사까지 할 수 있었다. 네 식구의 노고가 그대로 담긴 이 집에서 나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남몰래 잘 운다.

술이좀 올랐다 싶으면 여지없이 군가를 부르던, 바보 같은 표정으로 동네 아기들을 웃기려 애쓰던, 무엇보다 처음 본 우리 엄마에게 살갑게 팔짱 껴주던 그 남자가 내 남편이 된 지도 어느덧 30년이 다 된다. 짐작도 못해본 시련을 그런대로 넘길 수 있었던 건 곁에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INTERVIEW 3

성현진(가명) 씨
남편과의 이혼 후 싱글맘의 길
 

혼기를 꽉 채우고도 넘었을 무렵, 뒤늦게 이상형에 가까운 남자를 만난 나는 앞뒤 잴 거 없이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딸을 낳아 키우며 이것이 여자의 행복이겠거니 믿으며 살았다.

그 행복이 송두리째 흔들린 건 숨기다 숨기다 결국 터져버린 남편의 사업 문제 때문이었다. 귀가 유난히 얇아 남의 말에 잘 휘둘린다는 건 알았지만, 지인의 감언이설에 속아 다 망해가는 공장을 인수해 고군분투 중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일로 집에 차압 딱지까지 붙이고서야 마지못해 사정을 털어놓는 남편에게 나는 큰 배신감을 느꼈다.

차근차근 더듬어보니 남편은 처음부터 나를 배우자로 존중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정다감한 애정 표현을 하는 적도 별로 없었고, 친정 대소사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매사 방관적 태도를 취할 뿐 본인이 나서서 뭔가 주도하고 이끄는 적도 없었다. 그즈음 그게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나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것 같다.

남편 앞으로 생긴 막대한 빚은 갚아도 갚아도 줄지 않을 성싶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자투리 돈이나마 버는 듯했지만, 주머니에 들어오는 족족 빚을 갚아야 해서 쥐어줄 생활비랄 게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분식점에서 김밥도 싸보고, 일식집에서 서빙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발바닥에 족저근막염이 와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됐다.

형편이 더 나을 것도 없는 친정에 손을 벌려가며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각박함 자체였다. 데면데면한 남편과 이 모든 게‘사람 잘못 들어온 탓’이라며 억지를 부리는 시어머니 사이에서 딱 미치지 않을 정도로만 버틴 나는 결국 싱글맘의 길을 택했다.

그 후 지인이 ‘서 있는 일이 아니라 괜찮다’며 권유한 택시 운전이 내 삶에 큰 전환점이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처음에는 만족보다 고충이 더 컸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이라 길을 잘 아는 손님만 선별해 태웠고, 여자 운전사가 특이했는지 실없이 농담을 주고받자고 들이대는 남자도 있었다. 일에 요령과 재미가 붙기 시작하는 3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비슷한 처지의‘언니들’ 때문이었는데 속사정을 듣고 보면 남편의 실직, 사별, 이혼 같은 이유로 생계형 기사가 된 경우가 많았다.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아홉 시까지 하루 열두 시간 즐겁게 서울을 누비는 나는 대개 웃는 표정을 짓고 있다. 차창으로 느껴지는 계절의 변화, 대개는 사려 깊고 따뜻한 승객들, 라디오가 전해주는 세상의 다양한 소식…. 이 모든 것이 나에게‘살맛 나는 재미’로 다가온다. 물론 온 신경을 집중하며 운전대를 잡는 일이 녹록지는 않아서 저녁에는 자리에 눕자마자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지지만, 그마저도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는 반증처럼 느껴진다. 중학생 딸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들지만, 그래서 더 성실하고 반듯한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언젠가 딸아이가 힘든 벽에 부딪히면 ‘괜찮다, 그래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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