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배우의 품격, 박근형

기사 요약글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두고 ‘늙었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고요.

기사 내용

 

여든을 바라보는 그는 촬영장에 있는 누구에게도 함부로 말을 놓지 않았다. 음료를 건네 받을 때나, ‘멋지다’는 찬사를 듣고 난 뒤에도 꼭 감사 표시를 잊지 않았고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서던 순간,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바람에 젊은 기자를 황송하게 만들기도 했다. ‘똥 배우’라고 멸시 받던 시절부터 ‘살아 있는 연기 교과서’로 불리는 지금까지 그는 늘 겸손하고 지혜롭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내버려둘 만큼 안일하지도 않았다. 눈치 보지 않는 삶, 의지대로 사는 인생을 살다 보니 왕년에는 ‘별나다’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내 식대로 창조할 여지만 있다면 배역의 경중을 따지지도 않았다. 박근형이 시대에 도태되지 않은 몇 안 되는 명배우로 인정받는 이유다.

 

벌써 한 해의 끝을 바라보고 있어요. 올 한 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뭘까요?
올여름 <아버지>란 작품으로 삼십 년 만에 다시 연극 무대에 선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관점을 그린 작품인데, 딸과 사위를 알아보지 못한 채 매사 낯섦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꽤 안타깝죠. 늘 연극 무대가 그리웠지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선뜻 나서질 못했는데 다시 서고 보니 참 좋더라고요.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영화 <그랜드파더>로 쟁쟁한 후배들을 제치고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어요. 1991년 대종상 남우조연상 이후 25년 만의 수상인데 감회가 어땠나요?
전혀 예상을 못했기 때문에 일단 놀랐고, 기분이 무척 좋았지만 짐짓 담담한 척도 좀 했죠(웃음). <그랜드파더>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아버지가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깨닫고 복수를 한다는 설정인데 상을 주니까 영화가 설득력 있게 그려졌구나 싶어서 마음이 놓였어요.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시니어를 소재로 한 문화 콘텐츠가 많아지는 것 같아요. 큰 히트를 쳤던 tvN 예능 <꽃할배>도 그랬고 영화 <장수상회>나 <그랜드파더> 역시 ‘어르신들의 삶’을 조명했죠. 이 모든 작품에 박근형이 있었고요.
그러니 감사한 일이죠. 이런 콘텐츠를 기획한 분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우리 사회는 노인에 대해 ‘보수적이다’ ‘고집불통이다’라는 식의 편견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인데 그들도 젊은 시절엔 누구보다 진보적이었고, 요즘 젊은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지식 수준이 높았단 말이죠. 그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세대 간의 오해와 불신이 생기는 건데 영화나 드라마가 이런 문제를 조금이나마 완화해주는 면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어른들이 얼마나 스스로 깨닫고 실천할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왕년에 내가~” 하고 패악이나 부리며 돌아다니면 누가 그 사람을 어른으로 인정해주겠어요.

늘 젊은 배우, 스태프와 어울려 작업을 하는데 이른바‘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시는 것 같아요.
젊은 감독들과 일하다 보면 가끔 ‘왜 저런 설정을 요구하지? 왜 저런 구도를 고집하지?’ 싶을 때가 있거든요. 수십 년 연기를 했으니 내 나름대로 얼마나 숱한 경험이 쌓였겠어요. 순간 좀 못마땅할 때가 있지만 나중에 완성본을 보면 ‘아, 꼭 필요한 장면이었구나’ 수긍이 가면서 또 하나 배웠다는 생각이 들죠. 제가 뒤늦게 4학년 2학기에 복학해서 대학을 사십 년 만에 졸업했는데 손주뻘 되는 학생들과 공부하면서 그 순수한 상상력, 과감한 시도에 존경심을 느낀 적도 많았어요.

그래서일까요? 박근형 선배님을 존경한다는 후배들이 유독 많더라고요. 올해만 해도 배역을 위해 대형 면허를 취득하고, 37℃가 넘는 밀폐된 공간에서 촬영하다 쓰러지는가 하면, 감정 표현을 위해 몇 시간이나 몸에 묶인 포박을 풀지 않는 열정을 보였다고요. ‘명배우, 대배우’로 칭송 받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대배우란 말은 너무 황송하고(웃음). 지금껏 연기하면서 남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해오긴 했어요. 작가가 써준 대로 연기하기보단 내 상상력을 덧입혀 나만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 내자는 욕심을 부렸죠. 그래서 하찮아 보이는 역할이라도 내가 ‘창조’할 만한 여지가 있으면 무조건 맡았어요.

자아, 신념, 의지 이런 것들이 굉장히 강한 편인 것 같은데 그래서 곤란한 적은 없었나요?
왜요, 많았죠(웃음). 내가 1969년에 프리랜서를 선언한 사람이에요. 그 당시만 해도 배우들은 각 방송국에 소속돼, 배정된 작품을 연기하는 식이었는데 나는 그게 영 별로더라고. 그냥 내 구미에 맞는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서 파격적인 선택을 한 셈인데 덕분에 원하는 연기를 하며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죠. 물론 어려운 점도 만만찮았어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사를 꿈꿨다고 들었어요. 배우가 된 계기는 뭔가요?
어릴 땐 얼른 의사가 돼서 아버지의 병을 고쳐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죠. 전북 정읍에서 서울 휘문고등학교로 유학을 갈 만큼 공부도 곧잘 했는데, 고1 때 전국연극대회에 참가하면서 생각이 바뀐 거죠.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어릴 때 배우를 꿈꿀 만한 환경에서 자라긴 했어요. 우리 집이 큰 여관을 했는데 전국을 떠돌던 유랑 극단 단원들이 한동안 머물다 가고는 했거든요. 저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가 궁금증도 생겼고, 어머니 손잡고 구경을 다녀온 날이면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곧잘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죠. 남들 앞에서 뭔가 표현하고 칭찬받는 과정을 즐겼는지도 모르고요. 연기 쪽으로 가닥을 잡은 뒤에는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좀 특이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것저것 기록하는 걸 좋아했어요. 예를 들어 더벅머리에 축 늘어진 안경을 쓴 사람을 흘깃거리며 외모적 특징과 그 사람의 성격, 개인사를 상상해 마치 소설을 쓰듯 했던 거죠. 그런 과정이 다 즐거움이고 희망이었어요.

연극계를 거쳐 KBS 공채 탤런트로 입문했어요. 왠지 처음부터 ‘에이스’로 통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천만에요. 연기 못 한다고 맞기도 엄청 맞았고 ‘똥 배우’ 소리도 심심찮게 들었죠. 지금이야 웃으며 회상하지만 그때는 모멸감과 괴로움 속에서 내 것을 찾느라 늘 몸부림을 쳤어요.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는지 하루에 담배를 세 갑이나 폈을 정도였죠. ‘빨리 이 위기에서 벗어나 정상에 올라가자!’ 그런 마음뿐이어서 전투하듯 연기를 했고 ‘네 말보다 내 말이 더 맞다’며 남들과 부딪치는 일도 많았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작품이든 결국 ‘사람’이 근간이라고 이해하게 됐고 결과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하다는 판단도 섰죠. 온화하고 은유적인 방법으로 상대와 의견을 조율하다, 결정적 순간에 연기로 나를 폭발하듯 드러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부터 삶이 훨씬 편안해졌어요.

 

 

방황하던 시절에 위로가 된 건 역시나 가족이겠죠?
그럼요. 그 불안하고 위태로운 시절을 생각하면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예요. 내 개인적 욕심 때문에 알게 모르게 식구들이 감수해야 할 고통이 컸을 거예요. 그래서 내 1순위는 언제나 가족이죠. 내가 5남매 중 둘째인데 다들 원만한 관계이긴 하지만 우애가 깊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그 점이 아쉬웠는데 우리 세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얼마나 친한지 몰라요. 각자 가정을 일궜지만 늘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죠. 요즘에는 힙합에 빠져 있긴 하지만, 만화 그리기에도 큰 소질을 보이는 둘째 손주에 대한 회의가 자주 열려요(웃음). 다 같이 녀석의 장래를 고민하는데 모두 얼마나 진지한지 몰라요. 내 스케줄이나 이동을 도맡아 해주는 것도 다 자식들이에요. 남과 함께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든든하죠. 아들, 딸, 며느리, 손주 다 모여 있는 걸 보면 ‘나 같은 외톨박이가 언제 이렇게 일가를 이뤘을까’ 하며 흐뭇합니다.

틈날 때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사랑꾼’으로도 유명한데요, 늘 애틋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 뭐예요?
몇 년 전 아내가 암에 걸리면서부터 전화를 자주 하게 됐어요. 늘 곁에 있어줄 수 없으니까 전화로라도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 뭘 하는지 묻고 챙겼던 거죠. 집사람이 잘못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무조건 잘해주고 싶어서 엉터리 같은 소리를 해도 다 받아주고 이해했어요. 다행히 완치 판정을 받았고, 그 고비를 계기로 아내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으니 이것도 전화위복인가 싶죠.

반대로 스스로를 돌보려는 노력엔 뭐가 있을까요?
담배는 35년 전에 이미 끊었고 아침마다 30분씩 스트레칭을 하죠. 동네 실내 골프장에서 스윙 연습도 곧잘 하고요. 무엇보다 먹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집사람이 아프면서부터 같이 식단 관리를 했는데 육류는 1주일에 한 번 정도, 대부분 생선과 채소 위주로 식사를 하죠. 최근 고기가 몸에 좋다는 취지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옳거니 싶어서 이제 고기를 좀 먹자고 했는데 여전히 집사람이 푸성귀만 차려줘서 불만이에요(웃음).

많은 걸 이룩한 인생이지만 누군가 이루고 싶은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어요?
젊은 시절엔 내가 70대가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잊고 지내던 나이가 떠오르면 깜짝깜짝 놀라죠.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해보니 꿈이랄까, 이루고 싶은 게 하나 있긴 하더라고요. 고향에 내려가 그저 평범한 할머니, 아저씨, 회사원, 식당 사장, 학생들을 모아놓고 서당 훈장님이 천자문을 가르치듯, 그렇게 연극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사람들이 문화의 힘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거든요. 빙 둘러앉아 맡은 배역대로 극본을 읽는다고 생각해봐요. 처음엔 얼마나 오합지졸이겠어요. 하지만 점차 재미가 붙고 좀 더 잘하고 싶은 욕심도 생기겠죠. 왕년에 ‘배우나 한번 해볼까’ 싶었던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아요(웃음). 그렇게 원석을 다듬듯 실력을 갈고 닦아 지역 곳곳의 작은 무대에서 연극을 한다면 아마추어 배우들은 자아실현을 할 거고 관객들은 문화 공연을 즐기겠죠.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말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죽는 날까지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두고 ‘나이가 많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늙었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고요. 젊고 늙음은 결국 ‘마음의 상태’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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