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현재에 집중해온 배우 심혜진

기사 요약글

심플하고 선명한 태도로 늘 현재에 집중해온 배우 심혜진의 이야기.

기사 내용

 

예전 작품이나 사진을 들여다보며 추억에 빠지는 일도 없고, 지나간 일을 되새김질하며 후회하는 법도 없단다. 심혜진에게 삶은 늘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형’으로 흘러간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배우가 됐고, 결혼을 했으며,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현재에 다다랐다는 담백한 말로 자신의 시간을 설명하는 그녀.

 

구릿빛 피부가 건강해 보여요.
지난주까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느라 피부가 좀 탔거든요. 33일 코스로 다녀왔는데 무려 800km를 걸었어요.

혼자서요?
거의 그렇죠. 지인이랑 같이 떠나긴 했어도 순례길을 찾은 만큼 따로 시간을 보냈거든요. 사실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 촬영 후 여유가 좀 생겼는데, 예정됐던 여행이 취소되는 바람에 부랴부랴 목적지를 산티아고로 바꿨어요.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고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이때 아니면 또 언제 가겠나 싶었죠. 안전은 괜찮을까? 남편은 누가 챙기지? 이런저런 걱정이 들었지만 다녀와보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서 뭘 느꼈는데요?
처음엔 하루 종일 걷다 보니 몸이 너무 고달파서 뭘 느끼고 말고 할 것도 없었어요. 그저 종아리 땅긴다, 허벅지 아프다 같은 생각만 들었는데 한 일주일 지나고 보니 그제야 풍경도 눈에 들어오고 내가 여길 왜 왔는지에 대한 생각도 정리가 되더라고요. 역시 몸이 편해야 잡생각할 여유도 생기나 봐요(웃음). 여하튼 혼자 800km나 걸었다는 점에서 뿌듯한 성취감도 느꼈고, 내가 이만큼 의지력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내심 안도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여행은 다녀왔으니, 앞으로 휴식기 동안 무엇을 할 계획이세요?
남편 내조도 하고,‘클럽인너’라는 호텔을 운영하고 있으니 잘 돌아가는지 이것저것 한 번씩 둘러봐야죠.

안주인으로서 호텔 경영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들었어요.
경영까진 아니고요. 호텔 한쪽에 꽃을 심거나 로비 같은 데 그림, 장식물 등을 배치하곤 했는데 처음에나 좀 그랬지 지금은 남편에게 맡기는 편이에요. 두 사람의 취향이 중구난방으로 배치되다 보면 호텔의 통일성이 깨질 수 있겠더라고요. 평생 사업을 해온 사람이니만큼 남편이 모든 면에서 훨씬 더 전문가이기도 하고요.

남편과 금슬이 무척 좋기로 유명한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났어요?
제 지인이 남편의 대학 후배라 소개해줬어요. 우리 부부가 둘 다 다혈질이라 서로를 보고 있으면 꼭 거울을 보는 느낌인데 가끔 ‘내 모습이 저렇겠구나’ 싶어서 어떤 날은 좋다가 어떤 날은 또 반성하게 돼요(웃음). 그렇게 좋은 자극을 주고받다 보니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어 결혼까지 하게 됐죠.

‘사랑 표현에 익숙한 부부’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늘 연애 시절 같은 관계를 이어간다고요.
아이고. 결혼한 지 15년이 됐는데 어떻게 매일 곰살맞게 굴어요. 여느 부부들이랑 똑같이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고, 적당히 알아주겠지 하며 넘어가기도 하는데, 다만 가끔 기분 좋으라고 립 서비스를 해주죠. 남편이 사업 성과를 냈다는데 “당신 참 잘했다, 대단해”라고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남편도 “티브이 보니까 당신 연기를 잘하더라, 그러고 보면 우리 마누라가 예쁘긴 해” 같은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해요. 그냥 듣기 좋은 소리겠거니 하면서도 또 웃음이 나죠. 그런 사소함이 관계에 윤활이 되는 것 같고요.

그러고 보니 올해가 데뷔한 지 31년째 되는 해예요. 돌이켜보면 어떤 기분이 들어요?
벌써 그렇게 됐어요? 난 굳이 따져보고 살지를 않아서 잘 몰랐네. 그냥 번개처럼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아요. 얼떨결에 배우가 됐고,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연기를 하는데 여기저기서 일이 막 밀려들더라고요. 그러다 결혼을 하고 어느덧 사십 대를 넘어 오십 대가 돼버렸어요. 지난날을 곱씹을 여유도 없었지만, 딱히 과거를 돌이켜보고 그 안에서 뭘 찾고 말고 할 의지도 없었던 것 같아요. 흘러간 시간을 붙잡고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앞으로 갈 길이 더 중요한데.

확실히 감상적인 스타일은 아니네요.
로맨틱, 낭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죠(웃음). 옛날 사진 꺼내 보고 ‘그땐 그랬지’ 추억하는 법이 없거든요. 슬프다, 기쁘다, 화난다, 웃기다 뭐 이런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긴 하지만 그걸 간직하고 싶어서 뭔가를 남기진 않아요. 훗날 그 흔적을 더듬어본다 한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잖아요. 그때의 감정이 똑같이 느껴질 리가 없죠. 과거가 지금 내 발판을 만들어주긴 했겠지만, 그보단 현재, 미래가 훨씬 더 중요해요. 정체돼 있다는 느낌, 저는 그게 그렇게 싫더라고요.

그럼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어요?
구체적으로 말하긴 그렇고, 그냥 제가 적재적소에 쓰임새 있게 활용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사회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바람은 있죠.

학창 시절 ‘특별한 삶’을 꿈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배우가 됐나요?
그 특별함이란 어떤 직업적 특성이 아니라 그저 무슨 일을 하든 나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의미였어요. 배우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고요. 사진 모델을 하던 친언니를 몇 번 쫓아다니다가 우연히 광고모델로 발탁됐는데, 김지미 선생님께서 배우를 권유하셔서 이 쪽 일을 하게 됐지요.

해보니 어떻던가요?
몇 번 고사하다 얼떨결에 시작한 일이라 처음엔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죠. 어린 나이라 그랬는지 불합리해 보이는 점도 정말 많았고요. 왜 이 한 장면을 찍기 위해 이렇게 긴 시간을 대기해야 하지? 나는 그냥 내 생각을 얘기했을 뿐인데 왜 이분은 ‘감히 네가’ 하는 반응을 보이는 거지? 온통 이해 안 되는 것들 투성이라 다시는 영화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또 적응을 해서 삼십 년 넘게 배우를 하고 있네요(웃음).

1996년 한 해에만 대종상(<은행나무 침대>), 청룡영화상(<박봉곤 가출사건>), 백상예술대상(<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을 다 휩쓸었고, 1997년엔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두 번이나 여우주연 상을 받는 등 배우로서 최고의 시절을 누렸어요. 대중이 심혜진의 어떤 점을 좋아했다고 생각하세요?
그 전까지 여자 연예인들은 단아하고, 아담한 유형이 많았는데 저는 전형적인 미인도 아닌 데다 키가 크고 하고 싶은 말도 딱딱 하는 타입이라 좀 신선하게 느껴졌을 것 같아요. 시대에 따라 약간씩 이상적인 여성상이 달라지는데 제가 커리어 우먼, 신여성 같은 캐릭터를 주로 맡았거든요. 1980 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던 시점이었으니 그런 도회적 이미지가 어필될 수 있었겠죠.

 

 

심혜진에게도 콤플렉스가 있었나요?
왜 없겠어요. 제 키가 169cm인데 데뷔했을 때만 해도 남자 배우들보다 키가 커서 구두를 못 신게 했어요. 어릴 때부터 늘 남보다 키가 커서 눈에 띄었는데 그게 별로 좋진 않더라고요.

학창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어요?
궁금한 건 도저히 못 참는 학생이요. 호기심이 굉장히 많아서 어른들이 위험하다고 일러준 장소, 행동을 한번씩 몰래 해봤어요. 친구들은 혼나는 게 두려워 엄두를 못 내는데, 저는 걸려서 혼나더라도 일단 저게 얼마나 위험한지 겪어봐야 직성이 풀리더라고요. 그런 성격은 어른이 돼서도 변함이 없어서 남들 보기엔 무모해 보이는 짓(?)도 많이 해봤어요. 뒤에 책임지는 한이 있더라도 궁금해하며 짐작만 하는 것보단 낫더라고요.

차가운 성격이 아닐까 했는데 털털하고 웃음이 많아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았죠. 저는 내가 누구에게 맞출 필요도 없거니와 다른 사람 역시 저에게 맞춰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웃고, 붙임성 있게 행동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여배우의 기분에 따라 촬영장 분위기가 달라지다 보니 제가 말 안 하고 가만있으면 다들 그렇게 눈치를 보시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마음을 고쳐먹은 게 삼십 대 초반쯤일 거예요. 철이 들면서 여러 사람과 둥글게 둥글게 어울려 사는 법을 조금씩 깨닫게 된 거죠. 털털해 보인다고 했는데, 제가 아무 걱정 없이 자기를 툭 내려놓는 스타일은 또 못 돼요. 늘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은 뭔가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쉬다가도 ‘꼭 누가 나를 찾을 것 같은데? 그 일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이런 막연한 부담감에서 늘 벗어나질 못해요.

뭔가 고민이 있으면 어떻게 해결하나요?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것도 결국 임시방편일 뿐이더라고요. 결국 내가 풀어야 할 ‘내 문제’이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어서 그냥 집요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요. 잊어버리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아주 질려서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물고 늘어지죠. 그렇게 나를 몰아가며 시간이 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게 또 심혜진다운 방식이고.

대중에게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요?
살면서 남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쳐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웃음), 그래도 굳이 대답을 해야 한다면 대중과 똑같이 현실에 발 붙이고 사는 배우로 남고 싶어요. 배우는 작품에 따라 이미지가 계속 만들어지고 변하잖아요. 그래서 평범함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저도 별반 다를 바 없어요. 작품 속에서나 배우고 연예인이지 현실에서는 그저 똑같은 한 시절을 살아 가는 사람이죠. 제 이십 대, 삼십 대, 사십 대를 보셨던 만큼 익숙하고 편한, 오랜 친구 같은 배우로 저를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끝으로 누군가 인생의 전성기를 묻는다면요?
가장 젊고 예뻤던 시절이라면 당연히 20대겠지만, 자기 삶에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시기를 뜻한다면 수도 없이 오는 게 전성기 아닐까요? 그렇게 따진 다면 저는 꽤 자주 전성기를 경험해요. 오후에 커피 한 잔 하면서 책 읽고 뒹굴뒹굴하는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고, 촬영장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수다 떨 때도 생생한 즐거움을 느껴요. 비행기가 이륙할 때마다 느껴지는 설렘과 긴장감은 제가 제일 사랑하는 행복의 종류죠. 그렇게 규정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오고 갈 수 있는 것, 그게 전성기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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