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또 자유롭게, 생태적으로 살기

기사 요약글

노동법의 권위자인 박홍규 교수는 <니체는 틀렸다> <조지 오웰: 수정의 야인> <내 친구 톨스토이> 등 무려 150여 권의 책을 집필하며 인문학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20여년 전 생태적 삶을 위해 경북 경산으로 귀촌했다. 속도를 늦추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그에게서 답을 구해 보았다.

기사 내용

 

 

 

지난번에 집 전화로 연락드렸더니 지방 출장 중이더군요. 휴대폰이 없어서 돌아올 때까지 연락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사뭇 놀랐습니다.

 

삐삐, 휴대폰과 같은 통신기기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집 전화와 이메일로 외부와 소통합니다. 정 급할 때는 아내가 저를 대신해 문자메시지를 보내줍니다.

 

 

휴대폰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안 되는 시대인데요.

 

요즘은 뭘 하나 사더라도 휴대폰으로 인증해야 하고, 공중전화도 사라져 급한 일이 있을 때 연락하기도 불편하지요. 그걸 알지만 사용하지 않는 겁니다. 생태적으로 살기 위한 저만의 실천이지요.

 

제 눈에 비친 휴대폰은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집에 있는 전화기를 들고 나와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수다 떠는 기능, 소재를 확인해 주는 정도의 기능 외에 다른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굳이 없어도 된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머리와 수염을 기르는 것도 느리게 사는 방식 중 하나인가요?

 

느리게 사는 삶은 한편으로 관리하지 않은 삶이지요.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아요. 저도 수염을 기른다고 아버지와 동료 교수들에게 핀잔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놔두는 것은 틀에 갇히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신체발부수지부모’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생긴 대로, 태어난 대로 사는 것이 좋은 삶이란 의미잖아요. 유교적으로 해석하지만 저는 굉장히 생태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 조상들을 보세요. 상투를 틀었지만 상투는 자르는 개념이 아니라 묶는 개념입니다. 수염도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그냥 둔 겁니다.

 

이곳에 내려오면서 아내와 함께 우리 힘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어요. 가장 먼저 한 일이 폐자재로 집을 짓는 것이었지요. 먹고 자는 집까지는 아니더라도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직접 짓고 싶었거든요. 어설프게나마 집을 직접 지었습니다.

 

 

그럼, 의와 식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옷은 한 번 사면 원래 오래 입는 편입니다. 오늘 입고 있는 옷도 산 지 20년이 넘었지요. 소매가 해졌지만 개의치 않아요. 그 나름의 멋이 있으니까요. 또 필요하면 리사이클 상점으로 갑니다. 이런 곳에서 2,000원이면 괜찮은 옷을 살 수 있습니다.

 

먹는 문제는 쌀을 제외하고는 텃밭에서 자급자족하며 해결하고요. 생태적인 삶은 비싼 삶이 아닙니다. 자연이 어떻게 비싸겠습니까?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것은 거의 다 공짜입니다.

 

 

1년 식재료를 얻을 정도면 밭농사를 많이 짓나 봅니다.

 

600평 텃밭에 들깨, 고구마, 호박, 파, 고추, 방울토마토 등 다양한 식재료를 유기농으로 재배하고 있지요. 사실 시골에 내려올 때 땅을 어느 정도 소유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했습니다. 그때 우리 국토에서 경작 가능한 땅을 7,000만 인구로 나누니 1인당 300평 정도 돌아가는 것으로 계산되더군요. 그래서 저와 아내 몫을 합해 600평으로 잡은 겁니다.

 

부족하지 않아요. 두 식구가 먹고 남을 만큼 충분히 수확합니다. 다만 생태 농업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더군요. “밭이 왜 이렇게 지저분하냐?” “왜 풀을 안 뽑냐?” 주변에서 말을 많이 합니다. 남의 말에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밀어붙여야 가능한 일이더라고요.

 

 

 

 

왜 느리게 살려고 노력하나요?

 

번잡함이 싫어서가 아니라 평화주의자로 살기 위해서죠. 평화주의자는 삶의 방식이 생태적이고 인간관계는 자유롭고 평등해야 합니다. 시골에 사는 것만으로도 그 삶에 훨씬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구속하지 않잖아요. 계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러한 삶을 유지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가요?

 

사회적으로는 ‘빨리빨리’ ‘경쟁’ ‘성장’ 이런 용어지만 일상의 도구로 보자면 시계를 꼽을 수 있겠네요. 시계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인간의 삶은 슬로 라이프 그 자체였습니다.

 

시계는 단순히 시각을 재는 기계가 아닙니다. 시계를 차는 순간, 시계를 보는 순간 우리 삶은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똑같은 시간을 사는데 시간의 여유가 있다, 없다고 말하잖아요. ‘한 시간에 해야 할 일을 10분 만에 해내라’는 식의 시간의 압박을 받는 순간 인생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시간이 돈이다”는 참 나쁜 말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시계를 차지 않는 이유지요.

 

 

시계가 없으면 일과를 어떻게 계획해서 보내는지 궁금한데요.

 

제 일상을 소개하면, 새벽 4시 전후에 일어나 6시까지 집필을 합니다. 아침 식사 후 아내와 함께 밭일을 하지요. 일을 마치면 1시간 정도 걸어서 학교 도서관에 갑니다. 주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5시쯤 돌아와 저녁을 먹고 8시면 잡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잔다는 말입니다. 시계를 멀리하면 자연의 변화에 따라 몸이 적응합니다. 시골에서 생활하며 달라진 점이지요.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하지 않나요?

 

책도 써야 하고 또 읽어야 하니 일이 많은데 왜 심심하지요? 그리고 관점을 달리하면 됩니다. 학교까지 걸어 다니면서 제가 개척한 산길이 있어요.

 

매일 똑같은 길을 걷지만 한 번도 어제 본 길을 오늘 간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어제와 같은 풍경이 아니잖아요. 천천히 가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매일 달라지는 자연을 보고 즐기다 보면 지루할 새가 없지요.

 

 

이러한 일상이 한편으로는 외부와의 단절된 삶으로 비쳐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딱 필요한 만큼 최소한의 관계만 맺고 삽니다. 경조사나 동창회는 안 갑니다. 오로지 한 달에 한 번 경북지방노동위원회에 공익위원으로 참석하고, 가끔 외부 강연 외에는 이곳에서 지내지요. 물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예 단절하고 살지는 않습니다.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과 저녁 식사 정도는 자연스럽게 같이 하며 교류하고 있지요.

 

 

나이가 들수록 관계 속에 살라고 하는데, 외롭지 않나요?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니까 외로움을 느끼는게 아닐까요? 학연, 지연 때문에 의미없이 참석하는 자리가 너무 많아요. 주변을 봐도 경조사, 동문회 등 각종 모임에 참석하느라 바쁜 분들이 있는데 꼭 가지 않아도 될 자리까지 가더군요. 그 시간에 저는 아내와 함께 주변을 걷습니다.

 

사람들은 무리 안에 들어가야 안심이 되고 사는 느낌을 가지는 것 같은데,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모임이 삶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중년 이후 그런 자리만 줄여도 삶이 단순해질 겁니다.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한다면요?

 

제 방식은 좀 불편한 삶이지요. 그러나 느리게 사는 삶을 실천하려면 먼저 자기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근본적인 자기 성찰 없이 보여지는 모습만 바뀐다고 해서 느리게 사는 삶일까요? 가끔 제 책을 읽은 분이나 제 기사를 읽은 분들이 찾아옵니다. 꿈에 그리던 전원생활을 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지요. 시골에 산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삶의 방식을 고민하기 전에 그동안 살아온 자기 삶을 깊이 들여다보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성찰을 할 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길 바랍니다.

 

의외로 자기 삶을 후회하고 자책하는 중년을 많이 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경쟁 사회에서 승리자는 극소수이고 대다수가 패배자입니다. 혹 내가 경쟁에서 도태됐다, 패배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경쟁에서의 승리와 패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가꿔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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