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 30년 차 김미정 씨(56)는 나이 오십에 결혼 후 처음으로 자신의 통장에 남편 월급 외의 수입이 찍히는 경험을 했다. 김장을 함께 한 지인들이 재료비와 수고비 명목으로 송금해준 회비였다. 한 평생 살림만 하던 그녀가 돈도 벌고 보람도 느낄 수 있게 한 건 다름 아닌 ‘살림’이었다.
미정 씨는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해야 했다. 당시 작은 회사를 전전하며 힘들게 직장생활을 했던 터라 매달 받는 월급 이외에는 별다른 희망도 즐거움도 없었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자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두었고,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섰다.
서툴던 살림이 손에 익으면서 미정 씨는 점점 살림 재미에 푹 빠졌다. 아이도 연년생으로 셋을 낳았다. 남들은 아이 셋 키우랴 살림하랴 힘들겠다고 했지만 미정 씨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살림이 적성에 맞고 재미있었다. 매일 먹는 반찬은 물론 아이들 이유식부터 간식까지 모두 직접 만들어 먹였다. 자연히 아이들은 반짝반짝 예쁘게 자라났고, 살림도 윤기 있게 잘 돌아갔다.
시어머니의 손맛을 배우다
시어머니는 고향 시골집에 살면서 농사지은 곡식과 채소 등 먹거리를 철마다 올려 보냈다. 덕분에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고, 전통 음식 만드는 법도 많이 배웠다. 특히 장은 1년 내내 밥상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라 생각한 시어머니는 간장, 고추장, 된장도 빼놓지 않고 직접 만드셨다. 시어머니의 요리 철학(?) 덕분에 장 담그는 일은 미정 씨네 주요 집안 행사 중 하나였다. 매년 추수가 끝나는 늦가을 무렵이면 시어머니는 콩을 푹 삶아 메주를 빚었다.
엄격한 전통 방식으로 메주를 빚고 장을 담갔고 그때마다 미정 씨가 내려가 돕다 보니 저절로 장 담그는 기술을 전수 받았다. 이 외에도 매년 11월 말이면 시댁에 내려가 배추, 무, 알타리, 갓, 파, 고들빼기 등 다양한 김치를 몇 항아리씩 담갔다. 또 기본 재료인 장이 맛있으니 철마다 장아찌 담그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고추, 매실, 무, 오이, 깻잎, 참외, 더덕 등 다양한 채소와 굴비, 전복, 북어포 등의 어패류, 김, 파래 등의 해조류로 담근 다양한 장아찌를 만들었다.
소문나기 시작한 장 맛집
가까운 사이에 선물할 일이 있으면 투명한 유리통에 장아찌를 담아 주기도 하는데 그 어떤 선물보다도 환영 받았다. 그렇게 전통 방식 그대로 담근 미정 씨네 간장과 된장, 김치, 장아찌는 주변에 맛있기로 소문이 났다. 친구들이나 이웃 지인들로부터 맛보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했고, 한 두 번 먹어본 사람들 가운데는 아예 값을 매겨 정식으로 팔라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그 동안 돈을 받고 판매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는데 주변에서 하도 권하니 솔깃한 마음이 들었다.
쉽지 않았던 반찬가게 창업
본격 반찬가게 창업이 가능한지 알아봤다. 그런데 반찬류를 판매하려면 영업에 필요한 반찬가게 시설을 갖춘 후 영업신고서, 교육필증, 제조방법설명서, 건강진단서 등을 관할 특별자치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에게 제출해야 했다. 또한 가게를 열기 전이나 직후 식품위생 교육기관으로부터 식품위생에 관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이후에도 매년 식품위생에 관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했다. 미정 씨는 고민 끝에 선뜻 가게를 차리기에는 아직 자신이 여러모로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건강한 전통 먹거리로 가족들을 살뜰하게 보살피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삼삼오오 떠난 김장 여행
그러던 어느 날 친정 여동생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친구들과 함께 시골집에 모여 김장을 하고 나누자는 것이다. 미정 씨가 동생에게 나눠준 김치를 맛본 친구들이 낸 아이디어라고 했다. 각자 몇 포기씩 할지 알아보고, 농사짓는 이웃 주민에게 배추와 무를 주문했다. 고춧가루, 마늘, 파, 생강, 갓, 굴, 새우젓 등 김장거리들은 늘 거래하던 곳에서 어렵지 않게 준비했다. 드디어 김장 날, 무려 10명이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가끔 쉬러만 가던 시골집으로 향했다. 친구들과의 1박 2일 여행처럼 떠나 미정 씨의 필살기인 김장 레시피를 전수했다.
자연스러운 수순, 요리 수업
김장 여행 이후 뛰어난 요리 솜씨를 아껴두지 말고 나눠달라는 요청이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지인들과 함께 요리 실습을 하게 되었다. 김장, 장 담그기 회원들이 주로 참석했지만 기존 회원의 소개와 추천으로 새로 참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밑반찬부터 이유식, 아이들 간식에 이르기까지 요리 종류도 다양해졌다.
미정 씨네 주방이 실습실이어서 한 번에 4~6명 정도를 정원으로 하고 있다. 실습비는 재료비에 약간의 수고비를 얹는 정도로 책정해 재능기부 형태로 하고 있다. 참가자는 대부분 주부들이지만, 결혼을 앞두거나 막 결혼한 커플(주로 지인들 자녀와 그 친구들)을 위한 신혼기초요리반, 은퇴한 남편 친구들을 모아서 개설해 본 남자기초요리반도 뜻밖에 인기를 모았다.
경험에 붙여가는 노력
맛은 자신이 있었지만 내가 먹기 위해 잘하는 것과 남을 가르치는 것은 또 달랐다.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미정 씨는 TV에 나오는 요리 강사들의 강의 기법, 재료 손질 등 노하우를 지켜보며 배우기도 했다. 경험만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지만, 이론에서도 부족하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했다. 한식 조리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음식 만드는 게 좋았고, 살림이 즐거웠던 30년 차 전업주부 미정 씨. 30년 갈고 닦은 그 노하우를 자원으로 보람 있는 제2의 인생을 열었다. 전통 음식만큼 우리 몸에 잘 맞는 음식은 없다고 생각하며,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음식을 널리 알려 보다 많은 사람이 건강한 밥상을 마주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기획 임소연 글 김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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