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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열 마에스트로는 어릴 적부터 손으로 만드는 것을 즐겼다. 라디오, 오디오 등 각종 전자제품은 좋은 놀잇감이었다. 자연스럽게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졸업하고서는 IT 관련 업계에 몸담았다. 세계적인 슈퍼컴퓨터 제조사 ‘크레이(Cray)’ 한국지사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국내 국책기관 및 대기업의 슈퍼컴퓨터 구축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40대 초반에는 IT 벤처기업 이사로 일했다. 20년 가까이 몸담았던 IT 업무는 적성에도 맞고 재미와 보람도 있었다. 마침 늦둥이가 태어났다. 큰아이에게는 늘 바쁜 아빠였었다. 갓 태어난 늦둥이를 보면서 가족을 위해 잠시 멈춤을 결심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면서 미국 MBA 유학을 계획했다.
자기 계발을 위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몇 달간 유학 준비를 하던 중 생계를 위한 직(職)이나 나를 위한 업(業)이냐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무엇이 되느냐의 직(職)보다 무엇을 하느냐의 업(業)에 대한 관심이 커갔다. 점점 ‘업’으로 삶의 추가 기울었다.
IT 전문가, 늦둥이 아빠, 아마추어 첼리스트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또 하지 않으면 후회될 일은 무엇인지 등을 차분히 종이에 적어봤어요. 쭉 살펴보니 ‘소리’, ‘음악’, ‘악기’, ‘만들기’ 같은 단어가 많았습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죠.”
그는 음악 애호가였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누나의 영향이 컸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클래식 음반을 사 모았고 첼로 등 악기도 배웠다. 바쁜 직장 생활에도 틈틈이 음악의 날개 위에서 쉬곤 했다. 2001년 창단한 직장인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테헤란밸리 오케스트라’(지금의 서울시민교향악단) 창단 멤버이자 첼로 연주자로 활동했다.
2라운드를 고민하던 그에게 취미는 기회이자 가능성이었다. 악기 만드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40대 중반의 나이에 악기 제작가가 되겠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해외 유학은 더더욱 무리한 결정이었다. 아내의 응원과 지지는 큰 힘이 됐다.
“맞벌이 부부였는데 아내가 흔쾌히 유학을 허락해줬습니다. 막내가 어릴 때 빨리 유학을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다만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큰아이가 대학 입학하기 전까지는 돌아오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웃음)”
유학, 3년 만에 수석 졸업
2005년, 44세의 전직 IT 전문가는 현악기 제작가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가 유학한 크레모나는 바이올린 성지로 유명하다. 이 도시에서 바이올린이 처음 만들어졌고 악기의 명장 스트라디바리, 과르니에리 등이 활동했다. 그는 크레모나 국제 현악기 제작학교(I.P.I.A.L.L)에서 수학했다.
전체 5년의 과정 중 2학년에 편입했지만 이내 3학년으로 월반했다. 4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7년에는 이탈리아 피소네(Pisogne) 현악기 제작 콩쿠르에서 직접 제작한 첼로로 금메달(1위)을 수상했다. 치열한 공부와 배움 자체의 즐거움 덕분에 입학 3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을 하고서는 1년 반 동안 공방에서 도제 교육을 받았다. ‘칼슨 & 노이만(Carlson & Neumann)’ 공방이었다. 이탈리아 최고의 공방 중 하나로 세계적인 연주가들도 자주 찾는 곳이다. 도제 생활 하는 동안 그는 악기 세팅, 수리, 제작기술 등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공방 장인들을 통해 악기 제작가로서 악기와 연주자를 대하는 자세를 배웠습니다. 악기를 만들고 다루는 일은 머리와 손끝의 기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학 생활 내내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은 악기 제작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됐다. 크레모나라는 도시 자체도 배움의 장이었다. 현악기의 본고장답게 수많은 장인과 공방들, 재료상점들, 각종 전시 및 행사 등 일상의 모든 마주침에서 그는 배움의 밀도와 농도를 채우고 높여갔다.
세계 3대 현악기 제작 콩쿠르에서 수상
2009년 말, 그는 아내와의 약속대로, 첫째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 귀국했다. 5년 만이었다. 이듬해인 2010년에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현악기 공방을 열었다. ‘이성열 스트링랩’이다. 공방에서 그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직접 제작한다. 악기 수리도 병행한다. 공방을 열었지만, 운영에 대한 고민이 컸다.
그 자신이 음악 전공자도, 음악계 종사자도 아니었고 또 수입 악기를 선호하는 시장환경 또한 보이지 않는 장벽이었다. 그러나 그를 믿고 악기를 의뢰하는 연주자들이 매년 늘어났고 공방 운영도 어느덧 만 10년을 넘었다. 지난 2018년에는 소중한 성과도 있었다. 독일 미텐발트 국제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에서 첼로 부문 2위를 수상한 것이다. 4년마다 열리는 대회로 세계 3대 현악기 제작 콩쿠르 중 하나다.
“무엇보다 국내에서 만든 악기로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았다는 점이 더욱더 값진 수상이었습니다. 악기를 만들 때 연주자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저 역시 악기를 연주하고 있기 때문이죠. 연주자들과 진솔하게 소통하면서 연주하기 편하고 더 좋은 음색을 가진 악기가 되도록 진심과 정성을 다해 만듭니다. 꾸준히 좋은 악기를 만들면서 연주자들,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즐겁게 음악으로 교류하고 싶습니다.”
현악기는 줄을 진동 시켜 그 떨림을 이용해 소리를 낸다. 현 한 줄, 울림통의 각도 등 미세한 차이가 음색을 바꾸기 때문에 현악기 제작은 매우 섬세하고 견고한 작업이다.
“악기를 제작하게 된 지도 어느덧 16년이 흘렀습니다. 악기를 만든다는 것은 정교한 아름다움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악기와 악기 한 대를 만들기까지 배우고 익혀야 할 게 끝이 없습니다. 또 천 개의 도구를 가지고 수개월 동안 수없이 많은 과정을 거쳐야만 한 대의 악기가 완성됩니다. 부담도 크고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힘들지 않았습니다. 내가 원했던 ‘업’이었고 행복을 짓는 과정이었습니다. 치열했던 지난 노력과 경험이 이제야 무르익는 듯합니다. 내가 악기를 만들며 행복하듯 연주자 역시 연주할수록 행복한 악기이기를 바랍니다.”
글 김남희 사진 지다영(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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