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에서 여행감독으로, '독설닷컴' 고재열의 2라운드

기사 요약글

시사에 관심 많은 사람은 그를 촌철살인을 날리는 기자로, 독설닷컴 운영자로 기억한다. 그런 그가 여행감독으로 2라운드 인생을 열었다.

기사 내용

 

 

 

 

퇴사 소식에 놀랐어요.

 

 

8월 31일자로 <시사IN>을 퇴사했습니다. 원래 올해 초에 사표를 내려고 했는데 늦어졌어요. 20년을 기자로 지냈는데, 충분히 할 만큼 해서 졸업한다는 느낌입니다.

 

 

여행 감독으로 2라운드의 출사표를 내셨어요. 여행 작가는 익숙하지만, 여행 감독은 생소합니다.

 

 


말 그대로 여행을 연출하는 사람입니다. 미리 여행을 그려놓고 참가자들이 경험할 수 있게 도모하는 거죠. 제가 추구하는 플랫폼의 원형은 대학교 MT입니다. 유명 관광지를 찾아 MT를 가지만 정작 관광한 기억은 없을 거예요.

 

이럴 거면 굳이 왜 여길 왔나 싶은데, 돌아오면 달라져 있어요. 처음에는 다들 서먹하고 꼭 어시장에 있는 동태 같죠. 그런데 여행지에서 어울리고 함께 지내면서 해동되고 다시 팔팔하게 살아서 돌아와요. 이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고, 계속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분들과 함께 여행하시나요?

 

 


주로 삶의 원숙기에 접어든 중장년층이에요. 사회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찾고 생의 전환기에 서 있는 분들, 평소 알고 지내는 사람은 많지만 관계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분들이 대상입니다. 그분들에게 절묘한 만남을 주선하고, 다른 계획을 할 수 있는 모멘텀을 만들어드리는 거죠. 

 

 

변화의 사례가 있나요?

 

 


일과 육아로 지친 부부가 있었어요. 번갈아가며 저와 여행을 다녔는데, 점점 눈에 띄게 사이가 좋아졌어요. 그전에는 SNS에 배우자 얘기가 없었는데 이젠 같이 찍은 사진도 올려요. 다들 지치고 외로운 삶을 살다가 여기서 함께 쉬고 어울리며 위로를 받는 거죠. 

 

 

 

 

여행 감독으로서 첫 프로젝트로 캐리어도서관을 진행 중이신데, 낡은 캐리어에 책을 넣어 기부하는 방식이 신선해요.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셨어요?

 

 


동네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버려진 캐리어를 봤어요. 쓸 만해 보이는데 저걸로 뭔가 할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책장이 떠올랐어요. 바퀴가 있으니 운반하기 편할 테니까요. 캐리어에 책을 기증받으면 그 자체로 도서관이 될 수 있겠다 싶었죠.

 

 

캐리어 도서관 이전에도 꾸준히 책 기부를 진행하셨죠. 2011년 ‘기적의 책꽂이’가 그 시작이었고요.

 

 


기자 시절에 트위터로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추진했어요. 당시 팔로워도 많아서 어떤 제안을 하면 호응도 컸어요. 이왕이면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 하던 차에 TV에서 <기적의 도서관>이란 프로그램을 봤어요. 저걸 응용해 책을 기부하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지요.

 

내가 도서관까지는 못해도 도서방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책꽂이가 비어 있는 시설에 책을 채워줄 순 있겠다 싶었죠. 책을 기증받고, 보관할 장소를 찾고, 옮길 봉사자를 모으고, 택배 비용으로 사용할 후원금도 모으면서 1년 반 동안 11만 권을 모아 전달했어요. 법인도 없고 조직도 없이 혼자 코디네이터가 돼서 진행한 거죠.

 

 

캐리어도서관이 벌써 시즌 3에 접어들었어요. 올해 초 영등포 서울하우징랩에서 시작해 6월에는 문화역서울 284에서 두 번째 행사를 진행하셨죠.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사실 코로나19가 큰 장벽이었어요. 준비하는 과정에 제약이 많았고, 예상치 못하게 중단도 됐고요. 하지만 새로운 의미 또한 생겼어요. 어떻게 보면 사람이 여행을 못 가니까 책이 먼저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이 상황이 종식되면 우리가 책을 찾아가겠죠. 그곳에서 책을 보며 자신의 시간을 살찌울 수 있게 지금 미리 준비하는 셈이에요.

 

여행지로 갈 곳에 예약금을 걸듯 말이죠. 문화역서울 284에서는 전시 형태로 진행돼 홍보는 됐지만, 전시장이라는 특성상 책을 계속 모으기 어려웠어요.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데, 캐리어가 계속 쌓이니 절반은 안 보이는 곳에 숨겼어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계속되는 와중에 캐리어 250개가량을 모았고, 그중 100여 개를 기증했어요.

 

 

 

 

어디로 전달 됐나요?

 

 

통영 욕지도, 평창의 산너미 목장, 태안 백리포, 문경 단산 활공장 이렇게 네 곳이요.

 

 

장소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나요?

 

 

‘기적의 책꽂이’는 기부 봉사 차원이 더 컸어요. 서울은 책이 넘쳐나는데 지방은 여전히 책이 부족하니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는 게 목표였어요. 책의 재분배가 곧 지식의 재분배고, 결국 미래를 나누는 일이라는 의미를 뒀죠. 하지만 이번엔 여행에 관점을 두면서 이곳에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을 확장해봤어요. 도시에서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여행을 갔을 때도 책을 읽고 싶은 심리가 있죠.

 

그렇다면 우리가 갈 곳에 책이 미리 준비돼 있으면 어떨까? 도시인들이 전원에 가서 언제든 읽을 수 있게 우리가 먼저 책을 보내 준비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라이나전성기재단과 함께하는 이번 시즌 3은 여행 도서관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기부, 이 두 가지가 결합된 형태예요. 작은 도서관 운동이나 청소년 독서 운동을 하는 땡스기브와 함께하면서 의미 있는 목적지가 생겼어요.

 

 

계속 책과 함께하는 이유가 있나요?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어요. 집에 책이라고는 형과 누나가 쓰던 교과서뿐이라 책에 대한 갈망이 컸죠. 오죽하면 교과서를 재미있는 순서대로 골라 읽었겠어요? 도덕, 사회 순서로 읽다가 나중엔 산수까지 보는 지경이 됐죠(웃음). 학교에 가도 교실 앞에 있는 학급문고가 전부였어요. 어릴 때 책을 보고 싶어도 못 본 기억이 있어서 책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최근 블로그에 올리신 글에 2000만 권을 목표로 한다고 쓰셨어요. 진행 상황은 어떤가요?

 

 

계획대로 되고 있어요. 제가 10만 권을 모으고 BTS 팬클럽 아미가 도와준다면…(웃음).

 

 

BTS 팬클럽이요?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한국 책이라는 고급 콘텐츠를 제공하는 거죠. 시즌 1부터 몽골, 캄보디아, 베트남 등지로 갈 계획을 짰는데 코로나19로 못하게 됐어요. 우리 어릴 때 생각하면 <롤링스톤즈> 같은 잡지도 헌책방에서 돈 주고 살 정도로 좋아했잖아요. 마찬가지로 외국에 계신 분들도 한국 책에 관심이 있고 한국어를 배우려고 할 텐데 한국문화원 시설에 우리 책을 지원하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애초에 규모가 큰 글로벌 프로젝트였네요.

 

 

미국 의회도서관 장서가 1700만 권 정도라 해서 그보다 더 큰 도서관을 만들어보자는 포부로 2000만 권을 목표로 잡았죠. 우리는 한곳에 모여 있지 않지만 버추얼로 사람들을 모으면 세상에서 가장 큰 가상 도서관이 될 테니까요.

 

 

언제쯤 목표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죽기 전에는 해야죠(웃음). 의미 있는 발걸음인 만큼 가능하다고 봅니다. 시즌을 거듭하며 처음보다 점점 살이 붙고 있으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사실 기부를 하고 싶어도 이렇게 선뜻 나서서 도모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기부 봉사는 설계도 중요한 것 같아요. 기존에 활동하는 큰 기부 봉사 단체들이 많은데, 대개는 관료화돼 있어요. 그러면 관리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요. 제가 했던 프로젝트의 핵심은 기부받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혜택이 가고 기부자도 기부받는 곳에 바로 접촉할 수 있게 하는 거였어요.

 

대표도 임원도 없고 모두가 평등하게 힘을 모아 이루는 쪽으로 추진했습니다. 물론 장기적으로 하려면 구조를 짜야 할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구조를 짜고 사람들이 기분 좋게 모일 수 있는 판을 만드는 거예요. 가급적 목표 지향적인 태도는 자제하고 천천히 호흡하며 가자는 생각입니다.

 

 

이번 캐리어도서관에 관심 있는 분들께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기부를 해서 기분 좋은 것도 있지만 사실 본인의 책장과 독서 생활에도 좋아요. 식물을 키울 때 가지를 치고 잡초도 뽑아줘야 잘 자라잖아요. 독서도 마찬가지예요. 책을 사서 책장에 넣는다고 지적인 생활을 하는 게 아니에요. 중간중간 비우고 뽑아내는 작업도 필요해요. 책을 기증하고 책장을 비우면서 나와 책 사이에 긴장을 만들면 독서도 탄력이 붙어요.

 

 

감독님께서는 책의 가치를 믿고 계시는 듯해요.

 

 

책을 나누는 게 미래를 나누는 일이고, 결국 사람들의 가능성을 살려주는 일 아닐까요. 우리가 책을 많이 보냈으니 더 많은 사람이 읽을 테고, 그러면 이 사회가 더 선해질 거란 믿음이 있어요. 결국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좋게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인생 3모작 시대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기자에서 여행 감독으로 2모작까지 오셨는데, 세 번째 계획은 세우셨나요?

 

 

세 번째는 15년쯤 후가 되지 않을까요? 일단 두 번째까지는 열심히 벌어야죠. 지금처럼 비영리 기부 활동과 여행자 플랫폼을 계속 운영하되, 상품 개발과 컨설팅 같은 비즈니스도 적극적으로 할 생각이에요. 수입이 어느 정도 되면 그다음은 고삐를 늦추고 순수하게 기부 봉사자로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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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문수진 사진 박충열(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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