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귀농 10년차, 매일 산으로 출근합니다

기사 요약글

나이 오십에 광고회사 대표에서 산촌귀농으로 궤도를 튼 뒤, 10년간 깡산촌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는 김강중 씨. 26년차 광고인 생활을 접고,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자연으로 돌아간 그의 여정을 따라가봤다.

기사 내용

 

 

 

광고회사 대표에서 산촌 귀농인으로

 

 

김강중 씨(63)는 산으로 오기 전 도시에서 16년 동안 광고회사를 다녔다. 갈고닦은 실력으로 직접 광고회사를 차려 10년 동안 운영했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누구보다 먼저 읽어내고, 트렌드를 리드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 많은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 갔지만, 그럴수록 더 먼저 앞서가야 한다는 압박감도 컸다. 그래도 매일 숨 쉴 틈 없는 하루를 견디며, 최선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를 궁지로 내몬 것은 호흡이 짧은 트렌드 만큼이나 직업의 평균 수명이 짧다는 사실이었다.

“광고회사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얘기가 있었어요. 광고회사 출신들의 평균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그 당시 유행했던 말이 ‘백세 시대’였어요. 50대에 은퇴하면 지금껏 살아온 날만큼 더 살아야 한다는 뜻인데, 그럼 난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이 들었죠. 그래서 은퇴 후에 평생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계속 고민했습니다.”

김 씨는 건강한 삶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인생의 절반을 정신없이 살았으니, 나머지 절반은 건강을 챙기면서 좀 더 여유 있게 살고 싶은 바람이었다.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활동도 필수였다. 건강과 일,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했던 김 씨에게 필요한 건 ‘지속 가능한 삶’이었다.

“은퇴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제 마음을 쿵 두드린 문장이 있었어요. ‘우리는 일을 멈추는 순간부터 급속하게 노화가 시작된다’고, 세계적으로 저명한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가 한 말이었죠. 뒤집어 말하면 일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의미예요. 저 또한 건강하게 사는 게 먼저였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결국 산에서 그 답을 찾았어요. 세상은 빠르게 변해도 산은 오랫동안 변함없잖아요. 언제나 한결같은 산속에서, 산이 주는 작물들을 캐면서 살아가고 싶었죠.”

 

 

 

 

현장 답사 2년 만에 찾은 강원도 산골 마을

 

 

산촌으로 가기로 결심한 뒤, 김 씨는 광고인 출신답게 현지 조사부터 시작했다. 전국 팔도를 다 조사할 수 없었기에 몇 가지 원칙도 세웠다. 하나, 산과 관련된 일을 한다. 둘, 절대 산을 사지 않는다. 셋, 되도록 추운 지역을 택한다.

“일단 노동과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여하지 않아도 되는 산농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대신 자금이 없어 처음부터 산지를 매입하는 건 어렵기 때문에 산지를 빌리는 쪽으로 계획했어요. 그리고 기왕이면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서 자라 건강하고 생명력이 강한 작물들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실패할 확률이 낮으니까요.” 

이 기준에 따라 현장 답사만 꼬박 2년이 걸렸다. 양구, 영월, 평창, 태백, 홍천, 김천, 무주, 순천 등 수많은 곳을 답사했다. 각 지역마다 나름의 괜찮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지만 마음에 쏙 드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주어진 현실에 타협해야 하나 갈등하던 무렵, 뜻밖의 작은 인연으로 강원도 인제 소치마을에 오게 되었다.

“제가 다녔던 광고회사에 막내 카피라이터 한 명이 있었어요. 같이 오랜만에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는데, 그 친구의 형이 마침 소치마을 사무장으로 있으니 저한테 연락해보라며 연락처를 주더군요. 바로 그분한테 연락해서 산에 살면서 농사짓고 싶다고 얘기했더니, 그분은 귀농이 아니라 귀촌한 케이스라 특별히 도움 줄 게 없었어요. 그런데 마침 자기 뒷집에 제가 꿈꾸던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며 한 분을 소개해줬어요. 그분이 바로 지금의 제 멘토예요. 아주 작은 인연이 귀한 인연으로 이어진 거죠. 모든 인연이 소중하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는 경험이었습니다.”

 

 

 

 

귀농의 기본기는 머슴살이로

 

 

귀농할 지역이 정해졌겠다, 앞으로 귀농 생활에 도움을 줄 멘토도 생겼겠다, 2라운드로 가는 길이 탄탄대로인 듯싶었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있었다. 살 곳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빈집이 두 채 정도 있다는 멘토의 말에 무작정 와보니, 이미 계약이 되어 있거나 너무 오래 비어 있어 무너지기 직전의 집뿐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결심했던 터라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던 김 씨는 멘토의 집 앞에 있는 컨테이너를 개조해 간이주택 삼아 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너무 척박하게 시작하는 거 아니냐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김 씨는 자신의 인생에서 꼽을 만큼 잘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당연히 임시 거주공간이라 편하게 살 수는 없었죠. 그런데 무작정 살아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일단 남의 집 방 한 칸이라도, 컨테이너 하나라도 얻어서 살면 기회가 생겨요. 도시에서 아무리 시골의 빈집을 찾아 봤자, 제대로 된 집이 안 나오거든요. 막상 빈집이라고 내놓은 집은 그야말로 집주인도 살기 애매해서 내놓은 집인 거예요. 진짜 살 만한 빈집은 마을 사람들만 알 수 있는 특급 정보인 거죠. 제가 지금 살고 있는 20평짜리 집도 마을 사람들이 추천해준 덕분에 얻은 집이에요. ‘괜찮은 집이 생기면 귀농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건 안일한 생각이에요. 조그마한 거처라도 생기면 일단 뚫고 들어가 마음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없는 집이 만들어집니다.”

이 마을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건 2010년 4월 2일. 삶터의 주소지를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긴 날이다. 주소지를 옮겼다고 해서 농촌의 삶 속으로 저절로 스며드는 건 아니었다. 

“제가 여기 와서 제일 잘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머슴살이’예요. 어감이 별로일 수 있는데, 저는 지속적이고 장기간에 걸친 실습을 ‘머슴살이’라고 표현합니다. 적어도 한 작목을 심고 키우고 거두는 모든 과정을 현지의 선배(멘토)와 함께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지요. 저는 석 달 넘게 멘토의 농장에서 같이 농사일하면서 농사의 기본기를 탄탄하게 쌓을 수 있었어요. 낫질하는 법, 호미 쓰는 법, 산에 밭을 만드는 법, 작물에 따라 씨를 뿌리는 법, 거름 주는 법 등을 익혔죠. 직접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자신감을 많이 얻었어요.”

 

 

 

 

마을 주민들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여는 힘, 식탁교제

 

 

농사에 자신감을 얻었지만, 연고 없는 낯선 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장애물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전기가 끊기거나, 수도가 고장 날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실, 그에게만 한없이 어렵고 낯선 일일뿐, 마을 사람들에겐 쉽고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걸 체득했다. 문제는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안타깝게도 외지에서 온 이방인인 그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닫혀 있는 마음의 문은 꽤나 견고했던 것.

“2주에 한 번씩 일요일 저녁마다 돼지고기 목살 1kg에 소주 두세 병을 샀어요. 그리고 월요일에 일이 끝날 때쯤 되면 멘토한테 말해요. 오늘 내 집에서 고기 구워 먹으면서 한잔하자고 말이죠. 대신 마을 사람 두세 분 정도 모시고 오라고 해요. 공짜면 양잿물도 먹는다고 하잖아요. 무료로 숯불에 고기 구워주고, 술 준다는데 안 올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웃음) 그런 식으로 마을 사람들과 ‘식탁교제’ 하는 거예요.”

배부르게 먹고 마시면서 얘기하다 보니 공감대도 형성되고, 심리적 거리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 그렇게 얼굴도 알고 말도 트니 다음 날부터 만나면 악수하고 인사하는 마을 주민이 생긴 것. 

“또 그렇게 인사하면 다른 사람이 누군데 인사하냐고 물어봐요. 제 존재감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거죠. 그렇게 해서 우리 집에서 식사한 사람만 4~50명 됩니다. 시골 사람들이 외지인을 초대하는 걸 어려워한다면, 반대로 제가 먼저 하면 되는 거예요. 고작 컨테이너라고 해도 말이죠.”

 

 

 

 

산촌에서 키운 신선한 식재료를 팔아 단골을 만들다

 

 

현재 김강중 씨는 매일 같이 700고지의 가파른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출퇴근한다. 소치마을 소재 임야를 2만여 평 임대해 산지에 조성한 밭에서 산양삼을 키우고, 산곰취를 재배하고 산마늘을 수확하고 있다. 산양삼은 고급 약재와 식재료로 많이 쓰이고, 산곰취와 산마늘은 이미 널리 알려진 신선한 식재료다. 수확량이 많진 않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아름아름 팔면서 수익을 창출하고 있고, 약초로 만든 담금술처럼 약초류를 가공해 판매한다. 온라인에 좀더 익숙한 도시인으로서 이웃 주민의 농작물을 온라인 사이트에서 대신 팔아주기도 한다.

“크게 장사할 생각이 없어서, 일단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상품을 제공하자는 생각뿐이었어요. 광고업에서 일하면서 쌓아온 인맥이 있어서 제 농작물이 필요한 고객을 구하는 건 수월했죠. 주위 사람들부터가 제 상품이 좋다며 매년 주문해 주고, 또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면서 단골이 하나둘씩 늘어났어요. 입소문이 판로 역할을 톡톡히 해냈죠. 그런데 제 농작물뿐 아니라 이웃들의 농작물도 팔아주고 있다 보니, 주위 사람들만으로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부터 판로를 확장하려고 전자상거래 플랫폼 ‘카페24’에 사업자 등록도 했어요.”

 

 

 

 

김 씨가 재배하는 농작물에는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친환경 농업을 고집해서 키운 작물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인 농사도 어렵지만, 친환경 농업은 더욱더 어려운 농사에 속한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아 벌레에게 농작물을 뺏기기 십상이고, 결국 상품 가치가 있는 작물의 수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 손해가 고스란히 자신의 몫임에도 친환경 농업을 해야 한다는 신념 하나만큼은 10년째 지켜나가고 있다.

“제가 이곳에 건강해지려고 왔는데, 그런 사람이 돈을 더 벌려고 화학비료를 쓰고, 농약을 뿌리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친환경 농업이 쉽지는 않아요. 1m2당 산곰취가 1kg 생산된다고 하면 저는 농약을 안 뿌리니까 생산량이 절반밖에 안 돼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남들이 산곰취를 1kg에 1만5천원에 팔 때, 저는 2만원에 팔고 싶어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도 똑같이 1만5천원에 팔고 있어요. 대신 다른 방법으로 저의 가치를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인생2막 산촌귀농 어때요>라는 책을 냈고, <산촌티비>라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그의 가치관이 담긴 글이나 영상을 통해 사람들이 김강중의 이미지를 높게 평가해 준다면, 그가 키우고 재배한 농작물도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는 물질적 성공 대신, 삶의 성장에 주목

 

 

그는 모든 게 낯설고 생소했던 산촌에서 자신이 이루고, 써내려가는 기록들이 즐겁기만 하다. <나는 자연인이다>가 중년들의 최애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다들 산촌에 대한 로망이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로망만으로는 산촌 생활을 헤쳐나갈 수 없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불편함에 대해 배우고 적응해야 하기 때문. 산촌귀농 10년차 김강중 씨도 지금까지 이룬 성과를 스스로 해낸 일이라기보다, 산이 주는 혜택이었다고 표현한다. 옛사람들이 농사는 노동이 아니라 몸에 밴 습관이라고 말한 것처럼, 김 씨는 지금도 자신의 몸에 농사 습관을 하나씩 축적해 나갈 뿐이라고 말한다.

“인생의 중요한 교차로에는 유감스럽게도 신호등과 표지판이 없다고 합니다. 산촌귀농에도 역시 왕도가 없고 성공 매뉴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먼저 걸어간 선배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지요. 산촌귀농에 관심이 있다면, 누군가의 성공기가 아닌 성장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배들조차도 지금 성장하기 위해 하루하루 배우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기획 우성민 사진 이준형(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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