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여성 정년 1호가 말하는 “뜨겁지 않아도 괜찮아”

기사 요약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라는 슬로건이 지배적일 때 남들보다 조금 낮은 온도로 일상을 즐기며 살아온 변춘애 씨. 그녀의 인생 조언을 듣다 보면 세대를 아우르는 위로가 느껴진다.

기사 내용

 

 

이직이 활발한 요즘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테지만 과거에는 한 직장에서 정년 퇴직을 한다는 건 능력을 인정받은 것과 동시에 성실함에 주어지는 상장과도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CBS에 입사해 4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킨 변춘애 씨 역시 그렇게 주어진 상장을 들고 여성 정년 1호로 퇴직한 인물이다.

 

퇴직하는 날까지 방송을 하며 종횡무진하던 그녀는 외향적인 성격 그대로 퇴직 후의 삶을 온갖 유쾌한 것들로 채우고 있다. 취미로는 시 쓰기, 쇼핑 하기, 블로그 하기, 노래교실 다니기 등이 있고, 운동은 걷기부터 라인댄스, 수영 등 다채롭기 그지 없다. 최근에는 그녀의 이름을 단 <우먼 그레이>라는 책도 냈다. 

 

 

미지근한 온도라 더욱 즐거운 삶

 

 

무엇을 하든 매사 부지런히, 열정적으로 몰두할 것 같은 그녀는 의외로 뜨겁지 않아서 오래, 즐겁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으레 겪는다는 퇴직 이후의 공허함이나 우울한 감정이 찾아오지 않는 이유도 즐거울 만큼만 달아오르는 ‘뜨뜻미지근한’ 삶의 가치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어떻게 한 직장에 그렇게 오래 다닐 수 있었냐, 비결이 뭐냐고 묻는데 뭐랄까요, 일 자체가 보람 있고 재미있었던 이유도 있지만 누구나 그렇듯 저도 늘 회사를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살았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고요.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정년까지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열심히 해야 해’보다는 순리대로 흘러가는 흐름에 저를 맡긴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 즐거울 만큼만 일하고 즐겼거든요.”

 

정년까지 일을 했지만 출세하지는 못했고, 따르는 후배는 많았지만 리더는 아니었다. 힘든 상황이나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피했기 때문에 이기적이지만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는 그녀는 의외로 낮은 자존감을 긍정으로 소화한 케이스다. 

 

“보수적인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열등감 덩어리였어요.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두 타입으로 나뉘는데, 열등감을 꽁꽁 감추는 타입이 있고, 반대로 확 내던지면서 자신을 방어하는 타입이 있어요. 전 후자였죠. 그래서 승진하지 못하거나 만족할만한 결과를 받지 못했을 때 ‘열심히 했으면 됐지’ ‘내가 좀 부족했나보네’라고 생각했어요.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발동한 방어기제가 결국 지나간 일에 미련 두지 않고 현재에 충실한 긍정기제로 승화한 셈이죠.”

 

<우먼그레이> 추천사를 써 준 후배이자 CBS앵커인 김현정과 연극배우 손숙

 

 

친한 동네 언니가 된 비결

 

 

현재를 마음껏 즐기는 삶의 철학 덕분인지 그녀에게는 퇴직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맞이한 것 중 하나였다. 회사와 집을 오가던 일상을 다른 것들로 채울 거라는 기대가 더 컸다. 게다가 퇴직자들이 인간 관계에서 겪는 회의감도 들지 않아 더욱 하루를 즐겁게 채울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달라요. 나이 들수록 남자들이 자신의 약점까지 다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연다면 여자들은 친해지면 마음을 열어요. 이를 테면 여자들은 앞집 아줌마와 쉽게 언니, 동생하며 지낼 수 있지만 남자들은 앞집 남자랑 쉽게 형, 동생 하지 못하죠. 그래서 남자들에게 옛날 친구가 중요한 것이고, 퇴직 후에는 새로운 관계 맺기가 쉽지 않으니 외로워지는 거예요.”

 

그녀는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다. 어린 시절부터 열등감 덕분에 관계 맺기가 쉽지 않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성격 탓에 관계에 치였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성격유형검사인 MBTI와 애니어그램 등에 몰두하는 시간도 있었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을 상처주기보다는 서로 상처주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이렇게 쌓인 시간들과 현재를 즐기는 철학이 만나니 별명도 ‘말 직설적으로 하는 센 언니’에서 ‘친한 언니’로 바뀌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말에 대해서는 조심하는 편이에요. 예전에 서울시민프로젝트 중 하나인 맘 프로젝트 ‘엄마가 필요해’ 1기로 참여한 적이 있어요. 나와 타인을 알아가면서 마음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인데, 말하는 시간을 조절하는 규칙이 있었어요. 상대방을 먼저 판단해 조언이나 충고를 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였죠. 단, “화를 참지 그랬어요”라고 하는 대신 “왜 화를 참으셨어요?”라고 물을 수 있어요. 그렇게 말을 하다 보니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고, 덩달아 저도 존중 받게 되더라고요. 그게 좋아서 노력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 후배들을 보니 다들 정말 열심히 살고 있는 거예요. 젊을 때 열심히 사는게 당연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면면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경외롭고 존경스럽지 않은 점이 없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존중할 수 밖에 없었지요. ”

 

 

 

모든 세대가 함께 걸어가는 시대

 

 

그녀는 장벽이 없어지는 시대라는 걸 점점 체감하고 있다. 방송만 하더라도 이제 특정한 채널이 독점하는 게 아닌 1인 방송의 시대로 넘어 갔고, 문학부터 예술까지 모든 경계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고. 이런 경계에서 기성 세대의 가치관 또한 달라져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과거에는 노인들의 노하우를 후대에 물려주며 시대가 발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최신 정보에 훨씬 익숙하고 습득이 빨라요. 그렇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의 지혜를 얻어서 발전하는 시대라기보다는 함께 어울리며 발전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시대가 아닌가 싶어요.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보다 발전해야 시대 또한 발전하는 게 아닐까요?” 

 

그녀는 부지런해야 한다는 강박을 넣어두고 규칙이 있는 삶에 무게를 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틀에 맞추는 규칙이 아닌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라는 의미다. 

 

“부지런하면 좋겠지만 부지런한 삶만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죠. 그보다 삶에 규칙성을 주면 좀더 건강하게 살 수 있어요. 저 역시 퇴직 후 ‘아카데미나 운동을 등록하면 빼놓지 않고 매일 밥을 먹듯 참석하자’ 같은 별로 어렵지 않은 규칙을 세웠어요. ‘밥 먹듯이 하자’가 제 생활 규칙이에요. 굳이 열정을 가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생각만 바꾸면 훨씬 더 여유롭고 관대하게 살 수 있어요. 저는 뜨겁지 않다고 열정이 없는 것이 아니고, 게으르다고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제 살아온 세월이 그 증거니까요.”

 

 

기획 서희라 사진 박충렬(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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