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내용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내가 의도한 방향인가? 아니면 시간의 흐림을 감지하지 못하고, 시간에 휩쓸려 알지 못하는 장소로 흘러가고 있는가? 어제의 나에서 내일의 나로 변화시키는 힘은, 내가 오늘 아침에 결정한 결심과 그것을 이루려는 연습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사방을 인식하면서, 내일을 위한 오늘의 훈련에 집중하기 보다는, 나와는 상관없이 외부에 쉽게 눈길을 뺏기기 마련이다. 눈은 언제가 감기보다는 주위의 자극에 반응하고 싶어 안달하고 시선으로 만족할 대상을 찾는다.
오감은 수동적이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감각기다. 하루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외부의 유혹으로 가득차 있다. 이것들이 반응하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아니 한 달, 일 년이 벌써 저만큼 지나가 버렸다. 2019년 1월, 나는 인생의 위기이기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것은 신의 시험이었다. 내가 온전한 자유를 스스로 누릴 수 있는가를 묻었다. 그것은 신의 선물膳物이었다. 이 선물은 나에게 24시간 전부를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외부스케줄이 없는 하루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는 누군가에 고용이 되어, 그 그들이 요구하는 책임시간을 메꿔야했다. 그 노동이 내가 가려는 길을 방해하거나 막아선다면, 그것은 나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지 소명은 아니었다.
나는 8년 전에 시골로 이사와, 자연의 섭리를 관찰하고 몸에 익히는 수련을 해왔다. 점점 내가 간절히 원하는 소명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하였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겨하던 나의 성향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내가 남을 인생 무엇을 해야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작년 12월 생면무지의 어떤 사람들이 나에 관한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다. 그것을 기반으로 특종기사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서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소명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42.195km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완주하는데, 사회가 부여한 명칭을, 군더더기가 되었다. 간소한 운동복을 착용하고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조금씩 달리기 시작하였다. 올해 1월부터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다.
나는 하루라는 24시간을 ‘수련장’으로 여겼다. 시간을 포착하여 장소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완주를 위한 훈련을 시작하였다. 나는 ‘구별된 나’를 찾기 위해 24시간을 온전히 헌신하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 짧은 인생에서 2019년만큼 값진 시간은 없었다. 이 시간은 집행유예기간과 같은 정지된 시간과 같다. 그러나 내가 의도적으로 손과 발을 인생이란 출발선에 대고 총성을 듣는 시간이 되었다. 나의 탐색대상은, 나의 오감은 오로지 나의 내면을 향했다. 나도 알지 못하는 내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탐구하여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평상시 그저 생각하던 습관을 바꿔, 두 번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미래의 나의 모습에서 관조하기 시작하였다.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니, 그곳엔 이전에 올라가 본적이 없는,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은 마음의 정상이 있었다. 이제는 그 정상에서 저 밑에서 움직이는 나를 바라보고, 내가 해야 할 일을 결정한다. 나는 이전에 내려가 본적이 없는, 대서양 바다보다 더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 보았다. 그곳에서 이전 그 존재조차 몰랐던 침묵하는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이제 매일 매일 어제의 나를 구성했던 생각을 유기하고, 새로운 생각으로 조금씩 무장할 수 있었다.
그런 일과가 지난 9월부터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그전에는 일주일에 한번, 잠시 서울에 가서 일들을 처리했다. 그러나 9월부턴 일주일에 세 번 서울에 가야했다. 설악 IC를 나와 경춘 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를 통해 서울로 나들이를 감행해야했다. 과거의 분주함이 나를 장악하였다. 북한강과 설악산 지류 밑에서 유유자적하던 나에게 이 스케줄은 도전이었다. 내가 1월에 결심했던 구별된 삶을 실제로 실천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 스케줄을 이제야 마쳤다. 오늘 아침, 다시 공부방에 좌정하여 나를 애타게 기다려준 앞산을 바라본다. 분주한 삶은, 나를 분산시켰다. 내가 가야할 목적지를 희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내가 매일 훈련시켜야할 정신과 영혼이 힘을 잃어 하루를 급하게 시작하고 피곤하게 마무리하기 일쑤였다.
나는 내 행복과 불행을 초래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의 행복을 만들어내고 실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다. 동시에 나는 나의 불행을 야기하는 유일한 범인이다. 행복과 불행은 외부에 의해 나에게 우연히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내 생각과 행동이 만들어낸 정확한 산술적인 표현이다. 이것들의 원인은 신의 장난이나 혹은 외부 환경의 변덕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내 생각이 만든 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내 행위가 가져다는 주는 결과다. 내 정성이 담긴 마음의 태도가 행위이며, 행복과 불행은 이 행위에 대한 반응들이다. 행복과 불행을 야기하는 행위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바로 잡아야한다. 인간은 행위의 결과인 행복과 불행을 막을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행위를 결정하는 원인인 생각을 훈련시키는 노력이다. 생각을 훈련하는 것은, 본성을 개조하는 일이며, 개성을 주조하는 작업이다. 어제의 자신을 정복하고 초월하는 가운데, 힘이 생기고 자신을 변화시키는데 환희가 생긴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으로 개성과 운명이 결정한다. 생각은 학년과 같다. 자신이 속한 학년만큼만 안다. 만일 그가 초등학생이라면, 초등학생으로서 알아야할 지식을 알고 중등학생이면 그 지식이 넓어져 더 알게 된다. 초등학생에게 중학교 수학문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다. 초등학생은 지속적인 노력과 인내를 통해, 마침내 중학교 수학문제를 풀게 된다. 고등학생에게 중학생 시험문제에는 쉽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도, 생각훈련을 통하지 않는 자는 초등학생과 같다. 이기심, 욕심, 그리고 열망으로 가득한 사람은, 높은 차원의 사고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그 해답을 찾지 못해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의 크기만큼, 위대하던지 시시하다. 그것에 비례하여, 그는 숭고하던지 비열하다. 생각의 범위가 그의 운명이고 개성이다. 나는 하루를 내가 가려는 목적지를 위해 사용하는가? 나는 내념의 세계로 내려가, 생각을 깊고 넓고 그리고 높게 확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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