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세상 나들이 그 열한 번째 이야기 - 정선 5일장으로 떠난 어르신 세상나들이
2012.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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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한 어르신은 85세의 송모 할머니로, 경기도 광주시에서 홀로 거주하신 분이셨다. 저수지를 바로보고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조그만 집은 초라해보였지만, 그래도 운치가 느껴졌다. 뒤로는 642미터에 달하는 태화산이 버티고 있고, 앞으로는 저수지와 함께 300미터 쯤 보이는 태화산 자락에서 풍겨나는 가을 정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10월 27일 토요일 아침 8시 30분경. 이미 도착 시간이 30분이나 지났다. 늦 가을철 토요일이고 거기에 비까지 내렸으니 길은 당연히 막혔고 첫 대면은 그렇게 미안함을 가진 채로 시작됐다. “가을 구경하려면 다른 데 갈 필요 없지, 이곳만한 데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런데 나이가 드니 시골 장터가 보고 싶어서 말이야. TV에서 본 정선5일장을 꼭 가고 싶었는데 오늘 그 꿈을 이룰 수 있겠네.”
어르신의 겉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이미지는 가난이나 고생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참한 모습이었고, 어딘가 기품이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속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20세 초반에 월남하셔서 오래전 남편과 사별하셨고, 20년 넘게 광주시에서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셨단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 오시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글쎄요. 생각이 나지 않아요. 고생했던 기억밖에 남지 않아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즐거웠던 기억은 없네요.” 그 동안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고 팍팍했을까를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졌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냐는 질문에는 “뜨개질을 하고, 매일 태화산 중턱까지 오르고, 가끔씩 책도 보고. 참 라이나생명이라고 했지요. 요즘엔 탤런트 김지호 대신 김석훈으로 광고 모델이 바뀌었데요.” 탤런트 이순재 씨가 아니라 김지호, 김석훈 씨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어르신은 ‘신세대’였다.
광주시에서 출발한지 4시간 30분이 지나서야 겨우 정선5일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까지 내려 정선5일장은 시골장터에서 보는 그런 5일장(5일 마다 들어서는 장)이 아니었다. 그냥 도회지의 일반 시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관광객으로 넘쳐 점심 먹기도 쉽지 않았다. 30분 넘게 기다려서 겨우 곤드레비빔밥과 메밀전병 등을 먹을 수 있었다. 어르신은 5일장에서 곤드레나물, 수수부꾸미, 메밀전병 등을 사셨다. 그러나 정작 사고 싶었던 메주콩과 팥을 살 수 없었다. 보름정도 더 지나야 올해 나온 메주콩과 팥이 시장에 나온다는 상인의 얘기였다.
펑튀기 소리와 냄새,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 그리고 여름철 땡볕에 그을릴 대로 그을린 피부에 주름진 시골 어르신들의 모습 등은 정선5일장에 없었다. 강원도 구수한 사투리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고 대신 서울말만 요란하게 들렸다.
정선5일장에 대한 추억은 상상속에서만 피어났을 뿐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어르신은 물론이고, 어르신 소원 들어주기에 함께 나선 제 집 사람과 딸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르신 소원 들어주기 여행은 아쉬움을 남긴 채 이렇게 끝났다. 왕복 8시간가량 차를 타면서 고생했을 어르신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셨고 우리에게 감사함을 표시했다.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괜히 고생만 시킨 꼴이 돼 미안할 따름이네.”
(글 이제경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