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너머 힘찬 목소리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1929년 생이신 여든 넷의 한석X 어르신께서는 생각보다 정정하셨다. 틀니를 쓰시지만 식사도 잘 드셨고, 이 연세에 눈과 귀가 이렇게 밝은 분을 뵐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우리는 일제 식민지, 6.25 한국 전쟁을 겪으시고도 50년을 넘게 살아오신 그 분의 인생살이를 듣는 기회가 있었다. 전쟁 폐허가 된 대한민국과 그 속의 서울이 지금의 모습을 갖기까지 얼마나 놀라운 변화와 발전을 하게 되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선배 분들이 생사를 넘나 들며 살아오신 그 삶의 무게 덕에 내가 이렇게 감사한 땅에서 수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고 있구나’ 하는 감동이 저절로 가슴을 맴돌았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에서 일 할 기회가 있어 마릴린 먼로, 아이젠하워 등을 직접 봤다는 이야기, 손목에 차고 계신 50년 넘은 세이코 시계를 보여주시며 먼저 간 셋째 아들의 약혼 기념 시계였다는 이야기, 한 때 서울에 작은 빌딩도 가지고 계셨다는 이야기 등을 하시며 젊을 때는 부도 있었고, 인생 운도 있었다며 살짝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도 보이셨다. 그런데, 술로 얻은 병 때문에 많은 재산을 잃으시고, 이미 환갑을 넘나드는 자식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또 많은 것을 잃으셨다 말씀하셨다. 지금은 이렇게 독거 어르신으로 지원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하실 때는 인생은 마라톤이고, 새옹지마이며, 일희일비 할 것도 아니라고 가르침을 주시는 것 같았다.
어르신은 바다 이쪽 저쪽으로 시선을 던지실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셨다. 또, 횟집에 들러 식사를 하시면서 친구 할아버지들께 자랑하고 싶어 이런 저런 준비하시는 모습에서도 즐거움이 엿보였다. 바다를 보고 싶고, 1년 넘게 드셔보지 못한 회를 맛보고 싶으시다는 어르신의 작은 소망을 이뤄드리는 기회에 참여한 것에 대해 다시 한번 뿌듯한 마음을 갖게 됐다. 서울 주변의 날씨가 험했던 것과 달리, 강릉의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푸르고 높아 이 또한 한석X 어르신 나들이에 대한 하늘의 보살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정을 마쳐 헤어질 즈음에 방문한 어르신 댁은 깔끔했지만, 한기가 확 돌았다. 아직은 보일러 쓰기 아까워 찬물로 씻으신다는 어르신. 꽤나 급하게 찾아와 예년보다 더 춥게 느껴지는 이 동절기를 부디 건강하게 잘 보내시기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