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만 있는 화병 편

기사 요약글

기사 내용

Q. 아버지, 할머니에게 서운한 일을 참고 참다가 마음의 응어리가 생긴 어머니, 괜찮을까요?

어머니는 따뜻한 성격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밑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중매로 아버지와 결혼하셨어요. 결혼 후 할머니의 이기적인 성격 탓에 갈등이 있었고, 당시 아버지는 두 분을 화해시키기 힘들다고 여겨 분가를 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일도 잘 풀리고 자식들도 큰 걱정 없이 잘 컸습니다. 단지 다들 일에 바빠서 어머니가 서운함과 거리감을 조금은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다시 할머니와 합가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두 분의 계속된 고부 갈등에 아버지는 수수방관했고, 결국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 흔히 말하는 ‘화병’ 증상에 고혈압까지 나타났습니다. 몸에 점점 이상이 생기는 게 가족들 눈에도 보이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괜찮다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의 ‘화병’ 고칠 방법이 있을까요?

 

A. 화병도 병이다

화병은 울화와 분노, 억울함과 원망, 서운함과 배신감 같은 부정적 감정을 오랫동안 마음속에 눌러놓고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 생기는 정신과 질환이다. ‘가슴에서 불이 난다. 무언가 속에서 꽉 막고 있는 것 같고, 불덩이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른다는 증상을 주로 호소한다. 용하다고 소문난 의사를 찾아 진찰을 받아도 원인이 될 만한 질병은 없다고 하니, 나중에는 답답함만 더 커진다.

그러다 정신과 의사를 만나 ‘화병’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내가 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느냐”며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의사가 자세히 설명도 하고, 가족이 설득해도 “나는 속이 안 좋은 거지, 정신은 멀쩡하다”며 치료를 거부하기도 한다. ‘의사가 오진한 것 아닌가? 숨겨진 암이라도 있는 것 아닌가?’ 하며 오히려 더 의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화병은 우리나라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문화 관련 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 중 하나이다.

정신의학적으로는 신체 증상을 동반한 우울 장애의 범주에 속하는 질환으로 우울감, 식욕 저하, 불면증 같은 우울증상에 호흡곤란이나 가슴 두근거림, 몸 전체의 통증, 명치에 뭔가 걸려 있는 듯한 신체 증상이 함께 나타난다. 억눌린 감정이나 무의식적 갈등이 신체 증상으로 변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화병은 악화와 완화를 반복하며 장기간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정신과에서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나중에는 치료가 더 어려워진다.

 

올바른 화병의 진단법

화병의 핵심은 감정 억제다. 자기감정을 인정하지 않거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화병의 원인이다. 오랫동안 감정을 억압하고 살아서 그것을 언어로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부정적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기도 한다. “괜히 화난다고 해봐야, 남편하고 싸움만 더 하게 된다. 시어머니는 오히려 더 화낼 거다”라고 하면서 말이다.

즉, 화병이 우리나라 중년(또는 노년) 여성에게서 흔한 것은 감정 표현을 절제하고 참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던 전통적인 문화의 영향 때문이다. 남편이나 시댁과 갈등을 겪어도 “내가 참고 견뎌내야만 한다”고 여기거나 “나 하나 참으면 우리 가족이 다 평화로울 수 있다”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믿고 살다 보면, 이것이 화병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두 팔로 공을 물속으로 꾹꾹 쑤셔넣다가 어느 순간 힘이 빠지면 툭 하고 공이 물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화병이 생긴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의< 도시(The City)> 라는 작품을 보자. 스웨덴의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였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이 작품은 거친 먹구름 아래로 작지만 밝게 빛나는 작가의 고향, 스톡홀름을 묘사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스톡홀름이라는 도시보다 먹구름과 거친 파도가 화면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어둡게 칠해져서 곧 폭풍우가 몰아칠 것만 같다.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으로 반짝이는 도시가 보이지만, 화면 전체는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화병이라는 감정 상태는< 도시> 에 그려진 풍경과 다르지 않다.

그의 작품에는 생전에 정신과 질환을 앓았던 작가의 내면적 심리와 내성적인 성격이 녹아 있다고 해석하곤 하는데, 화병 환자가 자기감정을 꾹꾹 억눌러놓고 있는 것처럼 도시의 불빛은 구름과 파도에 둘러싸여서 저 멀리 숨겨진 것처럼 보인다.

 

+ 처방전 < 태양(The Sun)>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도 생전에 우울과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의 작품 < 절규> 는 그런 감정 세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 < 태양> 은 상반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태양을 중심으로 강렬한 빛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세상을 향해 뿜어져 나아가는 듯하다.

화병의 치료는 이 그림이 가져다주는 느낌을 그대로 따르면 된다. 울화와 서운함, 배신감, 억울함 같은 부정적 감정을 억누르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하며 말로 감정을 풀어내야 한다.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다면 간접적인 방식도 괜찮다. 목청껏 소리 내어 노래를 불러도 좋다. 땀이 흠뻑 흐를 정도로 운동을 해도 좋고. “그렇게 해봐야 무슨 소용이냐? 괜히 말해서 집안 시끄러워진다. 그냥 내가 참고 사는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면 마음의 병이 몸의 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혈압도 높아지고, 당뇨가 악화되기도 하고, 통증은 더 심해진다.

의지로 이겨내겠다고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화병이란 증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더 이상 의지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들도 “의지로 이겨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당신 성격 탓이다”라고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된다. 어머니가 오랜 시간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것을 말로 인정하고 “어머니 덕분에 우리 가족이 지금까지 행복할 수 있었다”라고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