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조언 - 위로 편

기사 요약글

해야 할, 하지 말아야 할 조언과 위로를 모아봤다.

기사 내용

해야 할 것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01. 내가 당신을 위로하고 싶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하지 마라


울음은 감정을 해소하는 가장 편리하고 빠른 방법이다. 울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금방 다른 일에 주의를 돌리게 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정말 위로하고 싶다면 대부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큰 위로다. 물론 그냥 ‘될 대로 되겠지.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상대를 방치하라는 게 아니다. 위로가 필요한 이가 그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주라는 말이다. 그 상황을 회피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누군가가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설 힘을 얻게 된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02. 어찌할 바를 모를 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말하라


위로를 한답시고 하고 싶지 않은 말들을 하게 만드는 건 또 다른 폭력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갑작스러운 사고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런 질문은 단지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고통을 상기시킬 뿐이다. 장황한 위로의 말은 필요 없다. 그저 간결하게 말하면 된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괜히 위로를 한다고 시답잖은 농담이나 신변잡기를 늘어놓을 바에는 차라리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정답이다.

 

맞아 네가 당한 일이 억울할 수 있어

 

03. 절대적인 ‘내 편’이라는 걸 알려줘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감정을 표현할 때 받아주고 인정해줘라. 설령 당신이 상대방과 다른 생각을 하거나 혹은 이 상황이 잘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게 ‘위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내가 너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 거짓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내가 당신을 잊지 않고 있다는 의미의 문자, 카톡, 안부 전화처럼 사소한 부분에서 신경을 써줘야 한다. 짧은 시간에 많이 하라는 게 아니다. 그저 평소처럼 꾸준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게, 그도 나도 편하다.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겪고 있을지 상상 밖에는 할 수가 없다.

 

04. 그가 겪은 일과 비슷한 불행을 겪어본 적이 없다면 그저 그렇다고 시인하라


간혹 지금 상황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공감을 하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은지 강렬하게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자신이 느끼고, 또 느꼈던 상실감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특히 그와 비슷한 아픔을 겪었을 때,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금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상대방이지 당신이 아니다. 즉, 상대가 위로를 받아야 할 시기이지, 위로를 줘야 할 시기가 아니다. 설령 그와 비슷한 아픔이 있다 해도, 그 마음이 이해된다는 말과 함께 짤막하게 이야기하는 걸로 충분하다.

 

 

 

하지 말아야 할 것
 

01. 부정적인 감정 자체를 회피하는 태도


퇴직한 뒤 만난 친구가 나의 퇴직 소식을 들었다면서 황급히 대화 주제를 바꾼다면? 사람들은 종종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그 상황을 피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는 ‘공감’하고 있다고 하지만, 태도나 행동으로 거부 의사를 보일 수 있다. 이럴 때 위로를 받는 사람은 어떤 메시지를 믿어야 할지 혼란을 겪는다. 즉, 입으로는 걱정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그 상황을 자신이 ‘불편하게’ 느낀다면, 위로의 말을 듣는 당사자도 그 불편함을 같이 느낀다. 결국 위로받는 당사자는 ‘정상적인 것처럼 행동’해주길 강요받는다고 느끼게 된다.

 

02. ‘설교 같고, 주제 넘을 뿐 아니라 감정이 담기지 않은’ 상투적인 위로


지금 그가 어떤 심정인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 그 슬픔을 경험해본 적도 없으면서 모든 게 잘될 거라 위로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그저 공허한 말일 뿐이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늘어놓는 막연한 위로를 듣느니 차라리 자기 계발 서적을 정독하는 게 나을 수 있다. 마흔 살까지 장가를 못 간 노총각 아들을 둔 친구에게 “괜찮아. 짚신도 짝이 있으니까”라는 위로는 그저 공허한 외침에 불가하다. 위로에도 ‘근거’가 필요하고, 위로하는 사람 스스로도 공감할 정도의 진심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03. 부탁하지도 않은 충고


우리는 ‘해결하고 고쳐야만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신기하게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다 자신이 위로받을 사람이 겪은 사건의 ‘전문가’이거나 그와 비슷한 사례를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충고를 하기 전에 잘 생각해보자. 지금 이 상황에 맞는 충고인지, 그리고 주변에 나 말고도 ‘진짜’ 충고를 해줄 사람은 없는지를 말이다. 여러 충고가 겹치면 결국 ‘누구의 조언을 따라야 할까’라는 새로운 고민거리만 추가된다. 그리고 혹시나 그들이 자신의 조언을 따르겠다고 하지 않아도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개인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04. ‘그래도’로 시작되는 과소평가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뒤 한 친구가 “지금 많이 슬프지? 그래도 난 지금 네 감정이 어떤지 알 것 같아. 내 고양이도 최근에 죽었거든”이라고 말했다.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멋진 ‘위로’ 아닌가? 혹은 유산을 한 사람에게 “괜찮아. 그래도 아이는 또 가질 수 있으니까”라고 한다면? 아무리 위로에 ‘이성적인 근거’가 필요하고, 내 손에 박힌 ‘가시’가 네 ‘심장병’보다 아프게 느껴져도, 개인의 슬픔을 다른 사람이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위로가 아니라 슬픔에 빠진 사람에 대한 모독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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