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재취업 - 재취업 성공기 편

기사 요약글

여기, 나이 50~60이 넘어 다시 걸음마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사 내용

새로운 업무,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그들은 다시 ‘신입’이 되었죠. 완생을 향해 가는 서툰 미생들의 이야기. 그 아름다운 고군분투를 소개합니다.

 

 

선생님에서
학교
지킴이가 된
한상배 씨

 

한상배


내가 다시 학교로 돌아간 까닭


삼성동의 한 중학교 교무실에서 만난 한상배 씨.
오가는 학생들마다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그는 이 학교 ‘배움터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배움터지킴이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전국 초중고등학교 배치된 인력을 뜻한다. 2년 전 이맘때까지만 해도 그는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일반사회’를 가르치던 교사였다. 수능 문제 출제에 참여하는 등 누구보다 성심껏 교육에 힘을 쏟았지만, 정년퇴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퇴직 전 3개월간 학교에서 휴가를 줬어요. 처음 한두 달은 친구도 만나고 여행도 다니느라 신났는데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제2의 인생’이 늘 막연하게 느껴졌는데 뭔가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그는 조경관리사, 공조냉동기계기사(에어컨 등 냉동기 및 공조 설비를 다루는 직업) 같은 자격증 취득에 관심을 보였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번번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답답한 날들이 이어지던 중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배움터지킴이’였다.


“인도 여행을 갔다 달라이라마가 쓴 시를 보게 됐어요. ‘타인에게 행복을 주면 스스로도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목표를 발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참 와 닿더라고요. ‘난 누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바로 학생들이었어요. 사실 교사였던 사람이 지킴이 신분으로 다시 학교생활을 한다는 게 쉽진 않은데 그때 문득 ‘죽은 지주목도 살아 있는 나무를 돕는다’는 내용의 이해인 수녀님 시가 생각나더라고요. 하물며 죽은 나무도 그렇게 값진 일을 하는데, 살아 있는 인간이 이러저러한 핑계로 남을 못 돕겠다는 건 좀 비겁하지 않나 싶었어요.”


결심은 섰지만 배움터지킴이가 되기란 의외로 쉽지 않았다. 일당 4만원, 연봉 880만원(연간 220일 근무 기준)을 받는 일이지만 경쟁률이 20대1까지 치솟았다. 이력서의 빈칸을 바라보며 막막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히말라야를 올랐을 만큼 튼튼한 체력, 청소년 상담 연수 경험, 생활지도부 교사로 활동했던 경험 등을 적어 공교롭게도 퇴임식이 있던 날 면접까지 봤다. 3대1의 최종 경쟁을 뚫고 당당히 배움터지킴이가 되자 그는“이제 점심 먹을 곳이 생겼다”며 기뻐했다.

 

 

배움터지킴이 선생님


마음 비우기


8시에 출근해서 4시에 퇴근할 때까지 그는 학교를 킨다. 학생들의 등하굣길을 살피는 한편, 복도나 화장실을 돌며 아이들 간 다툼이나 위험한 시설물은 없는지 확인한다. 원칙적인 업무는 ‘학교의 안전 지키기’지만 그는 지각생 명단을 엑셀로 정리해 각 반 교사들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학교 곳곳을 돌며 쓰레기를 줍거나 무성한 나뭇가지를 쳐내는 일도 기꺼이 도맡아 한다. 어느 곳에서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는 마음가짐은 나이가 들어도 변함이 없다고. 한편 이제는 한발 물러난 선배의 입장이라 조심해야 하는 부분들도 있다.


“아무래도 일반 교사들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죠. 원로 교사 대우 차원에서 교장 선생님이 학교 문제에 대해 상의할 수도 있는데 다른 교사들 보기엔 좀 껄끄러울 수 있거든요. 한 번은 친구랑 싸운 학생이 교무실에 붙들려 왔기에 방에 데리고 들어가 살살 타이른 적이 있는데 학교 상담 선생님이 나중에 그 일을 알고 섭섭해하더라고요. 본의 아니게 남의 업무에 참견한 상황이 되어 참 미안했어요.”


그렇게 교사와 배움터지킴이의 업무는 비슷한 듯 또 달랐고 적응해가야 할 부분이 많았다. 이 점을 우려한 가족들도 처음에는 가장의 선택을 반대했다고. 그러나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이 일에 뛰어들었을 때 저는 이미 교사로서의 마음은 내려놨어요. 그 대신 다른 만족을 찾았죠. 현직에 있을 땐 수업 준비하느라 학생들에게 소홀한 면이 없지 않았는데 지금은 공부보단 아이들 개개인에게 관심이 가요. 요리사가 되겠다는 아이에게 ‘어이 박 셰프’ 하고 불러주고, 아이들 얼굴을 마주치며 자꾸 이름을 외우는 일이 참 행복하더라고요. 한 신부님이 자신만의 산티아고를 걸으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 산티아고는 아마 학교였나 봅니다. 매일 아침 출근길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요.”

 

 

늦깎이
공무원이 된
남자
김성현 씨

김성현


10년 동안의 수험 생활 비로소 이룬 성취


수원지방법원에 근무 중인 9급 공무원 김성현 씨. 나이는 50대 중반이지만 이제 막 8개월 차 근무에 접어든 신입이다. 사범대학을 졸업해 학원에서 중고등학교 영어를 가르쳤던 그가 ‘수험생’ 모드에 돌입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천직이었던 교사를 포기하고 돌연 사법시험에 뛰어든 사연은 이랬다.


“법적인 문제로 속을 많이 끓였어요. 아파트 분양 사기도 당했고, 직접 학원을 운영하며 부딪히는 문제도 많았죠. 그때마다 변호사, 법무사를 찾아갔지만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내 권리는 내가 지키자는 생각에서 큰 결심을 했습니다.”


9년간 사법고시에 도전해 1차만 2번이나 붙었지만 그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자신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졌던 부인과 벌써 고등학생, 대학생이 된 자식들을 볼 낯도 없었다. 또다시 인생의 선택지 앞에서 고뇌하게 된 그는 쉰세 살의 나이로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기로 했다. 몇 개월 만에 검찰직 필기시험에 붙는 등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는 듯했으나 이번에는 면접이 문제였다. 동기에 비해 나이가 많다는 점은 아무래도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이듬해 법원직 시험에 도전한 그는 심층면접 대상자로 분류되는 고비를 겪기도 했으나 진정성을 발휘해 결국 면접관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비로소 다시 가장의 몫을 하게 된 그는 한동안 감격에 빠졌다.

 

 


나이 든 신입이 된다는 건


20~30대가 대부분인 동기들 사이에서 그는 ‘삼촌’ ‘아저씨’로 통한다. 발령을 받은 곳에서도 웬만한 선배들은 모두 김성현 씨에 비해 나이가 어리다. 어쩌면 괴리감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다.


“면접 때 인사 잘하고 예절 바른 사람이 되겠다는 점을 힘줘 말했어요. 나이 많은 직원이 우려되는 건 바로 그런 부분이잖아요. 남들은 어린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게 힘들지 않냐고 하는데 저는 어느 분야든 나보다 아는 게 많으면 모두 선배고 스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법원에서 만난 선배들은 오히려 경험이 많은 그에게 넌지시 인생 상담을 해오기도 했다. 업무에 대한 적응도 금방 이뤄졌다.


“처음엔 실수투성이었죠. 민원 전화 응대 요령도 몰랐고, 손놀림이 느려서 전산 업무도 영 부담스러웠어요. 심지어 재판 배당을 엉뚱한 곳으로 하는 바람에 2~3일이나 면책이 지연되는 경우도 있었고요. 실수를 줄이고자 노트에 업무 유형과 순서를 적고, 모르는 건 체면 불구하고 무조건 물어봤더니 6개월 정도 지나니까 훨씬 할 만해지더라고요. 노력한 만큼 얻는다는 사실은 참 변함이 없어요.”


가끔 과격한 민원인들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긴 하지만, 다시 돌이켜봐도 ‘새 출발 하길 참 잘했다’ 생각한다는 그는“근무 중 인터뷰를 했으니 그만큼 야근을 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이 여느 청년 못지않게 씩씩했다.

 

 

50세에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가정주부
장경옥 씨

장경옥


공인인증서도 몰랐던 가정주부의 화려한 변신


올해 쉰을 맞은 장경옥 씨는 인생의 절반을 가정주부로 살았다. 스물다섯에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남편의 울타리 안에서 두 아이를 키웠다.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이었지만 문득 그 틀을 깨고 싶었다. 홀로 가정의 경제를 책임 지는 가장의 어깨를 가벼이 덜어주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가정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고 남편은 대안으로 공인중개사 시험을 추천했다.


“바깥 양반이 부동산, 은행 업무를 모두 책임졌기 때문에 공인인증서가 뭔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누구보다 저를 잘 아는 사람이 추천하니 믿고 시작했죠.”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가 쉬울 리 없었다. 밤을 새며 책을 봐도 도통 점수가 오르지 않자 ‘이 나이에 왜 이런 고생을 하나’ 회의감이 찾아왔다. 함께 등록한 친구는 3개월 만에 포기했고, 주변에서는 어차피 중간에 포기할 텐데 돈이 아깝다고들 했다.


“오기가 생겼어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열두 시에 집에 돌아와 대충 집안일을 마치고 또 책을 들었죠. 집에 쌓여 있는 일거리들을 보면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저를 채찍질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지만 첫해 시험에서 한 문제 차이로 실패를 맛봐야 했다. 다시 1년의 시간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 오자 한창 사춘기를 겪던 딸은 이제 그만하면 안 되냐며 엄마의 부재를 혼란스러워했다. 딸이 눈에 밟히지 않을 리 없었지만 포기만은 하기 싫었다.


“이번에는 꼭 붙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첫해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죠. 수업료를 아끼기 위해 인터넷 강의를 들었고, 각종 특강을 쫓아다녔어요. 그 덕분에 2년 만에 합격할 수 있었어요.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장해요. 딸아이도 누구보다 저를 많이 응원해주고 있어요.”

 

 


늦은 시작을 극복하는 그녀만의 필살기


부동산을 개업한 지 이제 6개월 차. 공부와는 또 다른 고군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계약서 작성 및 서류 작업이 많은 업무의 특성상 컴퓨터 때문에 한동안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밤새 타이핑 연습을 하고, 온 가족을 동원해 인터넷 사용법을 습득했죠. 수험생이었을 때는 복잡한 ‘세금법’ 때문에 힘들어했는데 계산기를 끼고 살다 보니 이제는 달인이 됐네요.”


큰돈이 오가는 부동산의 특성상 예민한 고객이 적지 않고, 자기 입장만을 내세우는 매수자와 매도자 사이에서 현명하게 처신하기도 쉽지 않았다. 동료들이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토로하지만 그녀는 특유의 긍정적 성격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다.


“보람된 일들을 먼저 생각해요. 최근에는 몇 달을 함께 고생한 끝에 신혼부부에게 좋은 조건의 집을 소개해줬는데 제 일처럼 기쁘더군요. 저를 믿어주는 고객들을 보며 자신감이 생겼어요.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달라진 세상이 즐겁고 신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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