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관 출신으로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가 지하철 택배 일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가 일흔여섯이었다. 가족과 지인들은 망신스럽다며 뜯어말렸지만 그는 끝내 운동화 끈을 바짝 묶고 지하철로 향했다.
지하철 택배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자
‘가르치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살아온 나는 장학관으로 퇴직한 뒤에도 일흔두 살까지 대학 강단에 섰어요. 남들에 비해 은퇴가 늦긴 했지만 막상 4년을 집에서 놀다 보니 답답하더라고요. 지금보다 10kg이 더 나갈 정도로 몸에 살집이 있었는데 테니스니 등산이니 좋다는 운동을 다 해봐도 살이 안 빠졌어요. 그때 마침 구청에서‘노인 택배’ 모집 공고를 보게 됐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데다 쏠쏠한 용돈까지 챙길 수 있으니 괜찮다 싶었어요.
서울대 사범대 출신, 교직 생활 중 박사 학위 취득 등 ‘많이 배우신 분’이 어떻게 체면치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묻자
어릴 때부터 시골에서 리어카 끌고 지게 지면서 막일을 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내가 어떻게 저런 걸’ 하는 생각 같은 건 안 해봤어요. 어려운 형편에 서울로 대학을 오고부터는 뭐든 내 힘으로 해결해야 했죠. 낮에는 태권도 사범으로, 밤에는 가정교사로 일해가며 학비를 벌었고 방학 때는 가방에다 실, 바늘, 좀약, 칫솔 같은 것들을 잔뜩 넣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팔러 다니기도 했어요. 체면 따지느라 내가 당장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을 못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에요. 누가 내 인생 대신 살아주지 않거든요.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돼요.
이 일의 장점이 뭐냐는 질문에
몸이 상당히 건강해졌어요. 근육도 붙고 소화나 배변 활동도 활발해지더라고요. 체중이 줄어들면서 무릎 통증도 사라졌죠. 늘 쓰던 안경을 벗어놨을 만큼 시력도 좋아졌고 새 길을 찾아다니는 덕분에 기억력도 향상됐습니다. 하루 4~5만원씩 생기는 용돈으로 손주들 간식 사주는 재미가 어찌나 쏠쏠한지요. 집사람에게 2~3만원씩 타 가던 모임 회비도 요즘에는 스스로 해결합니다. 이만하면 괜찮은 직장이죠?
주변의 반응이 어땠냐는 질문에
난리도 아니었어요. 일흔여섯 살이나 먹은 노인이 택배 일을 하겠다는 것도 그랬지만, 왜 하필 ‘그런 일’이냐는 거죠. 집사람은 “없는 형편에 기껏 박사 공부까지 시켜줬더니 늘그막에 겨우 그런 짓을 하냐”고 성화고 자식들은 창피하대요. 동료 교사나 대학원 동기들도 모두 ‘격에 맞지 않게 뭐 하는 짓’이냐는 반응이더라고요. 그때마다 제가 그랬어요. ‘과거에 한가락 했던 게 뭐 그렇게 대수냐!’
택배 일의 고충을 묻자
처음엔 많았죠. 잘못된 주소를 들고 이리저리 길을 헤매기도 하고 지하철에 깜빡 물건을 놓고 내린 적도 여러 번이에요. 아침에 지하철역으로 나가 스마트폰을 켜는 것으로 회사에 출근 신호를 보내는데, 콜이 오면 얼른 ‘확인’ 버튼을 눌러 일을 따내는 것이 관건이지요. 먼저 ‘찜’ 하는 사람에게 일이 돌아가는 시스템이라 초반에는 기계 작동이 서툴러 낭패를 보는 일이 많았는데 차차 요령이 생기면서 많을 땐 하루 4~5건 정도의 배달을 하고 있어요. 가끔 어린 손님들이 ‘왜 이렇게 늦게 왔냐’ 고 면박을 주거나 버릇없이 행동할 때도 있지만 ‘내가 능선을 하나 넘었구나’ 하고 훌훌 털어버리면 그만이에요. 잠깐 “미안합니다” 하고 머리 숙이면 될 걸 뭣 하러 갈등을 만들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게 사는 이치죠.
인생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자
사는 게 참 별거 없습니다. 당장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또 그다음 문제가 다가오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늘 당면한 문제를 푸는 게 결국 인생입니다. 그때마다 문제를 극복하지 마시고 돌파한다고 생각하세요. 체면과 상관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힘. 그거면 인생 크고 작은 문제는 어떻게든 다 해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