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어느 작은 골목에 들어서면 ‘음악의 숲’이라는 낡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지하로 내려가면 마치 1980년대 음악다방 같은 풍경이 펼쳐진 다. 이곳은 김재원 씨가 은퇴 후 인생을 즐기기 위해 마련한 아지트다.
음악 애호가들에게 LP 바는 로망과도 같은 공간입니다. 음악은 언제부터 좋아했나요?
어릴 때부터 좋아했죠. 원래는 의류 무역 회사에 다니다가 IMF 외환 위기 때 퇴직하고 동대문에 옷 가게를 차렸어요. 평생 월급쟁이였다가 그 치열한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게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때 음악을 듣는 취미 생활로 힘들었던 몸을 쉬고 스트레스를 풀면서 음악을 더 많이 좋아하게 되었죠.
이렇게 전용 공간까지 만들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오래된 LP는 특유의 묵은내가 있어요. 그래서 집에 보관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LP를 보관할 수 있는 작은 창고를 하나 얻었어요. 일주일에 한두 번 가서 노래를 듣곤했는데, 갈 때마다 의자를 하나 갖다놓는다거나 조명을 설치하거나 했더니 아지트처럼 변했죠.
그러면서 종종 지인들과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들었는데, 차라리 LP 바를 차려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마침 동대문 인근에 비어 있던 작은 다방을 보게 됐고, 저렴한 월세에 반해 LP 바를 차려버렸습니다. 낮에는 의류 가게에서, 밤에는 LP 바에서 이중생활을 시작했죠.
나만의 공간에서 지인들과 음악을 즐기는 것과 외부 손님을 받는 것은 다를 텐데요.
맞아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업자 등록만 내고 시작해 처음에는 파리만 날렸어요. 그럴 만도 한 것이 안주도 마른오징어와 통조림 과일이 전부였거든요. 그보다 정신이 번쩍 들었던 건 제가 생각보다 음악을 잘 몰랐다는 거예요.
그동안 모은 LP가 3000장 정도 됐고, 나름 음악을 많이 안다고 자부했는데, 취향이 다르거나 나이가 젊은 손님에게 신청곡을 받으면 창피할 정도로 모르겠더라고요. 그 때부터 손님들이 써서 주는 신청곡 종이를 보물처럼 여기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청곡으로 들어온 LP를 사기 위해 몇 날 며칠 발품을 파는 것은 물론 그 시대의 음악, 가수 등을 폭넓게 공부했어요. 그렇게 손님이 조금씩 늘더니 청계천 복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고 LP 동호회, 동창회 등 모임 단위로 방문하면서 인터넷 카페에도 알려졌지요.
이후 신문사에서 취재까지 하면서 수익이 나기 시작했어요. 문을 연 지 꼬박 2년 반 만에 적자를 벗어나게 되었죠.
수익이 안정되면서 자연스럽게 전업을 했군요.
그런데 그때 위기가 왔어요. 장사가 잘되니까 건물주가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LP 바를 차린 지 4년 만에 다른 공간을 알아봐야 했고, 그러다 만난 곳이 지금의 을지로입니다.
같은 조건에 월세가 절반이라 일단 계약부터 했는데, 들어와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있던 터라 거의 폐허 수준이어서 끊긴 전기와 수도를 다시 잇고, 먼지와 곰팡이를 걷어내는 데만 두 달이 걸렸어요.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비가 오면 천장이고 벽이고 물이 줄줄 샜죠. 그러다 장마 때 물난리가 나고, 한여름 더위에 습기가 차면서 그동안 애지중지 모은 LP와 오디오에 곰팡이가 생겨 망가져버렸죠. 그렇게 새로운 공간을 정비하고 적응하는 데 다시 2년이 걸렸습니다. 수익도 거의 없다시피 했고요.
그런 상황이라면 진지하게 접는 것도 고민했을 것 같아요.
장사를 안 한다고 해서 음악 감상이라는 취미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쉽게 접을 수 없었던 이유는 단골손님들 때문이에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진심 어린 응원과 조언,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덕분에 계속 버틸 수 있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저뿐 아니라 단골손님들에게도 이 공간이 무척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들 이 공간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자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행운이 찾아왔죠. 영화 <써니>에서 촬영 장소로 쓰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영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개봉 이후에 매출이 두 배로 늘었어요. 옛 추억을 찾는 중년들부터 20~30대까지 많이 찾아주었어요.
그런데 손님이 많은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신청곡이 밀리고, 신청한 곡을 들으려면 한 시간은 족히 기다리다가 결국 노래를 듣지 못하고 나가는 손님도 생겼습니다.
계속 이 공간을 유지하려면 또 한 번 정비가 필요했겠습니다.
LP 바를 운영하는 데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뒤 집사람과 이 공간을 얼마나 더 운영할 수 있을까 이야기해 봤어요. 체력 소모가 큰 일은 아니니 10년 더 할 수 있겠다고 의견을 모았죠. 그러려면 저희도, 이곳을 찾는 분들도 계속 웃으면서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했어요.
그래서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로 영업시간을 단축했고, 공휴일에는 문을 닫았습니다. 단골손님들이 처음에는 아쉬워했지만 오래도록 이곳을 운영하고 싶다는 저희의 뜻을 이해해 주었고, 또 짧은 영업시간을 오히려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손님도 늘었고요.
약간의 여유가 생기니 다시 처음 LP 바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게 되더라고요.
앞으로 10년 동안은 변함없이 이 자리에 계실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LP바를 운영해 보니 외형적인 것보다는 항상 웃는 얼굴로 편하게 손님들을 대하고, 신청곡 한 곡이라도 더 틀어드리려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앞으로 꿈이 있다면 공간 한쪽에 혼자 오는 손님만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처럼 저희 바를 찾아오는 분들이 듣고 싶은 음악을 제가 직접 틀어드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음악의 숲 LP시대
- 전화번호 : 02-2274-2254
- 주소 : 서울 중구 동호로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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