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라, 집에서! 만나라, 누구든! 공부해라, 새로운 것을!

기사 요약글

인생을 살다 보면 마치 고인 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왜 그럴까? 무엇이 문제일까? 330만 뷰의 ‘세바시’ 대표 강연자이자 각종 방송에서 활약하고 있는 노인 상담 전문가 이호선 교수는 사회적 관계가 고인 물 을 흐르게 하는 물길이라고 조언한다. 특히 건강하고 의미 있는 사회적 관계는 일상의 즐거움을 넘어 새로운 삶의 방향키가 될 수 있다고. 그렇다면 과연 인생 후반전을 도약하기 위해 우리에겐 어떤 관계가 필요할까?

기사 내용

 

 

 

나이 들면서 외롭다거나 삶의 의미가 없다는 말들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그동안의 인생을 서양화로 그려내던 화가가 화풍을 바꿔나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양화는 캔버스의 빈 공간마저도 흰 물감으로 칠하는 꽉 채워진 그림이에요. 반면 동양화는 빈 곳은 비워두는 것이 특징이죠. 바로 여백을 남기는 방식입니다. 서양화를 그리던 사람이라면 동양화의 여백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뭘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질 수 있겠지요.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마치 서양화처럼 오랫동안 꽉 찬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은퇴 이후에 생긴 여백이 공허함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외로움으로 이름 지어지기도 해요. 하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의미는 충분히 바뀔 수 있어요.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재구성 과정이죠. 이 과정에서 낯선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어색함이나 약간 부족한 듯한 느낌, 그리고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것 같은 부적절감이 발생할 수 있어요. 그 부적절감이 안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도약하고 새롭게 변화하기 위한 과도기에 생기는 자연스런 감정인 거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변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과도기적 시기에 사회적 관계가 어떤 돌파구가 되어줄까요?

 

 

은퇴 시점과 맞물리는 변화의 과도기에 사회적 관계가 해주는 역할들은 상당히 중요해요. 가장 먼저 자유를 보장해 주죠. 우리가 집 밖으로 나가면 무언가를 함께 하고, 같이 누릴 사람이 필요해요. 혼자보단 한 명이라도 함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고, 또 쉬워지기 때문이죠. 그런 부분에서 든든한 심리적 울타리가 되어주기 때문에 나에게 자유를 준다고 할 수 있어요.

 

두 번째는 여가를 함께 할 파트너라는 점이에요. 가족과 즐기는 여가와는 다르게 모임이나 동호회에서 하는 여가 활동은 소속감을 부여하기도 하고 동시에 색다른 즐거움도 제공해 줍니다. 그다음은 미래의 행동 파트너가 되어준다는 거예요. 미래 행동 파트너는 여가 파트너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행동을 함께 한다는 건 앞으로 제2의 인생과 제3의 인생을 시작할 때 지지자이자 동업자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죠. 새로운 직업이나 취미, 봉사와 같은 자아 실현 측면 또는 새로운 사업적 측면에서 긍정적 시너지를 내는 관계를 기대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서로에게 좋은 위로자라는 겁니다. 친밀하고 화목한 가정이라도 가족에게 모든 비밀을 말하기는 힘들어요. 오히려 가족이 내 말을 더 들어주지 않고, 공감해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면에서 때로는 사회적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가족보다 더 나은 위로자가 되어줍니다.

 

 

나이 들면서 사회적 관계는 어떻게 달라지나요?

 

 

오십 이전에는 대부분 바쁘게 살아요. 사회적 관계 역시 전반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가기 위한 일부분이었죠. 하지만 나이 오십을 기점으로 사회적 관계는 내 삶의 여러 가지 부분을 더 많이 채워주는, 새로운 관계로 보면 될 것 같아요. 시간적인 여유를 함께 공유하기 때문에 비중이 훨씬 커지고 더 깊어지기 마련이죠.

 

 

시니어들의 모임 활동이 실제 삶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모임이나 공동체는 참으로 놀라운 기능을 해요. 어느 날 제가 아는 분이 탱고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니어 탱고 대회에 출전한다는 거예요. 열심히 춤을 추면서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쓰고 몸을 움직이니 건강도 좋아지고, 목표를 위해 한 스텝 한 스텝 올라가다 보니 절로 성취감도 생기고, 또 연습하다 다친 이가 있다면 문병을 다니며 서로 돌봄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친밀하게 관계를 이어가시더니 그곳에서 만난 분과 재혼까지 하셨어요.

 

공동체는 학습 영역과 관계 영역, 신체 영역, 더 나아가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여는 ‘일석다조’ 효과가 있죠. 제가 시니어들에게 늘 강조하는 네 가지가 있어요. ‘막!공!나!만!’ 막아라, 질병을! 공부해라, 새로운 것을! 나가라, 집에서! 만나라, 누구든! 모임은 그 네 가지를 충족시켜 주는 좋은 수단이죠. 공동체에 들어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며,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길 바랍니다.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모든 사회적 관계가 긍정적일까요?

 

 

스트레스가 되는 관계가 있어요. 특히 동창회 등 여럿이 함께하는 모임의 경우 한두 명 때문에 그 모임 자체가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하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모임에 계속 나갈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는 왜 그 모임에 가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 한 두 명을 보러가는건 아니에요. 또 이제까지 그 모임을 견뎌왔다면, 자신에게 어느 정도 힘이 있다는 얘기예요. 그처럼 견딜 만한 모임에는 나가셔도 됩니다.

 

저도 나이가 점점 들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함께 성장해 온 친구들이 하나둘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관계가 정리될 수 밖에 없는 시기죠. 얄미웠던 사람마저도 이제는 내 옆에 오래 남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때로는 지긋지긋한 목소리도, 보기 싫은 얼굴도, 그리고 밥 먹는 소리조차 싫었던 그들을 앞으로도 잘 견딜 가능성이 있죠.

 

하지만 때로는 스트레스를 넘어 해가 되는 친구들이 있어요. 돈을 빌려달라는 등 무언가를 계속 요구하거나, 가족과 나 사이를 갈라놓는다거나, 친구들을 이간질하는 일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발생해서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면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죠. 이런 사람들은 끊으세요. 이젠 선택해도 괜찮습니다.

 

 

 

 

관계를 잘 정리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기준은 한마디로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자’ 입니다. 어차피 나와 지속적으로 이어질 관계는 정해져 있어요. 그건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미 경험을 해왔죠. 이때 주도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취사선택하다 보면 그 관계를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또 하나, 새롭게 관계를 맺어가고 이어가며 ‘나’라는 사람의 새로운 그림, 새로운 미래를 한번 만들어보면 노후가 훨씬 풍요로워질 것 같아요.

 

 

일부러 관계 넓히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될까요?

 

 

인생은 콜라주라고 생각해요. 캔버스 위에 여러 가지 재료를 다채롭게 배치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인데, 사회적 관계 역시 그 재료라고 할 수 있죠.

 

과거의 기억을 쭉 돌아보면 내 인생이지만 결코 나 혼자 산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가 편한 분도 있어요. 괜찮아요. 그게 무슨 큰 범죄입니까? 그리고 사람과 관계를 맺기보다 “난 책이 친구야” 하는 분도 있고, 또 영화, 농사, 아니면 반려견이나 반려묘, 반려식물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얻는 충만함을 채우는 분도 있어요.  또 “나한테 가장 좋은 친구는 내 배우자야” “자식만 한 친구는 없어” 하는 분도 계시고요. 스스로 불편하지 않고 힘들지 않다면 상관없습니다.

 

 

삶의 전환점을 위해 새로운 관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 삶의 성장 동력이 되어줄 새로운 관계는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옛날과 다르게 요즘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 너무 좋은 환경이에요. 바로 SNS가 있잖아요. SNS의 특징이 비슷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거죠.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거나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SNS를 통해 활발하게 소통하고 교류합니다.

 

SNS라고 하면 카카오톡이나 네이버 밴드 정도 생각하는데, 유튜브도 SNS예요.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찾아 열심히 보다보면 그 안에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겁니다. 또 인터넷 카페도 있어요. 온라인 동호회지요. 저도 동호회 6개에 가입했어요. 그 중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건 2개고, 나머지는 글만 읽어요. 내가 원할 때 언제든 가서 조용히 회원들이 올린 글만 읽고 옵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오프라인 모임 공지가 떠서 큰맘 먹고 나가면 한 20년 알고 지낸 것처럼 반갑더라고요. 봉사를 하기도 하고, 뭔가를 만들기도 하고, 새로운 걸 배우기도해요.

 

이렇게 SNS를 넘어 물리적인 참여를 통한 관계 체감을 원한다면 동호회가 좋습니다. 반대로 신나게 놀고 집에 왔는데, 기쁨도 잠시고 허무감이 밀려오는 순간이 꽤 많다면 학습 공동체에 들어가보세요. 방송통신대학교나 사이버대학교 같은 전문 기관에서 제대로 공부해 보는 것도 좋고요.

 

그 외에도 도서관이나 구청, 주민센터 등 지역사회 안에서도 다양한 학습 공동체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학습을 한다는 건 새롭게 뇌를 깨우고 지식만 습득하는 게 아니라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죠. 또 과제나 미션이 주어지면 의무감도 생겨나는데, 이때 느끼는 약간의 긴장감은 우리를 들뜨게 하면서 진보하게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고, 인터넷 검색 등 손품을 팔아야 얻을 수 있는 정보라는 거죠.

 

 

새로운 커뮤니티에서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는 노하우가 있을까요?

 

 

흔히 자기 개방 혹은 자기 노출이라고 하는데요, 새롭게 관계를 맺을 때마다 내 역사를 구구절절 다 읊어줄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다 도망가요. 이와 반대로 상대방이 자신의 얘기를 하나둘 꺼내기 시작하는데 입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죠. 적절하게 자기 노출 수위를 조절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얘기해도 괜찮은 선이 있어요. 깊은 이야기를 다 했을 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 얘기는 안 하면 됩니다. ‘이건 누구한테나 수 있는 이야기다’ 같은 자신만의 기준을 정하고 얘기하면 되는 거죠.

 

또 한 가지 노하우라면,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감이에요. 공감은 감정 공감과 상황 공감이 있어요. 말 그대로 “너 그때 슬펐겠다”라며 위로하는 것이 감정 공감이고, “그래서 그건 어떻게 해결한거야?”라고 관심을 가지는건 상황 공감이에요. 이렇게 상대방 말에 공감하며 잘 들어주는 사람은 마치 꽃과 같아서 벌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해요. 상대방 얘기에 귀 기울이는 건 좋은 관계를 맺는 더없이 훌륭한 기술이죠.

 

 

친목 도모 정도로 그치지 않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관계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젊었을 때 우리는 생존을 위해 관계를 맺죠.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조력하는 상대는 내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생존 동력이고, 회사 동료는 생계의 생존 동력인 셈이에요. 그렇게 생존을 중심으로 살다가 아이들이 다 성장하고, 나는 퇴직을 하면 그 관계는 동력을 잃게 됩니다.

 

그때 그 관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동의가 필요하겠죠. 기존 관계의 질서나 구성원들의 색깔과 너무 다르지 않은 범위 내에서 새로운 것을 제안해 보세요. 제안하는 사람이 없어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 뿐, 다들 고맙게 생각할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도 간절하거든요. 다만 ‘우리 이걸 하자’가 아니라, ‘우리 이런 걸 해보면 어때?’라는 제안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이 먼저 용기를 내 보는 건 어떨까요? 갑작스럽게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예요. 너무 거창한 목표보다는 이루기 쉬운 작은 것부터 하나씩 달성해 나가면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등산을 해보기로 했다면 ‘한국 100대 명산은 다 가보고 죽자’라는 목표를 세우고 가장 쉬운 코스부터 시도해 보는 거죠. 또 함께 책을 읽기로 했다면, 여행 에세이를 읽고 그곳으로 답사 여행을 떠나거나, 예술가의 책을 읽고 전시회에 다녀오거나, 저자와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사에 함께 참여하는 식이죠. 이때 등산 코스 난이도나 책을 읽는 기간은 속도가 가장 늦는 사람을 기준으로 맞추세요. 그래야 모두 다 같이 갈 수 있고, 또 천천히 가면 더 풍성하게 그 의미를 뜯고 씹고 맛보며 즐길 수 있거든요.

 

 

주변에 원하는 모임이 없어 직접 만들어볼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인 중에 경기도 이천으로 귀농하신 분이 계신데요. 주변에 논밭과 주택말곤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뭔가 시작해 보고 싶었대요. 그래서 큰 종이에 ‘매주 토요일에 배추 농사를 같이 할 사람을 찾는다’고 써 붙였는데 아무 반응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배추 농사를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썼더니 동네 어르신들이 너나없이 참여했고, 그 덕분에 여덟 분의 배추 선생님을 모시고 농사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안 해본 농사가 없는 분들인데, 브로콜리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대요. 그래서 다 같이 브로콜리 농사에 도전했고, 지금은 그 마을 일대가 다 브로콜리를 재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모임이 건강하게 지속되려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접점을 만들고, 모두에게 플러스가 되는 요인이 있어야 돼요. 물론 처음에는 솔선하는 마음과 약간의 희생이 필요해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죠. 그 일을 계기로 그 분은 동네 이장이 되셨어요. 똑똑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서 동네를 발전시켰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이장감이 어디 있겠냐 하면서요.

 

처음 모임을 만들 때는 4~5명이 적당해요. 우선 작게 시작해서 점점 확장해 보세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알까지 낳는다면 언젠가는 내 삶은 물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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