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화제 - 그녀들의 가을 나들이

기사 요약글

깊어가는 가을, 여덟 명의 어르신들이 계룡산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기사 내용

평소 아픈 배우자를 돌보느라 외출 한 번 자유롭지 못했던 이들은 반나절의 소풍에서 해방감을 만끽했다. 시그나사회공헌재단의 후원으로 진행된 ‘2014 지치지 않는 가족사랑’의 나들이 현장을 헤이데이가 함께했다.
지난 10월 15일, 대전에 위치한 보문종합 사회복지관에는 이른 아침부터 어르신들과 복지사들의 나들이 준비로 분주했다. 출발 시간은 9시지만 어르신들은 훨씬 이전부터 미니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 어르신은 오늘 놀러 간다고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어요. 어제 밤늦게 전화하시더니, 오늘 새벽에도 전화하셨어요.” 노인활동보조사 손영화 씨(46세)의 폭로에 김대자 씨(74세)는 웃으며 해명한다. “할아버지(남편) 아침 차려 드리고, 분도 좀 바르고 하느라 일찍 일어났지.” 호호 웃는 모습이 여고생 못지않게 수줍다. 이들은 한국여성재단이 시그나사회공헌재단의 후원으로 진행하고 있는 ‘2014 지치지 않는 가족사랑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어르신들이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오랫동안 병석에 있는 경우, 나머지 가족들은 집단 우울증이나 무기력증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가장 가까이서 환자를 보살피는 배우자의 경우는 더하다. 한국여성재단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강연이나 레크리에이션을 즐길 수 있는 정기 모임을 마련해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담당 복지사 이지혜 씨는 “매주 월요일 오후에 모임을 열어 투호나 윷놀이 등 레크리에이션을 즐기기도 하고 초빙 강사의 유익한 강연을 듣고 있다”며 “오랫동안 배우자의 병간호를 해온 분들이라 마음속 응어리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분들께 건강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소개해드리고 있다”고 귀띔했다.

 

 

가을빛만큼이나 따사로운 시간

이날은 매월 1회 진행되는 나들이 날이었다. ‘지지(支持)고(go)! 아주 짧은 나들이’라는 명칭처럼 하루 반나절에 불과한 여행이다. 그러나 아픈 가족을 놔두고 긴 시간 여행을 갈 수 없는 이들에겐 소중한 시간이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는 어르신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한다. 주로 ‘7시 이전에 돌아왔으면 좋겠다’ ‘가까운 곳으로 가자’는 의견이 많다고. 이날 가게 된 계룡산 도예촌은 조선 시대부터 도예가 시작된 곳으로, 1993년 몇몇 도예가들이 모여 공방을 열면서 형성됐다. 어르신들이 처음 방문한 곳은 도자기 전시관으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둘러보며 각자 만들고 싶은 아이템을 선정하도록 했다. 누군가는 라면을 담아 먹어도 좋을 만큼 큼지막한 커피잔을, 누군가는 손님 접대를 해도 될 만큼 멋스러운 접시를 눈여겨봤다.
공방으로 자리를 옮겨 점토를 한 덩이씩 받아 본격적으로 구상한 도자기를 빚기 시작했다. 대부분 도예가 처음이었는데도 예상 시간보다 빨리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만든 작품들은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 구워 복지관으로 발송된다고. 이후 한방 오리백숙으로 든든하게 속을 채운 어르신들은 전통찻집 ‘담꽃’에 둘러앉아 쌍화차, 대추떡 등을 나눠 먹으며 즐거운 여행을 마무리했다.

 


마음속 응어리, 날려버려요

김대자 씨는 이날 공방에서 큰 컵을 만들었다. 컵의 주인은 남편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남편) 술 따라 드시라고 만들었어요”라며 웃는다. “이렇게 나오는 것만 해도 상쾌하고 즐거워요. 우리 할아버지도 복지관 다녀온다고 하면 ‘걱정 말고 놀다 오라’고 해요.” 10년이 훌쩍 넘은 병간호에, 몇 년 전부터는 그녀 본인도 퇴행성 관절염으로 휠체어에 의지하는 형편이다. 통 웃을 일이 없던 그녀에게 ‘지치지 않는 가족 사랑 프로젝트’는 큰 힘이 됐다. “이렇게 하루에 박수를 10번씩 치면 치매를 예방할 수 있대요. 치매 예방 교육이나 스트레스 푸는 법도 배우고 이순재 나오는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도 보았죠. 복지관에 자꾸 오고 싶어요. (모임이 있는) 월요일만 기다려지고.” 유난히 도자기 굽기 체험을 즐거워하던 박외숙(77세) 씨는 뇌경색으로 쓰러진 남편을 4년째 돌보고 있다.
“할아버지(남편)도 힘들겠지만 저도 계속 스트레스를 받았죠. 할아버지가 화장실에 대소변 흘려놓을 때, (옷에) 실수를 할 때 힘들죠. 그래도 여기 나와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아요. 좋은 이야기 많이 듣고, 또 이렇게 소풍도 오고. 이렇게 놀러만 다니면 좋겠어요. 호호.” 그녀는 “누군가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고 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누군가 자신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우리 같은 사람들은 생활(경제)적인것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더 커요. 여기 모인 할머니들의 심정도 다 똑같아요. 모여서 서로 고생하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 혼자만 이런 일을 겪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