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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날씨가 반이다. 겨울 여행은 기획하기가 쉽지 않다. 춥기 때문이다. 추우면 움츠러들고 움츠리면 우울해지고 우울하면 여행감을 살리기가 쉽지 않다. 추운데도 밖에 나올 만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 ‘무엇’으로는 눈만한 것이 없어서 대부분 겨울 여행은 눈과 얼음을 테마로 기획되곤 한다. 겨울을 피하려 하기보다 차라리 ‘겨울 맛’을 제대로 보는 것이 낫다. 눈꽃 트레킹이나 얼음 트레킹을 주로 기획하는 이유다.
추위를 보상받는 가창오리 군무
모든 시작은 사소하다. 지난겨울 군산 탐조 여행도 그랬다. 조수남 사진가가 페이스북에 올린 가창오리 사진이 눈에 확 띄었다. 석양을 배경으로 한 가창오리 군무 사진을 보니 ‘이것이 겨울의 맛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탐조 여행을 만들고 싶어서 바로 연락했다. 군산 구불길 사무국장이었던 조수남 사진가는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라 흔쾌히 응해주었다.
군산 하구언 지도를 보면 ‘금강철새조망대’가 있다. 그런데 탐조를 위한 집결지는 금강철새조망대가 아니라 금강 하구 어느 지점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원래는 철새들이 몰려왔는데 조망대가 생기고 나서 그 거대한 모습에 겁을 먹어 그쪽으로는 거의 오지 않는다고 했다. ‘새를 쫓아낸 조망대’라니, 말하자면 새들에게 조망대는 거대한 허수아비였던 셈이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렸다. 하늘이 약간 어스름해질 무렵 일군의 사진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전투 준비 태세는 완벽했다. 대포처럼 생긴 고성능 렌즈를 끼운 묵직한 카메라를 튼튼한 삼각대에 장착했다. 그들이 듬직한 포병이라면 우리는 보잘것없는 소총수 같았다. 포병의 수가 수백 명으로 늘어났을 무렵 드디어 가창오리 떼가 나타났다.
가창오리들은 기대만큼 가까이 와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섭섭할 정도로 멀리 가지도 않았다. 강둑에는 이미 수백 명의 사진가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으니, 가창오리 입장에서는 수백의 포식자들이 군집한 셈이니 가까이 올 리 만무했다. 그 정도 거리에서라도 그들의 군무 관람을 허락해준 것에 감사했다. 매서운 강바람과 겨울 추위를 충분히 보상받을 만큼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정해진 간격, 부딪치지 않고 이동하는 비결은 뭘까?
단순히 가창오리가 많아서 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수십만 마리의 가창오리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였다. 평창올림픽 개막식 때 정교하게 프로그램된 드론이 유기체적 움직임을 보여주었는데 그 이상이었다. ‘가창오리들이 부딪치지 않고 저렇게 간격을 유지하면서 이동하는 비결이 뭘까’라고 생각하면서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가창오리 떼는 서서히 상류 쪽으로 사라졌다. 강둑에서 대포알 렌즈로 풍경을 사냥했던 포병(사진가)에게 물으니 가창오리 사진 중에 선호하는 사진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가창오리 떼가 석양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사진이다. 사진가들이 서 있는 곳에서 가창오리 떼가 서쪽 방향으로 날아줘야 찍을 수 있는 사진인데 그런 기회가 많지 않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가창오리 떼의 음영이 강물에 비치는 사진이다. 이는 정말 드문 경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후 휴대폰으로 찍은 내 사진을 보니 초라했다. 내 눈이 본 것을 휴대폰 카메라는 재현하지 못했다.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환상적인 군무를 보여주었던 가창오리가 아니라 휴대폰 화면에는 얼룩이 진 것 같은 형상으로 검은 점들이 지저분하게 찍혀 있었다.
조수남 사진가가 그동안 찍은 가창오리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바로 출력해서 달력을 만들어도 좋을 정도로 멋진 장면이었다. 눌러 찍은 시간의 힘이었다. 그는 매년 겨울 가창오리를 애인처럼 끼고 산다. 앞서 대포알 포병들이 선망하는 사진을 다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창오리를 단지 풍경으로만 탐하는 사진가는 아니었다. 가창오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20여 년 전만 해도 가창오리가 80만 마리 정도 왔는데 현재는 25만~30만 정도로 개체 수가 줄었어요. 이 상태로 간다면 다음 20년 후에는 가창오리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벼를 벤 후 짚을 곤포로 말아가니 낙곡이 줄어 먹이를 구하기 힘들어졌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류독감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지자체들이 먹이 주기를 멈춰서 먹을 게 더 없어졌죠. 그러다 보니 가창오리들이 먹이를 찾기 위해 가지 않던 곳으로 가곤 합니다. 겨울철에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최고의 풍광인데 이를 잘 보존하려는 노력이 없어서 안타까워요.”
탐조 여행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구불길 트레킹
다음 날은 근처 저수지로 큰고니를 보러 갔다. 큰고니 탐조 역시 정보력이 핵심이었다. 조수남 사진가가 아침부터 여기저기에 전화를 하더니 우리가 갈 저수지를 정해주었다. 폐교된 대학 옆의 저수지였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큰고니 무리가 있었다. 인간에게는 폐교로 황폐해진 곳이지만 큰고니에게는 위협이 사라진 안전한 피신처였던 셈이다.
조심조심 저수지를 돌며 큰고니 무리를 관찰했는데, 머리를 물속에 처박고 먹이를 찾거나 가마우지처럼 물 위를 스치듯 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서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큰고니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찍기 위해 일부러 큰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다행히 우리가 관찰할 때는 그런 무도한 사람은 없었다.
큰고니 탐조를 마치고 점심을 먹은 뒤 군산 구불길 5코스(물빛 길)를 걸었다. 구불길 조성 초기 사무국장을 했던 조수남 사진가는 ‘휴식 같은 순간’을 제공할 곳으로 이곳을 추천했다. 구불길을 걸을 무렵에는 날씨도 풀려서 여행의 망중한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여행에는 텐션을 주는 스케줄과 이완시켜주는 스케줄이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좋은데, 가창오리 탐조에서 생긴 긴장을 이완시키기 좋은 트레킹 코스였다.
올해 이 세시풍속에는 순천만 습지의 흑두루미 탐조를 포함시키려고 한다. 조수남 사진가가 말한 가창오리 피난처 중의 한 곳이 바로 순천만이다. 요즘 순천만 습지의 터줏대감 격인 흑두루미와 가창오리 떼가 어우러져 장관을 펼치고 있다고 최덕림 선생이 기별했기 때문이다. ‘지방행정의 달인’으로 꼽히는 최덕림 선생은 순천시 공무원으로 재직할 때 순천만 습지를 되살리는 일을 맡았다. 우리가 가면 순천만 탐조 여행을 직접 안내하겠다는 그의 말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관광자원을 개발한다면서 자꾸 무엇을 짓는데 역으로 없애는 발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순천만 습지를 개선할 때 3년 동안 치우기만 했어요. 그랬더니 20만 명 오던 연간 관광객이 300만 명으로 늘었지요.”
‘어른의 여행을 디자인하는 여행 감독’을 표방하면서 다양한 여행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이런 탐조 여행은 어른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내 안의 소년과 소녀를 이끌어내주기 때문이다. 세상일이 싱거워질 무렵 무언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을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경험이다. 거기에 추위를 극복하면서 ‘불편한 사치’를 맛보면 나름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탐조 여행을 ‘재열투어 여행 세시풍속’의 겨울 리스트에 포함시킨 이유다.
여행 TIP
▶여행 설계
탐조 여행(특히 철새 탐조)은 쪽대본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그 해 기후에 따라 혹은 농작물의 작황에 따라 간혹 조류독감 방역에 의해 상황 조건이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관찰하려는 새의 특성에 따라 탐조 시간도 맞춰야 한다. 올해는 군산의 금강 하구나 서산 천수만, 순천만 습지, 창원의 주남저수지 등에서 두루 관찰되고 있다. 탐조를 할 때는 방한을 단단히 하고 나와야 하며 쌍안경 등을 준비하면 관찰을 더 잘할 수 있다. 서천군에 조류생태전시관이 있어서 새의 생태와 한국을 찾는 철새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여행을 돕는 책
한일철새보호협력회의 한국 대표로 경남 창원시 주남저수지의 철새를 주로 관찰하며 ‘주남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대표를 맡았던 최종수 씨가 쓴 <탐조여행:주남의 새>를 참고할 만하다. 한국야조생명협회 회장이자 조류 환경조사 전문가인 정운회 회장이 쓴 <한국의 새 537종>은 도감 형식이어서 궁금한 새를 찾아볼 때 참고할 수 있다. 종별 특성, 생태 이해, 서식 환경, 분포지, 탐조지 소개가 잘되어 있다.
글 고재열 사진 조수남, 고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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