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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00m 와이너리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금곡리. 수도산 와이너리는 수도산(1317m), 가야산 단지봉(1327m), 황악산 형제봉(1022m), 삼방산(864m)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해발 500m쯤 되는 고지대 마을에 있다.
김천 시내에서 한 시간 정도 더 들어가는 깊은 산골 마을이다.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 들어가면 산과 강, 사과 과수원, 논밭으로 둘러싸인 곳에 수도산 와이너리가 있다.
양조 공장, 와인 체험장, 와인 저장고에 포도밭까지 갖춘 개인 소유의 와이너리로 백승현 대표는 20년 전 자신이 태어난 땅으로 돌아와 유기농법으로 산머루를 재배하며 토종 빈티지 와인을 만들고 있다.
그가 만든 와인은 한국 와인 중 톱 레벨로 손꼽힌다. 수도산 와이너리는 ‘크라테(Kraté)’라는 브랜드로 레드, 화이트, 로제 와인을 생산한다. ‘크라테’라는 이름은 ‘화산 분화구’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크라테(Crater)에서 착안했다.
와이너리가 위치한 증산면의 지형이 분지여서다. 크라테 와인은 2014년부터 크고 작은 각종 와인 대회에서 수상하며 품질을 인정받고 있고, 특히 유기농 산머루로 빚은 레드와인 ‘산머루 크라테 세미 스위트’는 서울 특급 호텔 레스토랑과 와인 바 등에 납품된다.
방황했던 1라운드 인생
백승현 대표는 전직 프로 복서였다. 담배와 약초를 재배하는 두메산골 농부의 7남매 중 막내였던 소년은 운동으로 돈을 벌고 싶어 고등학교 때부터 권투를 했다.
주니어라이트급 프로 복서로 데뷔했지만 링 위에서의 시간은 짧았다. 공식 전적 3전 2승 1패. 한 번의 패배였지만 그는 단박에 알았다. 챔피언 벨트는 자신의 미래가 아니었다.
링에서 내려온 그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대부분 몸 쓰는 일이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대기업 경호원으로도 3년 넘게 일했지만 역시 맞지 않는 옷이었다.
2년 동안 거친 방황 길에서 좌충우돌하던 그는 서른을 앞두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게 20년 전이다.
“부모님 땅에서 농사를 짓다가 2001년부터 토종 산머루에 꽂혔어요. 담배밭을 갈아엎고 머루를 심었습니다. 경기도 파주에서 산머루 묘목 500주를 구해와서 심었는데 수확할 때까지 수입이 없으니 화물차 운전, 이삿짐센터 일, 막노동 등 돈 되는 일은 무엇이든 했어요.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까요.”
그에게 머루 재배는 단순한 농사가 아니었다. 먼저 땅을 살리는 데 몇 년 고생한 끝에 맛 좋고 당도 높은 산머루를 수확해 생과나 즙으로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입이 적었다.
머루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와인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와인이 돈이 된다는 주변의 말에 방향을 정했다. 경북농민사관학교, 농촌진흥청 와인 심화과정, 경북대 지역 특산주 제조과정을 다니며 공부했다. 와인 동호회 활동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토종 산머루 와인으로 청와대 납품
2004년부터 산머루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와인을 판매하기 위해 주류 제조업 면허를 신청했다. 양조장도 짓고 설비를 갖춰나갔다.
“공장 짓고 설비 구입하는 데 1억 원 정도 들었습니다. 자본금이 없으니 건축 일을 하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1년 동안 공장을 지었죠.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고, 부족한 돈은 대출을 받았어요. 아내에게는 양해를 구했습니다. 공장을 짓는 동안 생활비를 줄 수 없다고 했죠. 두 아이를 키우며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2008년 주류 제조 면허를 받고 본격적으로 산머루 레드와인을 출시했다. 크라테 브랜드로 드라이, 스위트 2종을 선보였다. 당시는 옹기 항아리에 포도를 으깨어 넣고 발효했다. 100여 개의 옹기에서 발효된 와인을 청와대에도 납품했다.
“2012년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주류박람회에 참가해 와인을 홍보했어요. 와인을 테이스팅한 외국인 소믈리에가 말하더군요. ‘이것은 와인이 아니다. 그냥 주스 와인이다.’ 이유를 물으니 오크통 숙성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길로 옹기 발효를 깨끗이 포기하고 오크통을 사들였다. 처음에는 오크통 사용법을 몰라 그해 와인 전량을 폐기했다. 한 해 농사가 물거품이 된 것. 비싼 수업료를 치렀지만 경험은 실력으로 축적되었다.
현재 수도산 와이너리의 와인은 20개의 오크통에서 평균 2~3년 정도 숙성기간을 거친다.
“산머루는 산도가 높아 오크통에 들어가 산화되면서 와인 밸런스를 맞춰줍니다. 그래서 묵직하면서도 깊은 맛이 나죠.”
크라테 드라이로 와인 챔피언 꿈꿔
와인 선진국들은 보통 와인 메이커가 포도밭을 직접 일군다. 포도를 언제 수확해야 와인 맛이 가장 좋은지 알 수 있어서다. 백 대표 역시 직접 머루 밭을 일구며 해마다 수확 시기 등을 실험하며 와인의 맛을 높이고 있다.
수도산 와이너리에서는 약 1만 8000㎡(약 5500평)의 밭에서 5000주가 넘는 머루가 재배된다. 머루 밭 위에는 포도밭도 있다. 스페인산, 독일산 등 다양한 수입 종 포도들이 자란다. 이런 포도들은 블렌딩 용으로 사용하는 데 품종을 섞어가며 와인을 실험하고 있다.
“와인으로 한 해 1억 원 정도 매출이 발생하지만 여전히 적자입니다. 연간 3억 원 이상 매출이 나와야 어느 정도 운영이 안정된다고 할 수 있죠. 와인만으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어서 지금은 농사도 같이 짓고 있어요.
그렇지만 제 나이 이제 50입니다. 앞으로 10년까지는 실패의 부담보다 성공의 희망에 기대 보렵니다. 내년에는 와인 공장부터 넓혀야 해요. 지금은 연간 5000병 정도 생산하는데 1만 병 정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춰 와인 메이커로서 제대로 승부해보려고요.”
먹고살기 위해 와인 만들기를 시작했지만 와인 메이커가 되어보니 와인으로 뿌리를 깊게 내리고 싶다는 백승현 대표.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세속적인 욕심을 부리면 와인도 날 배신합니다. 땅을 살리고 자연 친화적으로 머루를 재배하며 10년을 공들였더니 이제는 알아서 좋은 열매를 내주더군요. 와인을 만들면서 배운 것이 바로 정직과 정성입니다.”
와인과 와인 메이커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와인이 밸런스를 이루며 묵직하게 숙성되는 것처럼 그 역시 세월과 경험을 통해 와인 메이커로 성숙되고 있다.
기획 문수진 글 김남희 사진 지다영(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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