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전통주로 인생을 빚는 화학과 교수

기사 요약글

동국대 화학과 김영순 교수는 퇴임 후 인생의 전환점에서 술잔을 들었다. 행복과 슬픔을 나누며 술 빚는 즐거움에 푹 빠진 그의 2라운드 인생을 들어봤다.

기사 내용

 

 

화학과 교수에서 전통주 전도사로

 

 

“저는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해요. 시음할 때 숟가락에 두세 방울 정도 올려 살짝 맛만 보는데, 그마저도 얼굴이 빨개진답니다.”

 

동국대학교 화학과 김영순 명예교수는 2011년 퇴임 후 포천의 전통주 작업장에서 술을 빚고 있다. 흔히 술을 만든다고 하면 대단한 애주가를 생각하지만, 김 교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시작은 남편의 장난스러운 핀잔이었다.

 

평소 술을 좋아하는 남편이 “화학을 공부한 사람이 술도 못 만드냐”고 했던 것.

“퇴임하기 10년 전부터 전통주를 담그기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해온 일을 쉬게 되면 달라진 환경 때문에 괜히 우울해지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저는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둬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게 바로 전통주였죠. 퇴임을 하니 되려 기뻤어요. 이제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게 된 거잖아요.”

 

화학을 전공한 까닭에 술의 발효과정을 원리적으로 쉽게 이해했던 김 교수는 전통주를 공부하며 우리 술의 매력에 푹 빠졌다. 김 교수가 말하는 전통주 제조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주재료인 쌀(찹쌀, 멥쌀)을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여러 번 씻고 불려 고두밥을 지은 뒤 햇볕에 말린 누룩과 물을 넣어 발효시키는 것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과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다. 늘 온도계를 들고 다니며 수시로 수온을 재고, 매일 날씨를 확인해 볕이 좋은 날을 골라 누룩을 말린다.

 

“우리 전통주는 단일 효모가 아니라 복합 효모(많은 효소가 포함된)가 기본이에요. 그래서 술을 빚는 지역과 계절, 물맛에 따라 향도 다양하고 맛도 달라지죠. 포천은 아직도 지하수를 사용하는 곳이 있어요. 지하수를 사용하면 일반 생수보다 더 깊은 맛을 낼 수 있지요. 같은 재료를 사용해도 술맛이 다양한 이유입니다. 제조 방법을 달리하고 어떤 환경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이 나는 게 전통주입니다. 그 특별한 매력에 빠졌죠.”

 

 

 

 

배움의 시간도 풍류를 즐기듯

 


지금은 이렇게 술술 술 이야기를 하지만, 김 교수도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전통주가 화학적 변화로 발효되고, 술의 색도 광화학적 빛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실전에서 본연의 맛을 일정하게 내기는 어려웠다.

 

“처음에는 책으로 전통주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읽어도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북촌전통주문화연구원의 남선희 선생을 알게 돼 직접 찾아가 하나하나 과정을 배웠어요. 그렇게 5년을 하니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술맛이 나왔죠. 처음 시작한 게 2000년이니, 벌써 20년이 되었네요. 그때 함께 배웠던 사람들과 ‘기주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데 너무 즐거워요. 전통주로 돈을 많이 벌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그저 즐기는 거죠.”

 

즐기며 시작했지만 노력이 보상해준 성과도 있었다. 술이 만들어준 인연 덕분에 현재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 송파여성문화회관에 나가 전통주 강연도 진행한다.

 

 

 

 

나누고 공유하는 즐거움

 


김 교수는 술을 빚는 사람의 기분과 정성,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눠 마실 때 비로소 술이 완성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자신의 노하우를 많은 사람과 나누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대학 시절 친했던 지인의 소개로 퇴임 후 포천에 자리를 잡은 그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모여 술을 빚으며 소통의 장을 만든다.

 

“저는 전통주를 만들면서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사람들과 함께 즐기면서 노는 시간으로 생각하니까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뭘 만들어도 돈을 받고 파는 상황에서는 자유를 속박당하는 느낌이 들어 답답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함께 작업하는 걸 좋아해요.

 

술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 중에는 미술 재료로도 활용 가능한 것이 많아요. 그래서 전통주를 만드는 일 외에도 민화 그리기나 천연 염색도 함께 하고 있어요. 다 같이 모여서 술도 빚고, 그림도 그리고, 천연 염색도 하다 보면 하루하루가 지루할 틈 없이 흘러가죠. 그렇게 만든 것들을 주변에 선물하기도 하는데, 받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만들고 나누어 마시는 즐거움이 최고의 낙이라고 말하는 김 교수는 자신이 살고 있는 포천 지역의 이름을 딴 전통주 ‘이곡주’ ‘광릉주’ ‘소흘약주’를 직접 개발했다. 도라지, 구기자, 솔잎 등의 약재가 들어간 이 약주에는 지역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교수 시절보다 더 바쁜, 퇴직 후의 행복한 삶

 


전통주 외에도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는 김 교수는 오히려 교수 시절보다 더욱 바쁘게 살고 있다. 그는 퇴직 후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면 은퇴 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는 남편이 퇴임하기 5주 전부터 다양한 일을 경험해보게 했어요. 침 놓는 법도 공부해보고, 사진 찍는 일도 해보는 등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큰 수입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일단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제 남편처럼 회사 생활을 오래 한 분들은 퇴직 후 갑자기 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거든요. 그럴 때 마음이 급하다고 지금껏 자신이 해보지 않은 일에 무작정 뛰어들면 오히려 힘들 수 있어요. 자신이 하던 일이나 전문 분야를 활용해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이 행복한 삶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따뜻한 웃음을 잃지 않은 김 교수는 은퇴 후의 삶에서 큰 행복을 느끼고 있다며 다른 분들도 늘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더불어 그는 은퇴 후의 삶이 꼭 무언가를 향한 도전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당부했다.

 

“저는 퇴임 이후 지금의 삶이 제2의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일을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예전부터 계속된 일상의 연장선인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은퇴 후의 삶이 더욱 빛날 수 있을 거예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획 문수진 곽민선 사진 지다영(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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