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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파리지앵의 자양동살이
올해로 64세인 박혜영 대표는 젊은 시절 서울대학교 음대를 나와 벨기에 브뤼셀 왕립음악원을 졸업하며 정석대로 길을 걸어온 음악 학도였다.
벨기에에서 학위를 받은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입시 수업과 출강을 하며 돈을 벌었고, 틈틈이 개인 연주회를 열며 음악인으로의 만족감을 채웠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한국 음대 졸업생들이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런 삶은 진짜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음악인, 예술가가 아니라는 회의감으로 돌아왔다.
서른이 되던 해, 파리로 떠나 다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벨기에 유학 시절처럼 하루빨리 졸업해 한국으로 돌아가 거창한 연주회를 열거나 돈벌이를 해야겠다는 조급한 마음 대신 진정으로 음악을 즐기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렇게 박 대표는 1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파리 에콜노르말 음악원의 한 스승 밑에서 음악을 배우고, 즐겼다. 그리고 이제는 그곳의 교수가 되어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안식년을 맞아 30년의 파리 생활에 쉼을 찍고 한국을 찾았다. 오자마자 쉴 틈도 없이 인생의 다음 악장을 써 내려갔다. 박 대표는 음악과 다소 거리가 먼 자양동에 <파리 뮤직 포럼 자양스테이션>을 열었다. 실력은 뛰어난데 연주할 무대가 없어 뜨지 못하는 음악인들에게 공연을 하고 관객과 소통할 기회의 장을 열어주기 위해서다.
주위 사람들은 그녀에게 묻는다. 이제 편하게 피아노를 치며 여생을 보내도 되지 않냐고, 왜 안식년에도 쉬지 않느냐고. 그녀의 답은 명료하다. “음악인으로서 늘 생각해오던 거고, 소명처럼 하는 일이에요.”
연주자, 기획자, 그리고 후원자의 삶
“연주자는 관객 앞에서 연주를 직접 해봐야 팬덤이 생기고, 그제야 뜰 수 있어요.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지 못하면 뜰 기회조차 없는 거죠. 사실 파리에서부터 해오던 일이었기에 한국에 돌아와 자양스테이션을 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어요."
박 대표는 2009년 파리에서 한창 교수직에 있을 적 음악 연주자, 이론가, 화가 등 다양한 예술가 친구들을 모아 모두가 꿈꾸는 무대를 직접 열고, 무명 연주자들에게 공연할 기회를 주자는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만든 것이 자양스테이션의 모태인 <파리 뮤직 포럼>.
당시 비교적 넓었던 박 대표의 거실에서 정기적으로 살롱음악회를 열었다. 단순한 연주회가 아니라 그날의 음악과 어울리는 화가, 사진가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기도 하고, 이론가가 음악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전하는 등 클래식을 바탕으로 협동 공연을 진행했다.
그리고 안식년으로 한국에 머무는 동안, 파리 뮤직 포럼의 일환으로 자유롭게 원하는 공연을 열 수 있는 공간인 자양스테이션을 만든 것이다.
나눌 수 있어야 예술
자양스테이션이 대형 연주회장과 다른 차이점은 공연 사이사이 연주자와 관객이 직접 소통한다는 것이다.
무대가 끝난 뒤에는 다과와 와인 등을 함께 즐기며 자연스럽게 관객과 연주자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어울린다. 연주자는 관객의 생각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고, 자신만의 색으로 연주한 곡을 어필할 수 있다. 또 관객 입장에서는 연주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어 새로운 경험이 된다.
뿐만 아니라 박 대표는 한 달에 한 번 '이달의 아티스트 모집'을 통해 보석처럼 숨어있는 연주자를 찾아 소개하고 있다. 한 달간, 매주 선정된 연주자를 위해 공연을 연다. 연주자는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자신을 알릴 기회를 얻고, 관객들은 연주자와 그의 음악을 깊게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음악을 연주하며 관객과 소통하는 것, 그 부분이 공연 전 제가 가장 신경 써서 연주자들에게 설명하는 점이에요. 예술은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나눌 수 있어야 진정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연주를 하고 중간에 대화를 나누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연주에 심취해 있다가 갑자기 현실 세계에 돌아와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죠. 그렇기 때문에 연주 훈련을 엄청나게 하고 충분히 곡을 이해한 사람만이 소화할 수 있어요. 그리고 자양스테이션에서도 이 부분을 이해하고 가능한 연주자들을 찾고요.”
누구나 쉽게 즐기는 클래식
“대중가요, 트롯만 즐기던 사람도 클래식을 듣고 충분히 감동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관객 수준에 맞춘 공연을 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아요. 대중의 수준을 과소평가하는 이야기죠.
동네 주차를 봐주던 아저씨가 어느 날 정장을 빼입고 클래식 연주를 들으러 왔어요. 어떤 날은 이곳 정수기를 담당하는 아주머니가 몰라볼 정도로 예쁘게 꾸미고 오기도 했죠. 남녀노소, 직업 상관없이 누구나 클래식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데, 대형 연주회는 다소 부담스럽고 공연비가 비싸 문턱이 높았을 뿐이에요.”
4050대 중년들부터 흰머리 지긋하게 자란 70대 노인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부터 음악은 처음이라며 쑥스러워하던 동네 주민들까지 자양스테이션을 찾는 관객은 다양하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 이곳 문을 열었을 때, 박 대표는 자양스테이션을 연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기획 임소연 사진 이준형(스튜디오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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