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의 갈등 치유를 위한 뜨개질로 2라운드 시작

기사 요약글

사춘기 아들과의 계속되는 냉전, 전쟁터 같은 집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뜨개질이 이제는 월 수익 100~200만 원의 든든한 수익원이 된 전업주부의 2라운드 이야기.

기사 내용

 

 

아이의 일탈, 남편의 비난으로 흔들린 정체성

 


아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룬 후에는 머릿속이 하얘지고, 가슴이 쿵쾅거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분노가 잦아들면 그저 허탈하고 무기력감에 빠져든다. 중학교 1학년부터 시작된 아이의 사춘기라는 된서리는 고등학생이 되자 절정을 이루었다. 툭하면 지각, 무단결석을 일삼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오토바이 폭주족 흉내까지 냈다.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학교폭력에 연루되어 불려간 적도 몇 번인지 모른다.

 

남편은 바쁘다는 핑계로 모든 걸 내게 미뤘다. 오히려 아이 교육도 제대로 못한다며 책망했다. 남편과 소리 높여 싸우다 보면 왜 이 지경까지 왔는지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아이도 남편도 다 보기 싫고 미웠다. 아이를 잘 키우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이제껏 오직 아내로, 엄마로만 살아왔다. 이런 내게 아이의 일탈 행위와 남편의 비난은 정체성을 흔들 만큼 불안감을 주었고, 나 자신이 전부 부정 당하는 느낌이었다.

 

 

갈등 해결을 위해 전문 코치와 만나다

 


친구에게 하소연하니 코칭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무언가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코치를 소개받았다. 코칭을 받으며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 잘못 살아온 것만 같은 좌절감,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 등 마음 속 응어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눈물까지 쏟고 나니 허탈하면서도 뭔가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지지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코치와 대화를 이어가면서 상황을 바라보는 내 시각도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다.

 

코치의 주문에 따라 머리 속에서 아이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찬찬히 둘러보면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를 떠올렸고, 첫 이유식을 먹었을 때,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엄마’라는 말을 처음 했을 때를 기억해냈다. 그래, 그때는 그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행복했었지. 그런데 지금 내가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코치가 내게 한 질문들에 하나씩 답을 찾아가면서 흐트러진 마음가닥을 조금씩 잡아갔다.

 

 

 

 

우연히 기억해낸 나의 취미

 


코칭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눈에 띈 뜨개공방. 알록달록 실들이 가득한 작은 가게 안에 두어 명이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자 갑자기 울컥하며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오래 되고 유일한 취미가 뜨개질이다. 결혼 전에는 소품은 물론 털 코트까지 직접 떠 입었고, 태교 삼아 임신 중에 완성한 아이의 첫 이불 덮개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아이가 어릴 때만 해도 조끼며 스웨터, 모자, 목도리 등 모두 다 직접 만들어 입혔다.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 속에서 아이는 엄마가 떠 준 모자를 쓰고 활짝 웃고 있다.

 

아이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바늘을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뜨개질 하던 그 평화롭던 시간이 그리웠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뜨개질을 다시 해볼까? 그러면 황폐해진 마음이 조금은 평안해질까? 뜨개질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고 그 길로 나는 털실을 사러 갔다.

 

 

다시 뜨개질을 시작하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생각에 집중을 못하고 코를 빠뜨리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 솜씨가 나오면서 재미가 생겼다. 뜨개질에 몰두하다 보면 놀라울 만큼 마음이 안정되고 차분해졌다. 명상이 따로 없었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아이가 왜 그러는지, 아이의 마음은 어떤지 찬찬히 생각해 보는 계기도 되었다. 내가 안정되니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왔다. 평가하고 다그치고 질책하는 엄마에서 수용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엄마가 되어 갔다. 내가 달라지자 아이도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본격적으로 뜨개질에 몰입하면서 조끼, 스웨터, 모자, 목도리, 가방, 인형 등 다양한 손뜨개 제품들이 쌓여갔다. 남편과 아이에게 주고도 남아 주위 친지들에게 나누었다. 그러자 그냥 받기 미안하다며 답례를 하거나 아예 값을 치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가격을 매기기 어려워 실 값 정도만 받았지만 기분이 좋았다. 첫 수입이었다. 솜씨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지인들 중에 배우고 싶다는 사람도 생겨났다. 못할 것도 없다 싶었다. 집 거실에서 2명의 수강생으로 첫 강습을 시작했다.

 

 

 

 

손 뜨개 제품이 쌓이며 공방을 열다

 


시작은 작고 소박했지만 점점 규모가 커져갔다. 손뜨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의의로 많아 좀 더 많은 강좌를 개설해야 했다. 초보자 입문반, 고급반, 주부반, 직장인을 위한 주말반 등 수강 대상자와 수준에 따라 세분화시켰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4일 이상 강습이 열리고, 수강생도 늘어나 집에서 계속 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공방을 열자니 임대료 등 고정비용과 초도 물량 구입비 등이 부담스러웠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집 거실을 활용했다.

 

수강생들 중에 손뜨개로 돈을 벌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가계에 보탬이 될 뿐 아니라, 취미를 사업으로 확대하고픈 도전의식도 한몫했다. 나 역시 알음알음 지인들에게 몇 개 팔아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상표 붙여 판매한 적은 없었기에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지난해 드디어 집 근처 상가에 자그마한 손뜨개공방을 열었다. 뜨개질을 다시 시작한 지 5년 만이다. 망설이기만 하던 내가 용기를 낸 것은 동업자 덕분이다. 나의 첫 수강생이었던 그녀는 나보다 열 살이나 젊었지만 판단력이나 추진력이 대단했다. 둘이 함께 시작하니 비용 부담도 줄고, 의논 상대가 있어 좋았다. 또 서로 역할이나 시간을 조율할 수 있어 효과적이었다. 나는 주로 강습 위주로 하고, 그녀는 재료 구매와 판매 쪽을 좀 더 전담하고 있다.

 

 

월 수익 100~200만원의 소득이 생기다

 


공방을 열고 보니 좋은 점이 많다. 집보다 접근성이 좋고 분위기도 전문적이라 수강생이 늘었고, 클래스도 훨씬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었다. 예전엔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판매하지 못했던 실, 바늘, 부자재 등 재료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완성품의 재료를 모아 하나로 포장한 패키지 상품도 인기다. 손뜨개 제품들도 공방 내부에 보기 좋게 전시할 수 있어 판매가 잘 되었다. 실제로 수강료와 재료 판매가 수입의 대부분이었다.

 

특히 좋아하는 판로는 지자체나 시민단체, 동아리 등에서 운영하는 오픈 장터다. 제품을 만든 사람들이 직접 가지고 나와 판매하는 오픈 장터는 대부분 주말에 열린다. 축제 같은 분위기라서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다양한 먹거리와 수공예품들이 즐비한 천막 장터, 그 한복판에 내가 만든 손뜨개 소품들을 벌려 놓고 손님을 맞이하다 보면 가슴이 뛰고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젊은 동업자는 SNS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온라인 홍보도 많이 하고 있다. 앞으로 온라인 쇼핑몰도 만들 예정이다. 수입은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임대료 내고, 둘이서 월 100~200만 원쯤 가져갈 수 있다.

 

인생은 때로 계획에 없던 뜻밖의 선물 같은 기회를 주기도 한다. 내게는 뜨개질이 바로 그런 선물이다. 아이와의 갈등 속에 마음을 다스리고자 시작했던 뜨개질이 아이와의 관계도 조금씩 개선시켰고, 평생 주부로 살아 온 내게 ‘손뜨개 공방 운영, 손뜨개 강사’라는 명함을 갖게 했다. 내 인생 2막을 멋지게 열어준 열쇠, 뜨개질. 머리 하얀 할머니가 되더라도 손에서 바늘을 놓지 않을 것이다.

 

 


기획 임소연 김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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