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차 일본인 전업주부의 대한민국 정부 지원 작은도서관 창업기

기사 요약글

2000년 남편과 한일 커플로 결혼해 서울에 살고 있는 하시모토 씨는 중2, 중3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사춘기 자녀를 둔 평범한 엄마는 어떻게 작은도서관의 관장이 됐을까?

기사 내용

 

 

 

아파트 상가에 도서관이 있다고?

 

 

작은도서관 북브리지(Book Bridge)는 서울시 은평구의 한 아파트 상가 2층에 있다. 10평 남짓한 공간 서가에는 수 천 권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다. 일반책도 있지만 대부분 일본어 어린이책이다.

 

이 도서관의 관장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하시모토 아야코 씨(48).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와 열람석을 청소하고 서가를 정리한다. 평범한 주부이던 그녀는 몇 개월 전 이 작은도서관의 관장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TIP. 작은도서관이란?

 

작은도서관은 지역민들에게 지식, 정보와 다양한 문화를 제공해 주는 도서관으로 공공도서관에 비해 규모도 도서관 자료도 적은 편이다. 도서관법 시행령에 따르면 설치 기준은 장서 1000권, 건물 면적 33제곱미터, 열람석 6석 이상.

 

허가도 어렵지 않다. 시, 군, 구청장에게 등록 신고하면 된다. 작은도서관 통합 홈페이지(www.smalllibrary.org)에 들어가면 지역별 운영 상황과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국 17개 시도에 7,388개 소의 작은도서관이 있다. 대부분 접근성이 용이한 생활친화적 소규모 문화공간이며 이곳에서 주로 독서 및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스럽게 지역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다.

 

 

 

 

 

엄마의 육아 고민으로 시작된 책읽기

 

 

결혼 이후 육아에 전념하던 그녀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고민이 생겼다. 이전까지 한국어와 일본어를 함께 사용하며 엄마와 대화하던 아이가 갑자기 한국어로만 말하려고 했다.

 

“두려웠어요. 한국 사람이 한국어 잘하면 좋은 거지 그게 문제가 될까 싶겠지만 저 같이 외국에서 이주한 엄마들에게는 그 순간부터 아이와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국 엄마들이 아이에게 동화책, 그림책을 읽어주며 함께 깔깔깔 웃는 모습이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저도 한국말로 동화책을 읽어줄 수 있지만 그 느낌, 감정을 똑같이 전달해낼 수가 없거든요. 아이와 정서적인 부분을 나누지 못할까 봐 불안했습니다. ”

 

그녀는 한국에 온 지 20년이 넘었고 한국어가 유창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지만 아직도 한국어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1대1로 대화할 때는 별문제가 없는데 다섯, 여섯 명이 모이면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종종 있고 그렇게 대화가 막히기 시작하면 순간 소외감이 밀려온다고 했다.

 

“서로의 마음을 100% 이해하고, '소오소오(맞아맞아)' 하며 공감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어요. 저는 외동딸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 외로움을 많이 느꼈거든요. 그래서 결혼해 아이들과 시끌벅적하게 사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제 고향 오사카는 만담과 웃음의 문화가 발달한 도시인데 개그맨들의 웃음을 아이들과 나누고 함께 웃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늘 가슴속에 있었어요. 엄마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아이와의 애착관계 형성을 위해서 엄마의 모국어로 책을 읽어주는 활동이 아주 큰 역할을 하는 거죠.”

 

하시모토 씨는 일본어 그림책,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으로 아이들과 소통을 시작했다. 친정이 있는 일본에 갈 때마다 보따리장수처럼 무거운 책을 한 트렁크씩 구입해 오곤 했다.

 

그녀에게 책은 소통의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장남감이자 육아 도구였다. 둘째 아이가 연년생으로 태어나자 첫아이의 투정이 심해졌는데 새벽 3~4시에 일어나 TV를 보겠다며 울며 떼를 쓰는 통에 잠을 설칠 정도였다.

 

“놀랐어요. 책을 읽어주고 놀아주면서 불안해하던 모습이 사라졌거든요. 성장 단계별로 책을 추천해 주는 가이드북을 찾아보며 책을 구입했는데 처음에는 100권 정도이던 책이 300권, 400권으로 늘어 작은 가정문고처럼 되더라고요.

일본에는 가정문고 문화가 있어요. 1960년대에 시작된 일종의 독서교육운동인데 가정의 서재를 열어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이죠. 일주일에 한두 번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가정문고를 열어 함께 책도 읽고 놀이도 하고 그래요.”

 

 

 

 

일본 은퇴자들의 보람, 가정문고

 

 

일본에서는 은퇴자들이 제2의 인생으로 가정문고를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동네 아이들을 위해 그림책을 읽어주는 식이다.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한다기보다 스스로 좋아서 가정문고를 여는 것이다.

 

때로는 육아를 하는 가정주부들이 자신의 육아, 독서 교육 경험을 살려 가정문고를 여는 경우도 있다. 지식과 경험을 이웃과 나눈다는 마음으로 운영되다 보니 일본의 가정문고는 마을의 커뮤니티로 오랫동안 유지된다.

 

하시모토 씨는 자신의 육아 경험을 다른 한일커플 엄마들과 나누고 싶었다. 일본의 가정문고는 좋은 벤치마킹 모델이었다. 그 무렵 그녀는 '한국도서관친구들'이라는 모임을 알게 되었다. 이 단체는 도서관을 좋아하는 주민들이 도서관의 운영과 활동을 돕기 위해 만든 자발적인 모임이다. 도서관친구들은 도서관에서 행사가 열릴 때 자원 활동가로서 진행을 도우며 경제적으로 후원을 하기도 한다.

 

“2014년에 일본 국제교류기금에서 책 읽어주는 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이 단체의 사람들을 만났어요. 다문화 도서를 기부하고 싶은데 좋은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너무 반가워 제가 일본식 가정문고를 하려고 계획 중인데 지원해달라고 말씀드렸어요.”

 

도서관친구들은 일본 어린이 책 100권을 기부했다. 그리고 후원금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지원해 줬다. 이렇게 2014년 10월 그녀의 가정문고가 정식으로 오픈했다.

 

처음엔 블로그를 통해 약속을 잡고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 한일 커플 엄마들에게 책을 빌려주었다. 그뿐 아니라 가정문고는 일본 엄마들이 편하게 일본어로 육아, 생활, 정보를 교환하고 나누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친정 엄마 같은 선배 엄마들이 초보 엄마들에게 인생의 조언을 해주고 명절이 찾아오면 아이들과 함께 전통놀이를 하며 일본 풍습을 배우는 이벤트도 열었다.

 

도서관친구들은 이후 5년 동안 책을 기부하고 후원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그녀의 가정문고를 후원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하시모토 씨에게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기가 지나고, 어린이 책이 필요 없게 되었어요. 그림책 2500권, 일반책 2500권 총 5000권이 넘는 책을 가정에서 보관하고 관리하기도 힘들었고요. 그렇다고 가정문고를 닫을 수는 없었어요. 실망할 일본 엄마들과 아이들의 얼굴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어요.”

 

 

 

 

가정문고에서 작은도서관으로

 

 

도서관친구들이 이번에도 큰 힘이 됐다. 이 단체는 하시모토 씨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작은도서관으로 등록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고 지원했다.

 

작은도서관은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자율적으로 등록할 수 있고 아파트 상가 같은 좁은 공간에서도 설립이 가능하다. 또한 작은도서관 운영 상담 서비스를 통해 설립 직후 운영 방안, 장서 구성 및 DB 구축, 서가 배열, 자원봉사 운영 등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정보와 도움을 토대로 그녀는 작은도서관을 열고 마음이 통하는 엄마들과 함께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후원자들도 조금씩 늘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안정적으로 도서관 문을 열고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가정이 아닌 외부에 도서관 공간을 마련하는 게 편리하지요.

문제는 공간 유지비와 운영비예요. 주부가 이런 비용을 자비로 조달하기가 어렵거든요. 다행히 도서관친구들이 우리 도서관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시고, 월 2000원의 개인 후원금을 통해 비용을 조달하고 있어요. 정말 빠듯하게 도서관 살림을 꾸려가야 해요.”

 

 

 

 

가정문고에서 작은도서관으로 자라난 하시모토 씨의 도서관 이름은 Book Bridge. 책이 마음의 징검다리가 되어 한국과 일본, 엄마와 아이, 이웃과 이웃을 이어주고 연결시켜주길 바람는 마음이 녹아 있다.

 

“다들 축하해 주시는데 저는 부담도 되고 책임감이 느껴져 어깨가 좀 무거워요. 가정문고와는 달리 일단 제가 상주해야 하고 자원봉사자들도 필요해요.

일단 매주 화요일, 목요일은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문을 열고요. 금요일은 오후 2시에서 6시까지 문을 열 계획입니다. 토, 일요일에도 한 달에 한 번 문을 열 예정이라 한 달에 절반 정도는 도서관 문을 연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은 일본 엄마들을 대상으로 책을 빌려주고 책 읽는 이벤트를 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한국 분들에게도 일주일에 한번 문을 열고 '일본어 자율 공부방'을 운영해 볼 생각이에요. 일본어 수업은 하지 않지만 일본어나 일본 책에 대한 궁금한 점을 나누는 방식이 될 거예요.”

 

하시모토 씨는 지금까지는 책을 많이 모으는 것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좋은 책에 더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지방에서 일본 엄마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는데 지방에서 요청할 경우에는 택배로 책을 대여하기도 한다.

 

“정말 잘 해보고 싶어요. 가정에서 나와 제가 처음으로 사회에서 시작한 일이니까요. 일본 엄마들이 이 도서관에서 힘을 얻어 고립되지 않고 이 사회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북브리지 도서관이 한국과 일본의 엄마, 아이들이 함께 찾아와 책을 통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거라고 믿어요.”

 

 

기획 안용호 사진 이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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