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4시간 동네 아이들 돌보고 200만원 버는, 스마트 그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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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손주 돌보기도 프로처럼, 보람도 크고 돈도 벌어요!”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오후 3시가 되면 최은옥(64세, 가명) 씨는 “이제 출근시간이네”라며 집을 나설 채비를 한다. 아이들 먹일 간식과 함께 놀아 줄 교구는 이미 챙겨두었다.

시간 맞춰 아파트 입구로 나가면 어린이집, 유치원 통학 버스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맞이해서 집으로 데려오면 그때부터 은옥 씨의 ‘스마트 그래니’ 근무가 시작된다.

5세 아이 두 명, 6세 아이 한 명, 7세 아이 한 명 모두 4명의 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들어오면 우선 화장실로 직행, 손부터 씻기고 간식을 먹인다. 집에서 찐 고구마, 감자, 부침개, 떡, 과일 등 메뉴는 매일 달라진다.

무엇보다 직접 만들어 먹이는 것이 원칙. 과자, 초콜릿 등 단 것만 찾던 아이들이 이제는 고구마, 감자를 더 좋아한다. 간식 먹이고 잠시 쉬고 나면 아이들과의 본격적인 놀이 시간이 시작된다.

오늘 시간표는 보드게임, 동화책 읽기, 그림 그리기다. 선생님은 물론 은옥 씨. 시간표 역시 메뉴처럼 매일매일 다르다. 점토놀이도 하고, 영어동화책도 읽어주고 음악 감상 시간도 갖는다. 날씨 좋은 날에는 단지 내 놀이터에 가서 놀기도 하고, 근처 공원에 산책도 간다. 어린이집 못잖은 프로그램이다.

 

 

이왕이면 제대로 하고 싶었던 황혼육아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6년 전 맞벌이하는 딸이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일하는 여성 대다수가 그렇듯 출산 후 육아 문제가 큰 걱정거리였다. 다행히 아파트 단지 안에 어린이집이 있어 복직 후에는 그곳에 아이를 맡겼지만 아이가 아프거나 출장 등으로 여의치 않은 사정이 생기면 은옥 씨가 번번이 호출되었다.

지방에 있는 시부모에게는 도움을 요청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다 두 살 터울로 둘째 손주까지 태어나자 육아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두 아이를 함께 돌봐줄 육아도우미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은옥 씨가 섣불리 맡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아기를 키워본 지가 하도 오래 전이라 본격적으로 맡기에는 자신도 없었고, 개인 시간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육아도우미를 찾아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도우미 면접을 보는 등 전전긍긍하던 딸과 사위가 찾아왔다. 은옥 씨 눈치를 살피며 ‘엄마가 도와줄 수는 없겠느냐’고 부탁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저려왔다.

은옥 씨 역시 두 아이를 키우느라 직장을 그만두었던 터라 경력 단절의 아쉬움이 늘 남아있었다. 딸만큼은 같은 경험을 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며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살아가길 바랐다.

결국 고민 끝에 두 손주의 육아를 맡기로 결정했다. 그 날, 은옥 씨는 이왕이면 제대로 해보자 생각하며 똑똑한 할머니 ‘스마트 그래니’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지자체 돌봄 교육 강좌 수강

 

우선, 아기를 돌보는 것부터 다시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여기저기 정보를 찾아보니 구청에서 시행하는 손주 돌봄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다. 조부모의 ‘손주 돌보기’를 지원하기 위하여 아동의 성장발달에 대한 이해와 돌봄 과정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익히도록 설계된 과정이었다.

부모에게는 양질의 육아를 제공하고 조부모에게는 경제력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다.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면서 조부모 육아가 늘어나자 지방자치단체와 자치구에서도 올바른 손자녀 양육을 돕기 위한 교육에 적극 나서고 있다.

전문가들은 조부모 육아가 아이 입장에서는 무한 신뢰와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자존감이 커지고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문화를 모두 경험하면서 인성 발달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서울시 서초구는 조부모들에게 손주 돌봄 교육을 제공하고 돌봄 수당까지 지급하는 ‘손주 돌보미’ 교육을 지난 2011년 전국 지자체 최초로 도입했다. 자녀가 서초구에 1년 이상 살고 손자손녀가 2명 이상인 조부모를 대상으로 한다.

조부모가 25시간 교육을 이수하면 손주 수와 부모 맞벌이 여부에 따라 6, 9, 12개월까지 매달 최대 24만원의 ‘돌봄 수당’을 지원받을 수 있다.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돌봄 수당뿐 아니라 최신 육아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영유아 손주와의 대화 및 소통법은 물론 베이비 마사지와 이유식 먹이기, 목욕, 동화 구연 등 실제 육아에 도움이 되는 노하우들을 배울 수 있다.

 

 

무료 어린이 교육 강좌 수강

 

다른 자치구들도 조부모들을 위한 돌봄 교육 확대, 지원에 나서고 있다. 강서구는 2011년부터 조부모교실을 진행 중이다. 광진구, 동대문구도 손주 돌봄 육아교실을 운영 중이며 강동구에서도 격월 단위로 조부모 돌봄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시뿐만 아니라 인천시, 용인시, 안산시, 평택시, 남원시 등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곳이 많다. 각 지자체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자세한 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은옥 씨는 손주 돌봄 교육을 수강하고 본격적으로 두 손주의 육아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먹이고, 씻기고, 돌보는 양육에 치우쳤지만 아이들이 점점 자랄수록 유아교육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작은 아이까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자 자유로운 시간도 생겼다. 은옥 씨는 본격적으로 유아교육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복지회관이나 도서관에서 무료로 시행하는 어린이 독서교육이나 영어동화책 읽기, 종이접기 강좌 등을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두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함께 책을 읽고, 그림도 그리고 음악 감상도 했다. 점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물론 딸과 사위도 정말 좋아했다.

 

 

단지 내 맞벌이 부부들의 구세주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 분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손주들 또래의 다른 아이를 함께 돌봐줄 수는 없느냐는 것이다. 그 집에도 둘째 손주와 동갑인 아이가 있어 가끔 인사를 나누던 터였다.

어린이집에서 하원 후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데리고 있으면서 손주들과 같이 먹이고, 놀게 하면 되는 거였다. 은옥 씨는 둘보다 여러 명이 함께하면 프로그램도 더 다양하게 진행할 수 있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입이 생기는 것도 너무 매력적이었다.

아예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모아보기로 했다. 물론 혼자 하는 것이므로 너무 많아서도 안 되지만 대여섯 명까지는 충분히 맡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파트 현관 입구와 엘리베이터 안 게시판에 안내문을 붙이자 문의 전화가 속속 걸려왔다. 모두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이었다. 그만큼 일하는 엄마들의 아이 돌봄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은옥 씨는 다섯 살 아이 한 명과 여섯 살 아이 한 명을 맡았다. 아이 엄마들은 할머니 집처럼 편하게 쉬고 먹고 놀고 공부까지 할 수 있는 은옥 씨의 돌봄에 만족해했다. 어린이집에서도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맡아주지만 그래도 집보다 더 편할 수는 없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아이들이 돌아오는 오후 3시 경부터 7시까지가 은옥 씨의 근무시간이다. 경우에 따라 부모의 퇴근이 늦어지면 더 데리고 있다가 저녁까지 챙겨주기도 한다. 한 아이당 한 달에 50만원 정도씩 받아  월 수입은 200만원 정도. 간식재료는 엄마들이 가져다주는 경우도 많다.

근무 조건도 좋다. 아침부터 3시까지는 시간이 자유로우므로 친구들과의 점심 약속이나 개인적인 볼일도 충분히 볼 수 있어 불편함은 없다. 손주들을 돌보는 할머니의 마음이므로 아이 부모들도 모두 자식 같이 느껴진다.

은옥 씨는 일하는 자녀 세대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도와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보람을 느낀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해볼 생각이다.

 

 

기획 임소연 김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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