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성균관대학교로 가는 길에 있는 한국극작가협회. 김화영이 무대에 오르기 전 연습하는 공간이다. 원래 그녀가 연극 연습실로 사용하던 공간을 어려운 환경에서도 연극의 길을 걷고 있는 극작가들을 위해 내놓았다. 이날 김화영은 <감옥에 가기로한 메르타 할머니>의 공연을 앞두고 동료 배우들과 연습에 한창이었다.
이 작품은 <전성기> 2018년 12월호에 인터뷰했던 스웨덴 작가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의 소설이 원작이다. 요양원에 사는 79세 메르타 할머니가 요양원보다 환경이 더 좋아보이는 교도소에 갈 목적으로 요양원 친구들과 5인조 노인 강도단을 만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카타리나는 한국에서 자신의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는 후문이다. 3년 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김화영도 기대되긴 마찬가지. 배우를 떠나 한 개인으로서도 노년의 삶을 유쾌하게 그린 이 작품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10년 뒤 메르타 할머니의 나이가 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공감대가 컸다.
어느 부분에서 공감되던가요?
요양원은 아니지만, 미국에 사는 언니도 시니어 전용 아파트에 계셔서 그 아파트의 분위기를 잘 알아요. 스웨덴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노인들이 겪는 어려움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나이가 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잖아요. 그런데 평균 나이 79세의 5인조 강도단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지요. 그것도 재미있고 유쾌하게 말이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한국화 시켜보면 재미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원작자가 지난 해 한국에 왔을 때 잠깐 만났는데 스웨덴에서도 시도하지 못한 연극을 한국에서 시도하는 걸 무척 기뻐하더라고요.
배우란 선택받는 직업이잖아요. 사실 나이가 들수록 선택받을 여지도 줄어드는데 매년 한 두편 씩 연극 공연을 합니다. 나이 듦을 이기는 선생만의 노력이 있나요?
누구나 본의 아닌 쉼이 있지요. 선택받는 직업에 있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고요. 그 기간이 오래걸리더라도 제 스스로는 충돌질을 멈추지 않았어요. 딸을 키울 땐 딸이 배우로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느라 자발적 공백을 가졌는데, 그때도 비록 무대는 아니지만 삶을 연기하듯 살았지요.
가령 앞으로 내게 주어질 역할은 아내, 엄마, 며느리 역할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집에서의 역할을 연극에서 내가 맡은 배역처럼 받아들이며 산 겁니다. 또 집에서 맡은 배역을 잘 소화하고 있나 늘 들여다봤고요.
연극무대에 서지 않았을 뿐 인생의 무대에서 끊임없이 나를 탐구하며 분석했다는 거네요.
저는 연극의 재료잖아요. 내 재료를 스스로 가동시켜보고 윤이 나게 닦는 훈련을 평소 삶에서 하려고 노력한 겁니다. 그렇다고 특별하지 않아요. 단지 나이가 들어도 좋은 습관을 가지려고, 유지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지요.
지니고 있는 습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습관이 있다면?
조금씩 자주 먹어요. 남들이 세 끼 먹을 때 저는 간장 종지 크기의 작은 밥그릇에 다섯 끼, 여섯 끼를 먹습니다. 이 습관이 비만하지 않은 비결이에요. 그리고 아이들 키울 때 못해낼 숙제는 절대 주지 않았는데, 그점은 저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해낼 수 있는 일에 도전했지, 하지 못할 일은 아예 도전하지 않았지요. 저는 성공이 성공의 어머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작은 것이라도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있어야 자신감이 생긴다고 봅니다.
나를 위한 시간에는 주로 뭘 하나요?
뜨개질을 합니다. 화초 가꿔요. 한시도 가만히 있는 성격이 못돼 손으로 뭔가를 하고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요. 일상에서 스스로를 잘 위로합니다. 특별한 건 없어요. 쇼핑을 나가서 위로해주고, 좋은 걸 먹으면서 다독거려주는 것이지요.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내 삶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충동질, 펌프질이라고 편안해요. 이건 취미활동이라고 할 수 있고 저는 생각해요. 내 삶은 내가 연출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일을 하더라도 누굴 위해서 하는 게 없어요. 집에서 손님을 치르더라도 힘든 것이 아니라 그냥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요.
삶의 태도가 긍정적이네요.
사실 어느 때는 내가 좀 너무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긍정적이에요. 삶은 놀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이왕이면 재미있게 놀면서 살자는 것이지요. 충동질이 별개 있나요?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이지요. 나이가 들면 어때요? 노후도 신나게 살 수 있어요. 50~60대면 앞으로 30~40년은 더 놀아야 하잖아요. 저는 요즘엔 70대에는 무슨 놀이가 있을까? 탐구해요.
그럼, 50~60대에는 뭘 하며 놀았나요?
혼자 놀기보다 여럿이 놀았지요. 제가 후배들이랑 잘 돌아다는데 보통 4~5명이 함께 움직이지요. 가령 갑자기 춘천으로 가 닭갈비 먹고 찜질방 가는 식이지요. 저에겐 친구들과 떠나는 소풍이에요. 가족 소풍도 자주 갑니다.
자식들이 다들 외국에 있고 바쁘게 살지만, 1년에 한 번은 꼭 소풍갑니다. 한국이든 외국이든 어느 한 장소를 정해 모이라고 하지요. 함께 먹고 자고 하는 게 전부지만, 소풍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더 나이가 들어도 친구들과 가족들과 신나게 놀면서 지낼 것 같아요.
나 자신의 즐거움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군요.
부모로서 자식들을 무척 아끼지만, 저는 저 자신을 가장 사랑해요. 내가 즐길 수 있는 꺼리를 계속 찾아서 놀겁니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있나요?
확실히 많이 비우게 돼요. 옛날엔 욕심인지도 모르는 욕심들이 참 많았는데 그걸 하나씩 내려놓게 되더라고요. 비울 건 빨리 비우고 포기할 껀 빨리 포기하니까 삶이 편안해지고 단순해지더라고요. 배우로 사는 딸 두나도 예전에는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이제는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생각하니 여유가 생겨요.
최근 생활연극을 하는 중년들이 많이 늘었는데 연극이 인생에 어떤 도움을 주나요?
최근 연극계에선 일반인들이 하는 연극들이 요즘 인기예요. 어른들의 학예회라고 할까요. 어른들이 중년 극단을 많이 만들면 좋겠어요. 어르신들이 노인 극단을 많이 만들어서 동네에서 우리 연극배우들 알바도 시켜주실 겸 연출들 불러서 노인정마다 학예회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옛날에는 젊은 자식들이 부모에게 학예회를 보여주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부모가 배워서 공연해 자식들이 관객으로 오는 일이 많아요. 이분들에게 학예회 공간을 제공하고 싶어요. 춘천에 사는 화가 친구가 최근 영화방을 만들었어요. 여기까지 보면 학예회랑 거의 일맥 상통하는 것이지요 .어른들의 건강한 놀이터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싶어요.
인생이란 무대에서 나에게 하는 주문이 있다면?
종교적인 부분도 있지만, ‘감사하다’라는 말이에요. 살면서 나쁜 일이 있을 때도 제 좌우명은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이제는 완전 습관이 됐는데, 남들이 고달프고 힘들고 화를 낼 때쯤 ‘웃자’ ‘웃기자’고 주문을 걸어요. 그래서 어떤 때는 굉장히 수다스러워지는 경우가 있어요. 분위기가 저하되는 걸 못 견디거든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계획하고 있나요?
놀면서 학예회 하면서 지낼 것 같아요. 무대에는 저를 불러줄 때까지 나가겠지만 그게 보장되는 건 아니니까요. 두려워하면서까지 연극을 하고 싶진않고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그 이후엔 우리끼리 학예회 하려고요. 꼭 프로 무대만이 제 무대가 아니고 그냥 동료들이랑 놀면서 즐기려고요.
노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놀이에 익숙하고 유머에 익숙한 사람이 삶을 긍정적으로 재미있게 살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중년 이후엔 더 잘 놀아야 하지 않을까요?
기획 이인철 최영선 사진 박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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