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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워싱턴 D.C에 위치한 한 노인복지센터를 방문한 영부인 김정숙 여사. 치매미술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해 파랑새 그림을 그리자 그 옆에 있던 한 노인이 그림을 보고 “도버해협을 건너는 파랑새 같다”며 “해군에서 근무하던 때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실제 해군이었던 그는 치매로 인해 기억 상실을 앓고 있지만 그림을 보며 옛 시절을 떠올린 것이다.
미국의 치매 노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아이오나시니어서비스는 치매 환자들이 현재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잃지 않도록 지원하고, 즐거운 기억을 이끌어내는 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특히 미술을 통한 치료가 효과적이라고 밝혔다.
미술이 치매 예방 및 완화에 좋다는 건 해외 전문가를 통해서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학교 치매센터(UCSF Dementia Center)의 브루스 엘 밀러(Bruce L. Miller) 교수는 치매 노인의 그림은 병에 걸리기 전의 삶에서 나오는 것으로, 단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릴지라도 시각적 기억은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또 그들 대부분은 전에 미술 공부를 하지 않았던 환자로, 놀랄 정도의 창의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증상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미국 알츠하이머 협회(Alzheimer 's Association)의 루스 드류(Ruth Drew)는 미술을 포함한 예술 활동이 치매 환자에게 지금보다 더 좋은 날(good moments, good hours and good days)을 사는데 도움이 되며 예술 활동을 할 때 불안감이나 우울증이 완화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치매 환자들의 미술 활동이 그리 활성화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치매미술치료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1991년 치매미술치료협회를 설립한 이후 지금까지 치매미술치료를 알리며 수많은 치매 노인들을 돌봐온 신현옥 협회장에게 그림 그리기 효과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뇌를 자극해 치매 예방을 돕는다고 말하기에는 그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Q. 미술치료라는 말이 아니라 감성교육이라고 하시네요?
치매 노인에게 미술은 감성을 살려주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학회 등에서 미술치료를 ‘회상요법’이라고도 하는데, 중증 치매 노인에게 첫사랑을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얼굴에 미소가 번져요.
힘들었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좋은 추억으로 남듯이 첫사랑 때 속앓이를 하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치매 노인에게나 건강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의미죠. 그래서 저는 치매미술치료가 사라지고 있는 기억과 그에 얽힌 감성을 다시 선명하게 해주는 감성교육이라고 생각해요.
Q. 그림으로 증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증상이 심한 분들은 손에 힘이 없고,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크레파스를 잡고 손을 스케치북까지 옮기는 것부터 치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절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손이 스케치북까지 오면 주제를 하나씩 드리고 떠오르는 걸 그리게 하는데, 아무리 치매 증상이 심한 사람이라도 6개월 정도 꾸준히 하면 그림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처음 그림이 점, 선, 면이었다면 6개월 후 그림은 구체화되어 있는 거죠.
Q.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크레파스를 쓰는 이유가 있나요?
크레파스는 일단 저렴해서 부담이 없고 무독성이라 입에 넣어도 괜찮습니다. 무엇보다 손끝에 힘을 실을 수 있는 점이 좋아요. 크레파스가 손에 익으면 길이가 점점 짧아지는데 그걸 보면서 손끝의 힘을 조절할 수 있게 되거든요. 치매 노인들에게 크레파스만큼 좋은 도구가 없어요.
Q. 치매 노인을 둔 가정에서 해볼 수 있게, 그림 그리기 팁을 알려주세요.
먼저 크레파스를 쥐고 동그라미를 그리게 해보세요. 원을 그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그릴 수 있습니다. 원에는 꽃, 과일, 조형물 등이 다 들어 있거든요.
원을 잘 그릴 수 있게 되면 무지개를 그려보는 겁니다. 무지개 그림을 보면 색에 대해 인지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지요. 그리고 반복해서 그리다 보면 어린 시절 무지개를 봤던 풍경이나 당시의 계절까지 떠올리면서 그림이 구체화되는 것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림이 구체화되면 그 당시의 감성이 살아나 표정까지 밝아져요. 재미있는 건 무지개를 그리고 난 다음에 자연에 대한 주제를 주면 대부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기억에 따라 그림을 그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동그라미도 그리지 못했던 중증 치매 노인이 1년 지나 그린 작품을 보면 경이로운 수준이에요. 더 이상 중증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죠. 중증을 경증으로 만들 수 있는 치료는 미술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꾸준히 그리다 보면 반드시 좋아집니다.
어떻게 시작할까?
매일 하루 1시간씩 그림을 그리면 치매 증상이 완화된다. 가족이 꾸준히 관심과 사랑을 갖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6개월 정도 지나면 그림의 변화를 알 수 있고 그림을 통해 소통도 가능하다.
Step 1 동그라미를 그리게 한다. 동그라미 같은 곡선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
Step 2 동그라미를 잘 그리게 되면 무지개를 주제로 준다. 무지개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린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좋은 매개체다. 또 무지개의 색을 인지하다 보면 더 이상 시력이 나빠지지 않는 효과도 볼 수 있다.
Step 3 이후 계절이나 자연을 주제로 다양한 그림을 그려보게 한다. 현대화가 되기 전 어린시절시골에 살았던 노인들은 자연을 주제로 주면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Step 4 첫사랑 같은 추상적인 주제를 던져본다. 어떤 사람은 이성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학교를 그린다. 나이가 들었어도, 치매를 앓고 있어도 이성에 대한 주제는 중요하다. 이성과의 추억은 평생의 감성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림을 통해 그 사람의 어린시절과 또래 문화, 취향까지 알 수 있다.
기획 서희라 사진 이연재 자료 제공 치매미술치료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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