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내용
김갑철 씨의 인생 그래프
1999년 희망퇴직 후 양계 사업 시작, 조류독감으로 빚더미에 오름
2000년 맨손으로 할 일 찾다 찐빵가게 창업
2012년 오색찐빵 개발하며 승승장구하던 차에 경쟁업체 늘면서 생존 위협
2013년 적극적인 SNS 마케팅+각종 MOU로 위기 돌파
2019년 세 자녀와 함께 연 매출 9억 원대의 대박 신화 쓰는 중
#폭망의 기억
뽕잎, 복분자, 민들레 등 부안의 지역농산물을 활용해 오색 찐빵을 만들어 대박을 터뜨린 김갑철 씨. ‘컴맹’이지만 직접 SNS 마케팅에 뛰어들어 국내 시장을 잡았고, 지자체나 대학 등과 협력해 해외 수출까지 일궈내 현재 연 매출 9억 원의 대박 신화를 쓰고 있다.
지금은 스마트한 소상공인의 모범 케이스로 통하지만, 43세에 희망퇴직해 퇴직금을 털어 차렸던 양계장을 조류독감으로 하루아침에 7천만 원의 빚을 진 채 사업을 접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던 그다. 부부는 어떻게 재기할 수 있었을까? 그의 인생 역전사.
‘슬지네 찐빵’이 연 매출 9억을 달성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희 세 아이들이 열심히 뛰어준 덕분이죠. 몇 년 전 함께 가게를 꾸리던 아내의 건강에 ‘빨간 불’이 켜지면서 둘째가 잠깐 돕겠다고 (가게가 있는) 부안에 내려왔다가 그대로 눌러앉게 됐어요.
그 밑으로 동생 둘이 합류하면서 지금은 삼 남매가 운영을 돕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가 이렇게 서울로 공부(그는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외식산업 고위자 과정을 수료 중이다)를 하러 다니죠.
녀석들이 개발한 구운 찐빵, 생크림 찐빵 등이 제가 개발한 오색 찐빵만큼이나 인기가 많습니다. 가게가 외진 곳에 있는데도 멀리서부터 일부러 찾아와 주시는 손님들이 계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2000년에 가게를 열 당시만 해도 이런 성공을 예상하긴 어려웠겠죠?
그럼요. 그때는 성공보다 ‘생존’이 절실했던 시기였으니까요. 제가 40대 초반, 그러니까 1998년에 15년간 근무하던 한국도로공사에서 희망퇴직을 했습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보면 요금 징수하시는 분들 있죠. 제가 그런 일을 했는데 당시 IMF와 맞물려 인원 감축 얘기가 도는 상황이었어요. 하이패스 단말기 도입처럼 사람이 하던 일을 자동화, 기계화하려는 시기였기 때문에 지금 조금 더 버티는 게 능사가 아닐 것 같았죠.
차라리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다른 길’을 도모하자는 생각으로 회사를 나와 시작했던 게 양계장이었습니다. 듣자 하니 수입도 괜찮고, 다른 가축에 비해 좀 더 수월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퇴직금 5천만 원에 이래저래 모아둔 돈 5천~6천만 원쯤을 더해 1억 원 좀 넘는 비용을 들여 양계장을 차렸습니다. 처음 1년은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10만 마리 규모로 운영하는데다 대기업이라는 든든한 거래처가 있어서 월 500만 원쯤은 거뜬했죠.
그런데 왜 양계장을 그만두셨나요?
사는 게 참 호락호락하지 않더라고요. ‘이 정도면 할만하네’ ‘괜찮네’ 하던 순간 조류독감이 돌았어요. 보통 닭이 35일 정도 크면 출하를 하는데, 33일째 밤에 다 죽더라고요. 사료를 있는 대로 먹여 키운 녀석들인데 얼마나 허무해요. 하얀 닭들이 떼죽음을 당해 누워 있는데 꼭 눈밭에 서 있는 것 같았죠.
인생의 절망이 이런 거구나 싶어서 아내와 함께 닭똥 같은 눈물만 흘렸어요.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이지만, 돌이켜 보면 망한 게 또 당연했어요. 사실 양계장을 시작할 때 내가 양계장을 하면 즐거울까, 평생 가져갈 수 있는 직업인가, 사업의 리스크는 무엇일까를 고민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양계장에 조류독감이 돌아도 지금처럼 뉴스에 크게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위험 부담을 크게 생각한 적도, 또 그에 대한 대비를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없었지요. 결국 투자금은커녕, 빚을 7천만 원씩이나 지고 몸만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다 ‘찐빵’을 만나게 됐군요.
그렇죠. 큰 애부터 막내까지 애들이 넷이나 되는데 다 같이 손 빨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뭐라도 할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심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예전에 종종 간식으로 사 먹던 찐빵을 떠올리게 된 거예요.
‘가격도 싸고 포만감도 들면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먹거리’로 이만한 게 없더라고요. ‘저거다’ 싶어서 옛날에 단골처럼 드나들던 가게에 찾아가 우리 같은 사람도 기술을 배울 수 있냐고 물었죠. 체인점을 낸다는 조건하에 가능은 한데, 문제는 저희가 돈이 없다는 거였죠(웃음).
결국 집사람과 차 한 대로 전국을 돌며, ‘찐빵깨나 찐다’는 집을 돌아다니며 ‘몸으로 부딪히는 공부’를 하기로 했어요. 차마 주인한테 물어볼 용기는 없고, 찐빵을 나눠 먹으며 이 집 빵은 어떻고, 앙금의 특징은 뭐고 하는 갑론을박을 한 거죠. 지나고 보니 그게 다 공부이긴 했더라고요(웃음). 배웠으니 이제 실행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나고 자라,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전북 ‘부안’에 다시 자리를 잡고 좌충우돌했습니다. 반죽 비율을 어떻게 해야 빵이 더 쫄깃한지, 팥은 어떻게 삶아야 더 고소한지 연구하느라 애 엄마랑 새벽 별 보고 일어나 저녁 달 보고 들어가기 일쑤였지만 앞날에 대한 희망 때문인지 버틸만했어요.
작은 읍내에 찐빵 가게가 들어선 걸 보고 오며 가며 손님들이 들어왔지만, 개발 중인 상품을 판매할 순 없어서 그냥 나눠드리고 말았던 기억도 나네요. 그렇게 조금씩 실력을 쌓다 보니 ‘이제 돈 받고 팔아도 되겠다’는 반응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아버지 명의로 마을 금고에서 1천만 원 대출받아 둘째 딸 이름인 ‘슬지’가 들어간 간판을 달고 본격적인 장사를 시작하게 됐죠. 자식 이름까지 걸 만큼 진정성을 담아 찐빵을 만들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슬지네 찐빵만의 차별성은 뭐였어요?
우리 농산물로 찐빵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슬지네 찐빵만의 차별성이 생겼죠. 사실 가게를 연 지 3년쯤 되던 해에 부안에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저를 비롯해 지역 주민들이 모두 반대 시위에 나섰죠.
제가 환경에 대해 이렇다 할 만한 식견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청소도 하고 주민들과 환경에 대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건강을 지키는 데 안전한 먹거리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농산물로만 한번 찐빵을 만들어보자는 계획을 세웠어요. 물론 그 과정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죠. 저희 집 찐빵은 우리 밀을 쓰는데 글루텐 성분이 적어 빵 특유의 쫄깃함을 살리기가 참 어려운 재료예요. 이걸 보완하려고 각종 효소를 만들기 시작한지라 한때는 산과 들로 효소의 재료가 될 만한 식재료를 찾아 나서는 게 일이었죠.
그때는 형편이 어려워 어디로 변변한 여행 한 번을 못 가본 터라 민들레며 쑥을 캐러 다니는 동안 집사람에게 ‘이게 다 여행 아니냐’는 머쓱한 농담도 참 많이 했어요(웃음).
빵에 들어가는 막걸리도 마찬가지예요. 발효 교육을 들은 이후로는 직접 항아리를 소독하고 고두밥을 지어 막걸리를 빚었죠. 그런 고집으로 개발한 게 바로 5가지 색을 낸 오색 찐빵이에요.
100% 우리 밀을 쓰거니와 팥 역시 지역 내에서 수매하죠. 여기에 부안 특산품인 오디 뽕잎, 복분자, 흑미, 민들레 등을 섞어 예쁜 색을 내 그야말로 보기에도 좋고, 맛과 영양까지 좋은 찐빵을 만들어 냈어요.
내 손끝에서 누구나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먹거리가 탄생한다는 자부심도 있지만, 지역 특산물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지역 경제에 도움을 준다는 뿌듯함도 있죠. 재료가 좋으니 맛은 기본이고요.
솥 안에 두고 계속 스팀으로 찐빵을 찌면 손님들에게 바로바로 꺼내 드리기엔 좋지만 밥솥에 오래 들어가 있던 밥처럼 맛이 떨어져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주문과 동시에 쪄내는 바람에 성격 급한(?) 손님들은 돌아가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죠(웃음).
그런 노력으로 해외 수출까지 이뤄내다니 대단하네요.
2012년에 오색찐빵으로 특허를 받고, 소상공인진흥원 비법 전수 전문가로 선정되기도 했죠. 2013년에는 국가통합인증 마크인 KC 한국환경영향평가인증원에서 인증하는 ‘명품’‘명인’(우리밀 찐빵기술)인증도 받았고요.
홈쇼핑에 진출하는 한편 전북대학, 기관 등과 연계해 일본으로 찐빵을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고부가가치 가공기술개발 공모사업에 선정된 덕이 컸죠. 전주 기전대학 및 참뽕연구소와의 공동연구를 진행하면서 일본으로 수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이 계기를 통해 일본을 넘어 영국 등의 해외 수출 길도 열렸죠.
자전거가 계속 달리려면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하듯 장사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지금 잘 된다 해도 언제 어떻게 손님이 끊길지 모르기 때문에 늘 안주하지 않고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이 필요했어요. 예를 들어 전북대학교에서 진행하는 지역 연고 산업 육성 사업에 지원해 저희 집만의 로고, 전용 박스 등을 개발하는가 하면, 상표등록을 하며 가게의 체계를 잡아 나갔죠.
또 2016년 전북농업기술원에서 주최한 농식품 가공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해 받은 상금 1억원으로 팥 앙금 가공 시설을 세우기도 했어요. 사실 찐빵은 여름엔 매출이 잘 오르지 않는데 팥 앙금만을 따로 판매하면서 대기업 등의 거래처가 생겼고, 그 덕분에 안정적인 수익원이 생겼죠.
사업 중에 ‘고비’는 없었나요?
있었고말고요. 저희 가게가 전북 부안의 읍내에서부터 출발했는데, 찐빵이 유명세를 치르면서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꽤 있었어요. 유동인구가 늘어서 그랬는지 어느 날부터 인근에 프랜차이즈 빵집, 피자 가게를 차리는 사람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런데 부안의 인구가 약 5만 명으로 ‘시장’이 뻔해요. 소비자는 정해져 있는데, 가게만 늘어나는 꼴이 되니까 확실히 매출에 타격이 오더라고요.
뭔가 적극적인 액션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던 그 즈음, 우연히 SNS에 관한 교육을 받게 됐죠. 농업기술센터 e-비즈니스 교육과 오픈마켓 창업반을 다니며 SNS가 무엇인지, 유익하게 쓸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배웠지요.
농사를 짓든, 작은 가게를 하든 누구든 SNS로 적극적인 자기 PR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됐더라고요. 블로그, 페이스북 등 SNS 채널을 활용해 자신의 커리어를 알리고 이와 관계된 인맥들을 만들 수 있다니 신세계가 따로 없었어요.
가게 일이 아무리 바빠도 화장실 가는 잠깐, 또 가게 문 닫고 몇 시간씩 일부러 시간을 들여 제 계정에 사진과 글을 올렸는데, 처음엔 이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 의문도 많이 들었어요. 원래 9시에 가게 문을 닫고 집 사람과 배드민턴 치러 가는 게 삶의 즐거움이었거든요. 그런데 SNS를 시작하면서 운동 대신 ‘포스팅’을 하게 됐으니 저로서는 기회비용이 늘어난 셈이잖아요.
집 사람은 당장 그만두라고 성화였지만, 오기가 생겨서 끝까지 한번 밀고 나가봤어요. 그렇다고 대단한 내용을 글로 남긴 건 아니었어요. 예컨대 ‘나는 부안에서 찐빵을 파는 사장인데, 오늘은 새로운 맛을 내기 위해 솔잎으로 빵을 쪘다가 빵이 푹 주저앉는 바람에 실패했다, 내일은 들깻잎으로 쪄 봐야지’ 같은 소소한 일상의 기록 같은 것들이었죠.
그런데 한 6개월쯤 지나니까 SNS의 힘이 느껴지더라고요. SNS에서 봤다며 찾아오시는 손님은 기본이었고, 가게 매출의 70%가 ‘택배 판매’에서 이뤄질 만큼 SNS를 통한 온라인 주문이 늘어났어요. 더 놀라운 점은 SNS 상에서 맺은 ‘인맥’들이 어마어마한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었죠.
페친(페이스북 친구)이었던 한 식당 사장님은 후식으로 제공하겠다며 일주일에 몇 천 개씩 저희 찐빵을 주문했고, 영국에 사는 또 다른 ‘페친’은 런던의 한 마트에서 구매했다며 ‘슬지네 찐빵 인증샷’을 올려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주기도 했어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SNS상의 인맥들과 이런 짜릿한 일을 도모할 수 있다니 정말 놀랍잖아요. ‘컴맹’으로 시작해 쇼핑몰에 찐빵을 입점시키고, 페이스북으로 가게를 홍보해가는 게 쉽진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어느 순간 도태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업을 하며 느낀 점 중 가장 선명하게 와닿는 게 뭔가요?
나 혼자 잘해서는 안 된다(웃음).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해도 ‘성공’을 하는 건 일부잖아요. 아주 결정적인 ‘한방’, ‘물꼬’를 틔워주는 건 결국 타인이더라고요.
사업을 하며 정말 소중한 인연들을 맺게 마련인데, 2007년에 <고향사람들>이란 프로를 통해 저희 가게를 알려주셨던 PD님이 꼭 그런 사람이에요. 지인을 통해 들었다며 연락을 하셔서는 며칠간 가게에 머물며 저희 얘기를 담아 주셨어요.
방송이 나가자 진짜 상상을 초월하는 연락이 쏟아졌는데 찐빵에 대한 관심도 관심이지만, 인생의 바닥을 찍고 다시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보고 감동하셨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시련 속에서도 다시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이 제일 기억에 남는데, 저희의 스토리를 잘 부각시켜 주신 PD님의 공이 컸죠. 그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30회 이상 TV 출연을 더 하게 됐어요.
아직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제가 지난해 소상공인대회에서 모범소상공인 부문 철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너무 큰 상을 주신 터라 아직도 감개무량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밑바닥부터 시작한 저 같은 사람도 이렇게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군가에게 희망으로 비치지 않을까 싶었죠.
둘째 딸도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씩 부산의 대학생들에게 창업 강의를 하러 다니고 있지요. 힘들지만 그 아이 역시 ‘시골에서도 얼마든 청년의 큰 꿈을 펼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더군요. 열심히 노력해 성장함으로써 낙심한 누군가에게 일말의 희망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기획 장혜정 사진 지다영(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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