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세에 첫 런웨이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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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깨달은 인생의 진리

 

정선경 씨는 쨍하게 떨어지는 스튜디오 조명 아래서 좀처럼 주저함이 없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이제 막 데뷔 1년 차에 접어든 ‘새내기 모델’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이래 봬도 모델 아카데미에 가면 제법 어린 편이에요(웃음)” 하며 화사하게 웃는다.

모델 활동을 하기 전 그녀는 평범한 주부였다. 20대 때 의류 무역회사에 다닌 적이 있지만, 서른 살에 결혼한 뒤로는 줄곧 집에서 남편을 내조했다. 그렇게 누군가의 아내, 엄마로서 살기를 20여 년. 누가 봐도 부족할 것 없던 그녀의 삶은 50대 초반 유방암 진단을 받으면서 크게 흔들렸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가 3기 말이었어요. 신촌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그 얘기를 처음 듣고 병원을 나서는데, 그 순간 차창밖으로 보이던 풍경이 지금도 잊히질 않아요. 파란 하늘과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빛, 살랑 부는 바람, 그 아래를 무리 지어 걸어가는 대학생들….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풍경인데, 그날따라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동시에 내가 가졌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더라고요.”

 

그 후 그녀는 여덟 번의 항암 치료와 서른세 번의 방사선 치료, 그리고 여러 차례 암세포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로 인해 호르몬 조절약을 평생 먹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부작용도 만만찮았다. 호르몬 억제제의 부작용으로 퇴행성 류머티즘과 근육통이 날로 심해져 지금은 간단한 주방 도구조차 쥐는 것이 쉽지 않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는 말이 맞나 봐요. 그 와중에 남편도 전립샘암에 걸려 2년 정도 투병하다가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평생 내 곁에 있을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가버리니까 참 많이 힘들었어요. 어느 때는 좀 억울한 생각도 들었죠. 남편은 럭비, 마라톤 등 못하는 운동이 없을 만큼 운동광이었고, 저도 30대 중반에 사산을 겪으면서 망가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운동을 시작해서 거의 20년 가까이 운동을 했거든요. 그런데 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더라고요. 남편이 떠났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실감하지 못하다가, 결국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라는 걸 차츰 깨닫기 시작했어요. 없다는 사실에만 집중해서 슬퍼하기보다는 그와 함께여서 좋았던 추억들을 계속 떠올리고, 추억하다 보니 죽음 자체를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남편과의 사별 후, 하나뿐인 딸은 계획대로 영국 유학을 떠났다. 텅 빈 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고 나서야 그녀는 이제 기댈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리고 삶은 그 길 위에 선 자신이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나이 오십이 훌쩍 넘어서야 몸소 느꼈다.

 

 

위기 속에 찾아온 기회

 

그녀는 더 절실하게 남은 인생을 고민해야 했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모델’ 일을 제안한 사람은 다름 아닌 딸이었다.

 

“전에는 모델은 젊고 키 크고 늘씬한 사람만 하는 일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는 키도 작고 날씬하지도 않고 체격도 큰 편이라 옷을 고를 때 체형을 많이 고려하는 편이거든요. 아무 옷이나 멋있게 소화하는 모델과는 조건이 너무 안 맞는 거죠(웃음).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농담처럼 넘겼는데, 딸이 많이 응원해줬어요. 새로운 일에 한번 도전해보라고요.”

 

다행히 그녀는 젊을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 잠깐이지만 패션 관련 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결혼한 뒤에도 남편이 하는 일과 관련된 파티나 행사에 자주 참석하면서 모임에 맞는 의상과 헤어, 메이크업을 하는데 어느 정도 익숙했다. 또 집에서도 편한 옷차림보다는 갖춰 입는 것이 좋았다. 종종 그런 그녀를 보면서 친구들은 “불편하지 않아?”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그렇게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 훨씬 좋고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그렇게 호기심으로 찾아간 곳이 지금의 모델 에이전시다. 현재 이곳에는 그녀를 비롯해 국내 대표적인 시니어 모델인 김칠두 씨 등이 속해 있다.

 

“아카데미에 처음 가서는 그렇게 많은 시니어 모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어요. 웬만한 젊은 사람들보다도 잘 관리된 몸에, 다들 너무 근사하게 차려입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인생의 끝자락을 향해가는 길목에 서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 에너지와 열정이 어마어마해요.”

 

본인의 관심사를 찾고, 취미 삼아 시작한 일이지만 그녀는 요즘 모델이라는 일에 점점 더 욕심이 생긴다. 건강상의 이유로 남들처럼 까다롭게 식단을 조절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 대신 운동으로 몸을 가다듬고 있다.

 

“일주일에 4일은 체육관에 가서 줌바댄스, 필라테스, 태보, 사이클, 크로스핏 등 있는 프로그램은 다 해요. 모델 일을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목표가 생기니까 그 전에는 몰랐던 단점들도 보여요.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그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쏟는 거죠.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다시 몰두할 수 있고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이가 들어서 인생이 재미없어지는 건, 본인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늘 익숙한 것만 곁에 두려고 하니까요. 하지만 전혀 모르는 분야를 접하면 나이가 육십이 돼도, 칠십이 돼도 모르는 것투성이기 때문에 궁금하고, 배우고 싶어지죠. 인생이 지루할 틈이 없는 거예요.”

 

이제 막 인생 2라운드에 접어든 그녀는 “자신만의 인생 명함을 갖기 위해서는 새로운 일을 찾고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이 들어서 퇴직했다고 가족들, 남 눈치 볼 시간이 어디 있나요.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집중하고 관심을 갖다 보면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 도전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 일에 주저 없이 매진하는 거죠.”

 

또 하나, 그녀는 주변에 자신을 응원해주는 ‘든든한 백’을 두라고 조언한다.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현실적인 조언자보다 때로는 “뭐든 할 수 있어!”라고 무조건 지지해주는 한 사람이 더 큰 힘이 된다고. “남은 목표요? 일단 새로 시작한 모델 일을 좀 더 잘하고 싶어요. 기회가 돼서 유명한 모델이 되면 짜릿하지 않을까요(웃음). 또 건강이 허락하면 봉사활동도 해보고 싶고요.” 런웨이 위에 화려하게 펼쳐질 그녀 인생의 후반부가 더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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