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농부가 되려면 필력을 쌓아라?
전북 김제에 위치한 ‘스토리텔링 사관학교’에서는 2주에 한 번 특별한 수업이 열린다. 바로 ‘농부들의 글쓰기 교실’이다. 정식 명칭은 ‘e-비즈니스 농업인 글쓰기 심화과정’으로 지난해 6개월간 열린 첫 글쓰기 수업에 이어 두 번째다.
이 수업을 운영하는 곳은 전라북도농업기술원. 농부들을 대상으로 전국 최초 글쓰기 강좌를 연 셈인데 수업 현장에서 만난 최윤희 농촌지도관은 “(농업인들로부터) 글쓰기 수업에 대한 요청이 많이 들어와 2018년에 첫 프로그램을 개설했으며, 반응이 좋아 올해 또다시 수업을 열게 됐다”고 귀띔했다. 수업에 대한 관심과 문의가 잦은 만큼 내년 사업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얼핏 ‘농부’와 ‘글쓰기’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싶지만, 요즘 농업의 성공은 글쓰기 실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부들의 1순위 고민이 바로 ‘판로’인데, 언제부턴가 농가에 온라인 바람이 불며 생산한 작물을 인터넷쇼핑몰, 오픈마켓 등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몇 년 전부터 전국의 농업기술원이 농업인들의 온라인 상거래 교육에 열을 올린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물건을 판매하려면 사진과 함께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농작물을 길러 낸 곳의 환경적 특징이라든가 비료를 전혀 쓰지 않았다는 식의 특장점을 부각하려면 ‘설명’에 해당하는 글이 필요한 것. 나아가 요즘은 ‘소셜 농부’라 해서 블로그,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등의 SNS 채널을 적극 활용하는 농부도 많은데, 이 경우 글솜씨가 더욱더 요구된다. 단순한 상품 소개를 넘어 마치 에세이를 쓰듯 진솔한 일상, 개인사를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시 생활을 접고 귀농을 택한 이유, 초보 농부로 고군분투했던 경험, 하루하루 자라나는 작물을 보며 드는 생각 등이 모두 글감이 되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키우는 농작물에 대한 소개가 이뤄진다.
불특정 다수가 열람할 수 있는 SNS의 특성상 이러한 글은 농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뿐더러 구매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계기가 된다. 실제 태풍으로 낙과가 발생했다는 사연을 SNS에 올려 전량을 판매한 사례가 있을 정도로 SNS 글쓰기는 이제 농업 마케팅의 중요 수단이 됐다.
‘글쓰기 수업’으로 책까지 낸 농부들
이러한 필요에 의해 글쓰기 수업을 받고자 모여서인지 참여자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정읍, 부안 등의 인근 도시에서 찾아와 지난 2월부터 주기적으로 수업을 받는 농부들은 강사에게 “하루는 짧다, 1박 2일 수업을 하자”고 요청할 만큼 글쓰기 수업에 푹 빠져 있다.
“글은 특별한 사람들만 쓸 수 있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화려한 글솜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솔한 삶의 기록이거든요. 여기 모인 분들 모두 고유의 경험과 생각이 있는데 이를 글로 풀어낸다면 그 자체로 좋은 콘텐츠가 될 거라 설득했지요. 그런 콘텐츠가 SNS상에서 나를 드러내는 좋은 홍보 수단이 되니 농사를 지어, 이를 판매해야 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글을 써야 할 필요가 충분했던 거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글쓰기 수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영숙 강사는 농업인 글쓰기의 필요성부터 시작해 일상에서 좋은 글감을 찾는 법, 공감을 사는 글을 쓰는 법,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완성하는 법, 책 제목과 표지 디자인 하는 법까지 ‘글쓰기’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글쓰기 이론을 배운 뒤에는 실제 작문 숙제를 내줬기 때문에 참여자들은 그야말로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치부,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 농사를 지으며 힘들었던 일 등에 관한 글을 쓰고 나면, 이를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다.
아직 미숙한 글솜씨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 과정을 통해 좀 더 매끄럽게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고, 내밀한 개인사를 공유하며 단체로 치유와 힐링을 경험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글을 쓰기 위해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고 곱씹으며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 좋았다고.
이렇게 6개월의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한 사람당 50편 정도의 글을 쓰게 되는데, 지난해 수업에서는 개인별로 10편씩을 뽑아 전라북도농업기술원의 지원하에 합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장장 550페이지에 달하는 <2018 농부, 책을 쓰다>가 그것으로, 이 두꺼운 책에는 13인의 농부가 투박하게 적어 내려간 날것의 개인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양산을 쓰고 우아하게 도심을 누비던 사모님이 남편의 퇴직과 함께 ‘시골 아낙’이 되어 동네 주민들의 관심을 받은 일, 땡볕에서 옥수수 첫 순을 따다 급체해서 병원에 실려 간 일,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고 죽은 일 등 <전원일기>나 <인간극장>에 나올 법한 재미난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책이 나온 뒤, 북 콘서트가 열리거나 방송 출연 제안이 오는 등 여러 고무적인 결과도 따랐고, 전북 도내·외 농업인들과 농촌진흥청, 농업기술원 등에 책이 배포되며 ‘농업인 글쓰기’의 좋은 벤치마킹 사례로 떠오르기도 했다.
김학주 전라북도농업기술원장은 보도 자료를 통해 “책이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생생한 농촌의 삶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소비자에게 신뢰와 감동을 주어 농산물 판매 확대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발간 의의를 전하기도 했다.
이번 수업 역시 과정이 모두 끝나면 또 한 권의 합본집을 발행할 예정인데, 연말 즈음에는 합본집에 미처 담지 못한 작품들을 모아 개인별 자서전을 낼 계획도 가지고 있다.
수업에 관심이 있다면?
내년도 수업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연초 전북 지역의 시군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모집할 계획이다. 수업 대상자는 전북에 거주하는 농업인으로 한정한다.
문의 전라북도농업기술원 063-290-6000 www.jbares.go.kr
“양파즙 판매에 ‘글’이 도움이 되었지요.”
도시 생활을 접고 20년 전 고향으로 내려와 쭉 양파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저희 집은 양파가 아닌 ‘양파즙’을 만들어 팔고 있는데, 과거에는 단골이 또 다른 손님을 소개하는 식의 입소문에 의지해 장사를 하는 편이었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온라인 상거래가 차츰 일반화되면서 ‘컴맹’인 저 역시 농업기술센터에 나가 정보화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 계기로 G마켓, 옥션, 네이버 스토어팜 등에 양파즙을 올려 판매하기 시작했죠. 동시에 블로그, 페이스북 운영도 함께 배웠어요.
농장 염소가 더위를 타서 그늘막을 만들어준 얘기며, 집 주변으로 예쁜 매화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는 식의 소소한 일상을 올리고 있는데, 이런 글들을 보고 믿음이 간다며 양파즙을 주문해주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새삼 글의 힘을 실감하기 때문에 이런 글쓰기 수업이 열린다는 소식이 무척 반가웠죠. SNS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오픈마켓에 어떻게 사진을 올리는지 등의 ‘기술적인 공부’를 가르쳐주는 곳은 많지만,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곳은 없었거든요.
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수업까지 듣고 있는데 글을 쓰다 보니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글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군더더기 없이 재미난 글을 쓸 수 있는지 차츰 깨닫게 되더라고요. 예전에 비해 블로그의 글이 훨씬 더 재미있어졌다는 피드백도 받았습니다(웃음).
매일 한 편씩 글을 쓰다시피 하는데, 깡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해 고생한 이야기, 돼지를 사육하며 겪은 고군분투, 경동시장에서 한약재 팔던 시절의 이야기 등을 끄집어 정리하다 보니 참 열심히 살아왔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간농양에 걸려 죽다 살아난 아버지, 탈곡기에 팔이 끼어 평생 장애를 안고 사셔야 했던 할머니 이야기 등 가족의 이야기를 써 SNS 친구들에게 감동을 드리고 싶습니다. _강미구
“꽃차 만드는 법을 알릴 거예요.”
오랫동안 나무, 꽃을 기르면서 화원을 운영했어요. 농업기술센터 등에 나가 필요한 교육을 종종 받곤 했는데 지난해 글쓰기 수업에 대한 정보도 센터에서 듣게 됐죠. 사실 그즈음 갱년기를 겪으며 몸과 마음이 다 아프고 힘들었는데,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찾아간 글쓰기 수업에서 진정한 힐링을 맛봤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미용사가 되기 위해 상경한 이야기, 명동의 큰 미용실에 취직해 일한 이야기, 위궤양 때문에 빈혈이 심해 얼굴을 찡그리다 손님에게 핀잔을 받은 이야기 등 과거의 경험을 차분히 글로 적어가며 뜻밖의 위로를 받았거든요. 제 글이 모여 활자화된 책을 보니 ‘미래’를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글쓰기를 하며 농업에 대한 자신감도 더 갖게 됐죠. 인터넷쇼핑몰이 일반화된 뒤로 묘목이나 꽃을 판매하기 위해 글을 쓰곤 했지만, 단순히 상품을 팔겠다는 거였지 내 진심, 마음을 표현하는 법은 잘 몰랐거든요. 이번 교육을 통해 진정성 있는 글이란 무엇인지 배웠으니 앞으로 SNS 활동도 더 열심히 해볼 작정입니다.
요즘 꽃차, 식초, 전통주 등을 만들어 플리마켓 등에서 판매하고 있는데, 상품에 대한 홍보는 물론이거니와 집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글로 잘 정리해서 여러 사람에게 유용한 정보를 줄 생각이에요. _심순희
기획 장혜정 사진 지다영(스튜디오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