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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퇴직 후 생각지 못한 인생 재미가 ‘빵빵’ 터지고 있다는 지성언 씨. 그는 LG상사에 입사해 타이페이, 홍콩, 베이징, 광저우, 상하이를 돌며 30여 년 간 주재원으로 일했으나 하루 아침에 계약 해지를 통보 받았다. 낙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비로소’ 내 멋대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금방 다시 웃었다고.
현재 아들뻘 되는 대표와 손잡고 ‘차이나다’라는 중국어 교육 회사를 이끌고 있으며, 지난해부터 인스타그램에 ‘데일리룩’을 올려 ‘옷 잘 입는다’는 소리를 듣더니 시니어 패션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최근 그간의 커리어와 ‘멋지게 나이 듦’에 대한 생각을 두루두루 밝힌 책 <그레이트 그레이>까지 출간해 밀려드는 섭외 전화로 행복한 고민 중. 그가 쓰는 2라운드 자기 소개서.
Step 1. 계약 해지를 통보 받고, 새기회가 열렸다
만일 ‘그 일’이 없었더라면 내 이력은 LG 입사-LG 퇴사 정도로 간단해졌을지 모른다. 나중에 하느님이 ‘넌 뭐했니’ 물으시면 한참 고민하다 ‘LG 위해 일하다 왔습니다’밖에 할 소리가 없을 거라는 자조적인 농담도 꽤 했다. 그러나 인생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늘 있었다. 30년 간 몸담은 회사에서 어느 날 갑자기 퇴직을 통보 받은 것이다.
입사 3년 차 타이완에 파견된 후로 줄곧 홍콩, 베이징, 광저우를 돌며 상사맨으로 승승장구했다. 실적이 곧 ‘인격’으로 분류되는 해외 지사에서 나의 ‘스코어’는 나쁘지 않았고, LG상사에서 LG패션(현 LF)의 상하이법인장으로 커리어의 변화를 맞기도 했다. 세계 시장을 무대로 국제적 비즈니스를 펼치는 상사맨들의 특성상, 국내 시장을 주무대로 하는 패션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평소 패션을 흠모했던 나는 망설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10년간 헤지스, TNGT, 모그 등의 여러 브랜드를 중국에 진출시켰다.
그렇게 열심히 뛰었던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잠깐 슬퍼지려했으나 곧 웃음이 났다. 지금껏 금수저 회사원으로 누렸던 안락함을 스스로 박찰 용기가 없었으나 나는 분명 인생의 변곡점을 기다려왔다. 이제야 내 멋대로 살 수 있겠다는 생각, 짤림으로써 그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그 뒤 회사의 부탁(?)으로 2년 간 고문을 맡으며 진정 행복했다. 일단 실적의 압박이 없었고 높으신 분들 대신 실무자들을 대하는 데서 오는 재미가 있었다. ‘혹시 나중에 패션 실무 관련하여 강의를 할 때 이런 사례를 써먹어야지’ 하는 계산도 꽤 하며 현장 생활을 즐겼다.
그 후 미국계 패션 회사의 중국사업 총괄로 스카우트되어 또다시 중국 패션 현장을 누볐다. 현명한 아내는 내가 부담을 느낄까봐 ‘언제든 힘들다 싶으면 주저 말고 돌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가버렸는데, 아내의 예상(?)과 달리 나는 2년이나 더 근무했다.
상하이에서 패션 사업을 하는 동안 석사 학위도 따뒀다. 한국에서의 내 노년 계획은 대학교수 혹은 문화센터 중국어 강사였기 때문에 석사 학위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나는 지금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일들을 하고 있다.
Step 2. 작은 인연이 뜻밖의 커리어로 이어지다
미국계 패션 회사에 근무하던 중 우연히 한 인터넷 기사를 보게 됐다. 상하이 푸단대 출신의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차이나다’라는 회사를 차려 중국어 온라인 교육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장차 한국과 중국을 연결하는 플랫폼이 되겠다는 그들의 포부에 비슷한 일로 젊은 시절을 불태운 내 과거가 떠올랐다. 청년들의 패기가 하도 기특하고 자랑스러워 격려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손편지를 써 보냈는데 말미에 ‘나는 중국에서 광고와 패션 화보를 찍어본 경험이 있다, 나를 모델로 쓰고 싶다면 기꺼이 무료로 카메라 앞에 서겠다’는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편지가 발송 된 이후 김선우 ‘차이나다’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그 일을 계기로 ‘차이나다’와 인연을 맺은 나는 결국 2016년 회사에 합류할 것을 제안 받고 5분만에 이를 수락, 한국으로 돌아왔다.
연봉은 이전과 비할 게 아니었으나 그동안 중국에서의 경험과 중국어 노하우를 나눌 수 있는 데다, 회사를 함께 키워간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 떨어진 첫 미션은 오프라인, 즉 학원을 꾸리는 일이었다. 그간 온라인 교육 사업에 집중했으니 이제 오프라인 공간을 통해 수강생을 모아보자는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단순한 학원으로써는 차별성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대표와 상의해 ‘학원 같지 않은 곳’ ‘젊은 이들이 머물고 싶어 하는 공간’을 꾸리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일본의 츠타야서점,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 등을 벤치마킹 하러 다녔고, 위워크라는 세계 최대 공유 오피스와 접촉해 끈질기게 학원 입주를 제안했다.
공유 오피스는 출입증을 가진 입주 기업, 혹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라 누구에게든 개방된 학원과는 결이 다른데, 이런 특징을 잘 이용한다면 오히려 이곳을 찾는 수강생의 입장에서 ‘선택 받은 듯한,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노력이 헛되진 않았는지, 2년 간 7개의 차이나탄 캠프(학원)가 생겼고 그 가운데 3곳이 위워크 내에 입점했는데, 반응이 좋아 나중엔 위워크에서 역으로 입주를 제안할 정도였다. 그 밖에 판교 등에도 우리 캠프(학원)가 생겨났는데 입지를 선정하고, 공간을 어떻게 꾸며갈 건지 등을 고민하는 일이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과 본질적인 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아 놀라울 때가 있다. 중국에서 고문으로서, 또 외국계 기업의 총괄을 맡아 일의 A부터 Z까지를 손댄 경험이 없다면 아마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Step 3. 저자가 되면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다
나는 최근 <그레이트 그레이>라는 책을 펴냈다. 덕분에 잡지의 표지 모델이 됐고, TV와 라디오 등의 출연 섭외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는 등 꿈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연기 제안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이 모든 건 바로 책에서 밝힌 나의 ‘희망사항’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이력을 밟아온 사람이고, 앞으로 이런 일을 하고 싶다는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실제 꿈꿔온 일들이 하나하나 현실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소문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물론 근거 있는 소문일 경우다. 내가 뭘 잘하는지 널리 알려서 혹시 모를 기회를 도모하는 게 좋다. 그런 점에서 책은 좋은 수단이 된다.
그럼 내가 어쩌다 책을 내게 됐냐고? 페이스북에서 책 쓰기 아카데미 모집 공고를 보고 접수한 게 시작이었다. 나중에 강의라도 하나 맡으려면 책의 저자가 되어야 한다는 조언을 숱하게 들어온 터라 어떻게든 책을 한 권 내고 싶었다.
그렇게 글쓰기 교실에 갔다 출판사 대표를 만났다. 내가 1세대 중국통으로 이러이러한 일을 한 인물인데, 비즈니스맨으로 쌓았던 경험을 책으로 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더니 반응이 영 별로였다. 대신 선생님은 패션 감각도 있고, 젊은 대표와 일하고 있다는 특이한 이력도 있으니 이런 내용들을 골고루 섞어 쿨하고 멋진 시니어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을 해줬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전적으로 출판사의 가이드를 따르겠노라 했다. 그러나 집필 과정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40권쯤의 책을 읽고, 샘플이 될 만한 책을 필사했으며, 결정적으로 ‘꼰대스럽지 않은 스타일’의 문체를 익히느라 한두 달 가량의 훈련을 거쳤다.
훗날 나의 성장세가 기대 이상이었다는 출판사 관계자들의 후일담(?)이 들려왔는데, ‘다음 주까지 이 파트에 대한 글을 써와라’는 미션을 주긴 했어도 내가 가이드대로, 성실하게 글을 적어 올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너 달에 걸쳐 책 한 권을 완성한 대가로 나는 ‘작가’가 됐다. 책의 저자가 된다는 건 공식적인 프로필이 생겼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언제 어디서든 누구든 나를 ‘소개할 만한 인물’로 여기게 된다는 면에서 일종의 ‘면허증’ 같은 개념이 아닐까 싶다.
Step 4. 패션은 무기가 된다
‘나를 알리는 효과적인 채널로써 책 외에도 SNS가 있다. 아침 출근길에 종종 중년 패션 에이전시 ‘헬로우 젠틀’의 권정현 대표를 만나는데 권 대표가 그날 그날 나의 차림새를 찍어주면 나는 그 중 A컷을 골라 내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다.
그러면 ‘멋지다’ ‘쿨하다’ ‘패션 센스가 대단하다’ 같은 기분 좋은 피드백이 올뿐더러 내 이미지를 활용하고자 하는 브랜드로부터 뜻밖의 제안이 들어오기도 한다.
사실 내가 패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는 상사맨에서 LG패션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다. 광저우에 머물며 온갖 산해진미를 섭취한 나는 두둑한 뱃살을 가진, 넥타이 차림의 ‘아재’였지만, 패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날렵한 몸에 세련된 옷 차림을 하고 있었다.
위기 의식을 느낀 나는 그때부터 넥타이를 벗고 패션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소식하기, 하루 1만 보 걷기 등 운동의 생활화를 실천하며 체중을 10kg가량 줄였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178cm, 70kg의 그런대로 봐줄 만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
피나는 노력으로 외모를 가꾸자 그에 대한 보답처럼 뜻밖의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다. 상하이에서 우연히 유명 감독의 눈에 띄어 슝다이린(중국의 유명 여배우)과 TV 광고를 찍거나 남성복 화보 모델이 된 것. 만일 내가 패션 쪽으로 커리어를 바꾸지 않았다면, 오늘날 ‘패피’로 불리는 영광을 누리진 못했을 것 같다.
비슷비슷한 나이에 비슷비슷한 커리어를 가졌다고 가정해 보면 센스있는 옷 차림은 나의 장점, 남들과 대비되는 특징으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 그렇게 자신의 특장점을 자꾸 어필하고 알려야 기회가 찾아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뿐이다.
내 나이는 올해 64세, 손주가 넷인 할아버지다. 각종 강연, 팟캐스트 패널, 필자 등으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새롭게 그렸다 지운다. 연기, 디지펀아트(스마트폰 등을 활용한 예술)에도 도전하고 싶고 궁극적으로 셀럽이 되고 싶다. 연예인 같은 셀럽을 뜻하는 건 아니다. 내 가족, 지인, 친구들, 그리고 온라인상에서 맺은 인맥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고 싶다는 의미다. ‘저 친구처럼 재미있게 나이 들고 싶다’ ‘저 할아버지처럼 즐겁게 도전하며 살고 싶다’는 반응이면 더 바랄게 없다.
사진 오충근(스튜디오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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