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의 즐거움

기사 요약글

인생의‘내리막’을 슬기롭게 극복해 더 좋은 ‘오늘’을 맞이한 스타들의 이야기

기사 내용

 

“준비되지 않은 성공은 오히려 독이 됐죠”

배우 강성진


초등학교 시절 수영과 스피드스케이팅을 한 강성진은 훤칠하고 다부진 체격을 자랑했다.<잭더리퍼><올슉업><할란카운티><장수상회> 등 최근 7~8년간 쉬지 않고 연극과 뮤지컬 공연을 해온 강성진에게 체력 관리는 필수. 한동안 무대에 집중하다 보니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를 볼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어떤 작품은 시나리오가 정말 좋아서‘노개런티’로 출연하기도 했고, 어떤 작품은‘대박 날 것 같아서’ 하기도 했어요(웃음). 작품을 선택할 때 그냥 마음이 닿는 쪽을 선택했죠. 일부러 의도해서도,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본능적으로요. 그 과정에서 연기자로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어온 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그의 성향 때문에 소속사와 갈등도 여러 차례 겪었다.‘돈이 되는’ 작품을 선택하는 회사와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따르는 그의 성향이 맞지 않았던 것. 그래서 그는 매니저 없는 지금의 생활이 차라리 편하단다. 물론 여기에는 일정 부분 책임도 따랐다.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아들 민우와 둘째 딸 민영(9세), 이제 막 30개월 된 늦둥이 딸까지 세 아이를 둔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부담감을 떠안아야 했던 것. 그가 사업에 손을 댔던 것 역시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2000년대 중반부터 몇 차례 사업을 했어요. 기질상 혼자 살았다면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마음 편한 게 최고지 하면서(웃음). 그런데 결혼하고 자식을 낳다 보니 경제적인 면을 무시하고 살 수가 없더라고요.”

2007년 무렵 그는 지방에 있는 대형 극장의 매점에 큰돈을 투자했다. 수익성으로만 따지면‘안 할 이유가 없는’ 확실한 사업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1년은 승승장구했다. 본인과 아내의 통장에 각각 매월 수백만원씩 적금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듬해 갑자기 극장이 문을 닫았고, 투자금 전부를 잃었다.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돈을 투자했던 터라 뒷감당은 쉽지 않았다. 그는“지금도 그때 진 빚이 조금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때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도전한 것이 바로 ‘강성진 반찬 가게’로 유명한 ‘찬어클락’이다. 2012년 창업한 ‘찬어클락’은 소위 대박을 터뜨리며 두 달 만에 지점이 일곱 군데까지 늘었다. 하지만 준비 없이 맞이한 성공은 오히려 독이 됐다.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사업 규모가 확장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결국 그마저도 실패, 모든 영업점이 문을 닫았다.

“‘돈만 좇으면 결국 돈 때문에 망한다’는 말을 절감했어요. 돈과 성공에 집착할수록 더 멀어지는 기분이랄까요. 운동할 때도 좋은 기록을 내려고 긴장할수록 몸이 굳고 실수하잖아요.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성공하기 위해 너무 힘을 주고 살면 고꾸라지더라고요. 누군가 그때 실패한 것이 아쉽고 후회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그건 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제게 오지 않은 기회, 혹은 잠시 스쳐 갔던 기회들은 결국 제 몫이 아니었던 거죠.”

누군가 말했다. 인생에는 어제도 내일도 없다고. 그저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있을 뿐이라고. 건강한 목표와 의욕을 가지고 사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의욕만 가지고 잘 살 수는 없다. 때로는 내려놓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기도 한다. 삶의 굴곡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는 신앙의 힘도 컸다. 이제는 그의 삶에서 분리할 수 없는 큰 지표가 됐다고.

“작년에 양평으로 이사를 왔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워요.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가 혁신학교라 부모 참여 수업이 정말 많아요. 어릴 적 로망이 운동회에서 아버지랑 같이 달리기를 해서 1등 하는 거였는데 얼마 전에 큰아들과 소원 성취했어요(웃음). 둘째 아이는‘민영이의 재발견’이라고 할 만큼 막냇동생을 살뜰히 챙기는데, 보고 있으면 너무 기특하죠. 늦둥이 딸 민하는 뭐….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제 인생 최고의 선물이에요. 민하가 태어날 즈음 커리어나 경제적인 면에서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아이를 안고 나니 일순간에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더라고요.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아이예요.”

‘받아들이고 나니 너무도 평안하더라.’ 이 당연한 인생의 이치를 깨달은 그는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아프고 나서야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됐죠”

가수 김혜연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라는 노랫말처럼 가수 김혜연은 주말이면 전국 팔도의 무대를 오르느라 정신이 없다. 인터뷰가 있던 당일에도“주말에 대전, 당진, 함양, 의령을 거쳐 서울, 남원까지 돌아야 한다”며 웃던 그녀다. 출산한 지 열흘을 갓 넘기고 다시 마이크를 들었을 만큼 지독한‘일벌레’를 자처했던 김혜연이 처음으로 일을 못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던 건 머리에서 종양이 발견되면서였다.“한 방송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건강검진을 받는데 뇌종양이 두 개나 있다는 거예요. 당장 오늘 쓰러질지 내일 쓰러질지 모르는 상태라며‘최악’을 얘기하는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나 싶더라고요. 그때 그토록 원했던 셋째를 낳고‘뱀이다’라는 노래까지 큰 히트를 치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거든요. 절망감에 처음 일주일 동안은 계속 울기만 했죠.”

‘세 아이들 앞으로 들어둔 적금은 이렇게 처리해라’‘새 장가를 들어 아이들을 잘 길러 달라’‘친정 부모님 몫으로 이 부분은 남겨놓겠다’ 같은 내용의 유서를 쓰면서 담담히‘생의 마지막’을 정리했던 김혜연은 고심 끝에 한 가지 결심을 한다. 아이들에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던‘멋진 엄마’로 남기 위해 수술 전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활동하기로 한 것. 그러나 그녀의 시련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기운을 내 한 방송에 출연했는데 공교롭게도 게스트의 건강을 체크하는 코너에서 또 속상한 얘기를 들었어요. 위궤양, 역류성식도염, 헬리코박터균까지 발견돼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바로 위암에 걸릴지 모른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거든요. 그 상황이 너무 야속해서 방송 내내 눈물 바람이었는데, 뇌종양 투병 사실은 남편과 저밖에 몰랐기 때문에 사정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저렇게까지 울 일인가 싶었을 거예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 천만다행으로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수술 4일 전, 뇌의 혈관이 발견돼 약물치료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 그 뒤 6개월마다 MRI 검사를 받으며 경과를 지켜보던 그녀에게 기적이 찾아왔으니 바로 넷째 임신이었다. 이만해도 놀라운데 얼마 뒤에는 종양이 아예 사라져버리는 두 번째 기적까지 찾아왔다.“새 생명을 선물받은 기분이었죠. 한편으로는 긍정의 힘이 정말 무섭다는 걸 느꼈어요.‘왜 나에게만?’이라는 억울한 마음도 잠깐 들었지만 곧‘쓰러지지 않고 치료할 기회라도 얻은 게 어디야’‘수술할 뻔했는데 약물치료로 인한 고통쯤이야 별거 아니지’ 하며 좋은 생각만 했기 때문에 병이 나았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큰일을 겪고 난 뒤 삶을 대하는 태도나 습관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건강한 식재료를 챙겨 먹기 시작했으며 무리한 다이어트도 삼갔다. 일부러 짬을 내 아이들과의 시간을 갖기 시작한 것도 과거와는 다른 점이다.

“아파보니 제일 걱정되고 미안해지는 게 결국 자식이더라고요. 저희 애들은 어릴 때부터 엄마가 자고 있으면 놀아 달라고 보채긴커녕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갈 정도로 철이 일찍 들었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에 맺혔어요. 바쁘다는 핑계로 그때까지 변변한 여행 한번 가본 적이 없는데 그래서 몸이 회복되고 나서는 아이 한 명 한 명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어요. 예전 같으면 행사가 먼저였겠지만, 지금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먼저, 일은 그다음이 되었죠. 아마 그런 큰 고비가 없었더라면 일상의 소소한 행복은 뒷전으로 미뤄놓기 일쑤였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련은 꼭 나쁘다고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녀의 투병기가 알려지며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나 가족들의 메시지가 심심찮게 온다고 했다. 둘째 출산 이후 한동안 셋째 임신이 되지 않아 힘들었던 경험을 고백한 뒤로는 난임을 겪는 부부들의 연락도 온다. 인생의 고비가 결국 삶의‘경험’으로 쌓여 타인에게 따뜻한 조언과 위로가 되고 있는 것. 탄탄히 삶의 내공을 쌓아가는 김혜연의 내일이 기대되는 이유다.

 

“묻혀 있던 10년간, 앞날을 대비했죠”

개그맨 노정렬

 

개그맨 노정렬은 요즘 어느 때보다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시사 풍자, 정치인 성대모사의 달인으로 통하는 그에게 다방면의 제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TBS FM<노정렬의 주말이 좋다>, 팟캐스트<노정렬의 시사정렬>, 대전MBC<노정렬의 시시각각>, 춘천KBS<강냉이> 등의 프로그램에서 활약 중이다. 지금이 바로 인생의 ‘전성기’가 아닐까 싶지만 노정렬은‘이제 겨우 회복기’를 맞이했을 뿐이라며 웃는다.“제가 이른바‘리스트’에 올라 9년 반가량 방송을 쉬었어요. 함께 방송을 하던 PD들이‘어렵게 됐다’며 사정을 알리는데 어쩔 도리가 있어야죠. 속상하긴 했지만, 한집의 가장이니 어떻게든 살 길을 찾는 수밖에 없었어요.”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연극배우, 뮤지컬 배우를 거쳐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무원 생활을 하다 개그맨이 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방송 출연이 요원해지면서 작은 행사의 MC를 보거나 소규모 특강 무대에 서는 한편 노량진에서 행정학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고시 준비 경험 때문이었다. 그렇게 차츰차츰 일상의 균형을 되찾아가며 그는‘위기를 기회’로 만들 방법을 고민했다.“고비를 겪으며 사람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지만, 오히려 과거를 돌아보고 앞날을 도모하는 소중한 기회로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자기 계발을 하기에 이만큼 좋을 때가 또 없을 것 같기도 했죠. 그래서 외국의 시사 정치풍자를 찾아보며 차용할 점을 연구하기도 했고,‘외국 무대 진출’을 꿈꾸며 영어 공부에도 열심히 매달렸어요.” 그때 차곡차곡 쌓아둔‘지식’이 요즘 활동의 큰 밑거름이 됐음은 물론이다.

‘웅크렸던 시간’은 그에게 사람에 대한 많은 생각을 일깨우기도 했다. 일단 바쁘다는 핑계로 고마운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잊고 살았던 점을 뉘우쳤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도‘그럴 수 있어’‘그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하는 여유를 갖게 됐다.

“사람 때문에 힘들었지만, 또 사람 때문에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어요. 현재 하는 방송이 없으면 행사 출연료가 적게 책정되는데, 제 사정을 아시는 분들은 그런 차별 없이 챙겨주시며 어떻게든 재기할 수 있도록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또 과거엔 저와 정치 성향이 다른 분들의 과격한 발언 앞에서‘말이 안 통해’‘저 사람은 왜 저래’ 하고 말았지만, 여러 일을 겪으면서 그 나름의 입장과 사정을 헤아려볼 줄 알게 됐죠. 이런 경험이 쌓여서 좋은 점은 어떤 주제의 강연을 하건, 할 수 있는 말이 그만큼 많아진다는 점이에요. 제가 그리 잘난 사람은 아니지만, 늘 사람들을 웃기는 개그맨조차 인생에 저런 굴곡이 있었고, 그걸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줄 수도 있겠더라고요.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는 말을 정말 실감했습니다.”

앞날을 긍정하는 스스로의 힘과 주변의 격려가 더해져 그는‘긴 터널’ 같은 시간을 순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인생의‘바닥’을 찍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열정을 갖자고 조언한다.“아무리 순탄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예상치 못한 고비나 어려움은 꼭 겪게 되잖아요. 여유를 갖고 그 시기를 극복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 안에 열정을 품었으면 좋겠어요. 인생에 그런 풍파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는 생각이 들게끔요. 그런 과정에서 결국 자기만의 스타일이 생기더라고요. 남들과 똑같은 건 재미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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