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한 사람들

기사 요약글

오랜 시간 걸어왔던 길을 떠나 다른 삶을 시작한 스타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달라진 삶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기사 내용


개그맨에서 사업가로 고명환

개그맨을 꿈꾸던 시절부터 개그맨으로서 살아가던 때까지, 고명환은 다른 삶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방송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는 죽음의 기로에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사업가이자, 작가, 강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지금이 진짜 자신의 삶이라 말한다.


사업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005년이었어요.<해신>이라는 드라마를 찍고 올라가다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병원에서 깨어났는데, 의사 말이 제가 이틀 안에 죽는 다는 거예요. 사형선고를 받은 거죠. 사실 그 전까지는 제가 그런대로 잘 살았다고 생각을 했어요. 300만원 들고 상경해 6~7년 만에 서울에 집도 사고, 연예대상에서 상도 받고, 어떻게 보면 죽음이 다가왔을 때 억울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했어요. 왜냐면‘진짜 내 시간’을 산 날이 불과 몇 달밖에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만약 죽지 않는다면, 이후 의 삶은 내 의지대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죠. 그리고 다행히 안 죽었고요.

새로운 삶을 사는 방식으로 다양한 영역이 있을 텐데 그중 사업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업이 목표는 아니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책을 쓰기 위해서 사업을 한 거예요. 병실에서 회복하면서 일종의 작전을 세웠어요. 끌려다니면서 살고 싶지는 않은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제일 무섭잖아요. 그래서 돈과 관련된 책을 엄청 읽었어요. 그러다 어떤 책에서‘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남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 나에게 돈을 가져다 주는 생산수단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찾아냈어요. 이를테면 저작권료, 로열티, 아니면 건물을 사는 것이죠. 그중에 관심을 가진 게 저작권료였어요. 개그맨을 하다 보니 아이디어 내는 데는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걸 표현해 낼 수 있도록‘쓰는’ 능력을 더하면 승산이 있겠더라고요.

처음에는 뮤지컬 작품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방송활동을 접고 대학원에 들어가 글쓰기를 배우고, 뮤지컬 작품을 만들다 보니 강의가 들어오더라고요. 강의를 해보니까 개그맨으로 무대에 섰을 때 느꼈던 행복이 똑같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한동안 강의를 열심히 했죠. 그런데 강사료를 더 많이 받을 방법을 고민해보니 책을 써서 저자가 되면 되겠더라고요.

그럼 어떤 책을 쓸까. 일단 남들 얘기를 가져다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내가 일을 벌이고, 그 경험으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사업을 시작했죠. 성공을 하면 좋지만 망해도 배울 게 있고, 이런 이유로 망했다는 책을 내도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도전을 했어요. 그런데 차리자마자 장사가 잘되더라고요.

새로운 도전을 하는 데에 두려움은 없었나요?
당연히 있었죠. 당장 먹고사는 것부터 두려웠어요. 그런데 책으로 용기를 얻었어요. 진짜 내 인생에서 하고 싶은 걸 찾으려면 지금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떠나 봐야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행복하면 상관없는데, 아니라고 하면서 그쪽만 보고 있다면 끊고 뒤돌아보라는 말이 있어요. 그 말이 마음을 움직이더라고요.

과거와 지금의 삶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제가 서른네 살에 삶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6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마흔 살부터 도전을 시작해 지금 8년이 지났는데요, 그 8년 동안 단 1초도 누군가로 인해 제 인생이 끌려다닌 적이 없어요.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거부하면서 제 시간이 많아지게 됐어요. 그리고 그 시간에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됐고요. 저는 책을 좋아해서 시간이 있으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요. 그랬더니 강의의 소재가 다양해지고, 강의가 더 많이 들어오고, 강사료가 올라가더라고요. 이렇게 제 인생의 악순환을 끊고 선순환을 만들어 낸 거죠.

성공의 가장 큰 동력은 무엇인가요?
복수심. 복수심에 휘발유를 부어준 건 책이었어요. 책을 읽으면서 저를 알고, 제가 가야 하는 길을 찾고, 저만의 삶도 만들 수 있었어요. 물론 복수도 했죠. 그것도 꽤 멋있게 복수했어요. 도움을 줬죠. 나를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줬거든요. 진짜 복수란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배우에서 감독으로 추상미

천생 배우라는 수식이 어울리던 추상미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됐고, 감독으로서의 필모그래피도 추가했다. 감독과 엄마라는 경계에서 스스로 모든 역할을 즐기듯 해내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언제 인생의 변화를 꿈꿨나요?
10년 정도 배우가 아닌 평범한 일상을 살았어요. 의미 있고 큰 사건이 많았죠.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학부모까지 됐고요. 그리고 오래되고 낡은 꿈이었던 연출 공부를 시작해 감독이 됐죠.

아버지 고 추송웅 씨 때문인지 뼛속까지 배우라는 이미지가 강해요. 그래서 감독이라는 수식이 낯설기도 하고요.
사실 아버지는 배우로 유명하셨지만 연극 연출도, 각색도 하셨죠. 게다가 음악도 작곡하고, 무대장치까지 직접 만들며 다방면으로 예술가적 면모를 보이셨어요. 그래서 저는 연출과 연기의 경계가 뚜렷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엄청난 몰입을 요구한다는 점과 온 마음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점은 같죠.

배우로서 입지가 탄탄한데 왜 감독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나요?
마흔이 넘어 연극배우로서의 제 경험을 녹인<분장실>, 아들을 잃은 엄마를 다룬<영향 아래의 여자> 같은 단편영화를 연출했어요. 단편영화가 영화제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다 보니 감독으로서 조금 더 긴 시나리오를 쓰고 장편을 연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죠.

그맘때쯤 결혼 5년 만에 아이를 가졌어요. 유산의 경험이 있던 터라 아이에 대한 애착이 너무 컸죠.‘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라는 불안도 컸고요. 엄마가 되는 과정은 어려웠고, 출산 후에는 우울증이 찾아왔죠. 산후우울증에 걸리면 세상의 모든 아이가 내 아이처럼 보여요. 뉴스에서 아이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냥 눈물이 흐르고 겁도 났죠. 내 아이에 대한 애착이 깊어질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시선이 쏠렸죠.

그러던 중 지인이 운영하는 출판사에 갔다가 폴란드에 한국전쟁 고아가 보내졌다는 소식을 접했죠. 처음으로 분단의 아픔이 현실로 느껴졌어요. 한국 사회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실화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야겠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그렇게 제작된 다큐멘터리영화<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두 달간 4만600명이 봐주셨어요. 아동 NGO, 대학생, 직장인 단체 관람도 많았고요.

극장에서 자신이 만든 영화를 보며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20년간 배우로 활동하며 받은 관심과 감독으로서 받는 반응은 굉장히 다르더라고요. 인간 추상미의 생각을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평가받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더 설레기도 하고, 더 두렵기도 하고.

배우의 경험을 감독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어떻게 활용했나요?
배우로 활동하면서 좋은 경험을 참 많이 했어요. 연출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죠.‘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는 속담처럼 저는 스스로 하고 싶고 납득이 돼야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타입이에요. 연출에 미쳐 있다가 문득 카메라 앞에 서거나 연극을 하고 싶을 때가 올지도 모르겠어요. 이젠 역할에 한계를 두지 않을 것 같아요. 제 영화에서 남들이 안 하려는 자투리 역할에도 도전해볼 수 있고요. 저는 특히 아녜스 자우이 감독을 좋아해요. 자신이 연출한 영화<타인의 취향>에 출연해 훌륭히 제 역할을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웠어요.

앞으로의 도전 과제는 무엇인가요?
여전히 여성 캐릭터의 한계가 존재해요. 좀 더 생생하고 주도적인 여성 캐릭터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엄마와 아이가 손잡고 볼 수 있는, 그러고 나서 건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댄스 가수에서 트로트 가수로 성진우

1994년 겨울, 데뷔곡‘포기하지 마’는 성진우를 단번에 스타 자리에 앉혔다. 댄스 가수로서 15년간 꾸준히 사랑을 받았던 그가 생각한 다음 스텝은 트로트 가수. 사람들은 의아해했지만, 그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택했다고 말한다.

댄스와 발라드 음악에서 트로트로 전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나요?
그렇게 대단한 결심은 아니었어요. 사실 20대 때도 트로트를 해보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는 자신이 없었죠. 트로트에서 노래하는‘인생’을 풀어내기에는 어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30대 중후반이 되자 이제는 시도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르의 변화를 시도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대중의 생각과 반응이 걱정이 됐죠.‘나를 어떻게 볼까?’‘트로트 가수로 과연 나를 받아들여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실제 반응은 어땠나요?
반반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하니까 신선하고 좋다는 사람도 있고,‘왜 성진우가 이런 장르를 할까?’라는 사람도 있었고요. 음반을 내기까지 걱정은 있었지만, 막상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안 썼어요. 사람마다 생각이 제 각각인데 이렇게든 저렇게든 생각할 수 있는 건 당연하잖아요. 전반적으로 보면 크게 거부감은 없었던 것 같아요. 처음 발표한‘딱이야’가 정통 트로트라기보다는 기존의 제 색깔을 적절히 넣은 곡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이전에 음악을 했을 때와 비교해서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무대죠. 트로트는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호흡하는 무대가 많다 보니 아무래도 현장감이 더 있어요. 그리고 선배님이 많이 계시다는 점. 그런 것도 저에게 힘이 돼요. 선배님들 중에 여전히 음악적 욕심을 내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더 배우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음악적 롤 모델이 있나요?
조항조 선배님이요. 제가 그분의 음악처럼 서정적이고 잔잔한 무드를 좋아하거든요. 저도 그렇게 말하듯이 살아가는 얘기를 풀어내는 음악을 해보고 싶어요.

트로트 가수로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나 노래는 무엇인가요?
인생의 황혼기에서 그 동안 제가 살아왔던 얘기를 음악으로 풀어내보고 싶어요. 제가 올해 쉰 살이 됐거든요. 과거엔 지금 나이쯤이면 인생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 나이가 되고 보니까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언젠가는 꼭 제가 살아왔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그게 부모님이나 아내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고, 저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겠죠.

새로운 도전이 인생에서 어떤 의미로 남았다고 생각하나요?
인생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 트로트를 시작한 건 아니에요. 무대에 서는 건 다 똑같거든요. 다만 무대에서 제가 느끼는 책임감의 정도가 달라진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바빴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제 무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하고자 하는 걸 보여주는 데에 대한 책임감, 그게 변화가 주는 가장 큰 의미가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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