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투병일기

기사 요약글

거세고 큰 파도의 아픔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 작가들의 투병일기.

기사 내용

 

중병에 걸리면 삶의 윤곽이 아주 분명해진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만 하면 앞으로 할 일은 명백해진다. 만약 석 달이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1년이라면 책을 쓸 것이다. 10년이라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다.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진리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하루를 가지고 난 대체 뭘 해야 할까? 어느 순간 나는 약간의 협상을 시도했다. 정확히 말하면 협상이라기보다는 이런 식이었다.“하느님,<욥기>를 읽었는데 이해가 안 됩니다. 하지만 제 믿음을 시험하려고 이러시는 거라면, 제 믿음이 얼마나 약해 빠졌는지 이제 아셨을 겁니다. 저는 파스트라미 샌드위치에 매운 겨자가 빠져 있기만 해도 불경스러운 말을 뱉는 사람이니까요. 하느님, 제게 이렇게 핵폭탄급 시련을 주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이렇게 협상을 하다가 분노가 치밀었다.“평생을 바쳐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암을 주십니까?” 그리고 마침내 나는 부정, 그것도 전면적인 부정 단계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신경외과 의사 폴 칼라니티<숨결이 바람 될 때>

서른여섯,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여러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던 그는 하루아침에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아 환자가 되었다. 의사와 환자 처지에서 죽음을 경험한 그는‘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떠나기 전에’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입원 직후 저는 가슴에 고농도 약물을 투입하는 중심 정맥관을 잡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심장 위쪽에 부분 마취를 하고 마취액이 몸에 퍼지도록 기다리느라 시간이 잠시 비었습니다. 환자들에게는 무서운 시간이지만 의료진에게는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동안 의료진들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어제 있었던 회식 이야기, 오후 스케줄 등 주제도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환자 입장에서는 이게 편치 않더군요. 의료진이 뭔가를 할 수는 없지만 환자에게만 집중하기를 바라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수많은 제보자들이 간절히 저에게 이야기를 할 때 바란 것이 이런 집중이 아니었을까. 제가 의료진의 잡담에서 아쉬움을 느끼듯이, 그들도 기사화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은연중에 드러난 제 행동과 표정에서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방송기자 황승택<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

2015년 10월 첫 백혈병 진단을 받은 이후 병상에서도‘기자 버릇’ 남 못 주고 자신의 까칠, 따뜻, 유쾌한 백혈병 투병기를 페이스북에 연재했고 이를 엮은 책<저는, 암병동 특파원 입니다>를 발간했다. 수술 동의서를 쓰는 법, 최고의 의사와 최악의 의사를 어떻게 구분하면 좋을지도 들려준다.

 

 

5년에 걸친 투병 생활 중에 제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글을 쓸 수 없는 허기였습니다. 피어나지 않으면 꽃이 아니고, 노래 부르지 않으면 새가 아니듯, 글을 쓰지 않으면 저는 더는 작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창작은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이 요구되는 극한의 정신노동과 같은 것입니다. 항암 치료로 지칠 대로 지친 육체와 황폐한 정신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희망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작가가 아니라 환자라는 것이 제일 슬펐습니다. 저는 작가로 죽고 싶지, 환자로 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성모님께 생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중략)“아이고 어머니, 엄마. 저 글 쓰게 해주세요. 앙앙앙앙, 아드님 예수께 인호가 글 좀 쓰게 해달라고 일러주세요. 엄마, 오마니!”

소설가 최인호<최인호의 인생>

침샘암으로 5년 넘게 투병하다가 2013년 생을 마감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환자가 아닌 작가로 죽겠다”“원고지 위에서 죽고 싶다”고 말하던 그는 투병 중에 소설<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별안간 나는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 또한 원망과 분노의 개흙에 전신이 갈가리 찢어발겨져 있다. 나도 내일 죽을지 10년 뒤에 죽을지 모른다. 내가 죽더라도 아무 일도 없던 양 잡초가 자라고 작은 꽃이 피며 비가 오고 태양이 빛날 것이다. 갓난아기가 태어나고 양로원에서 아흔넷의 미라 같은 노인이 죽는 매일매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죽고 싶다. 똥에 진흙을 섞은 듯 거무죽죽하고 독충 같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

일본 동화작가, 수필가 사노 요코<죽는 게 뭐라고>

유방암이 재발하자 그녀는 즉시 녹색 재규어를 사서 몰았다. 또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집필 활동을 이어가며<사는 게 뭐라고><죽는 게 뭐라고> 등의 에세이집을 연이어 발표했다.

 

 

하루는 저녁 무렵에 TV를 보는데 유명한 보쌈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보쌈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 다음, 손님 중 한 중년 남자가 목젖이 다 보이도록 입을 한껏 크게 벌리고는 큰 보쌈 하나를 입에 넣더니 양 볼이 불룩불룩 움직이게 씹어서 꿀꺽 삼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략) 보쌈을 먹고자 입을 크게 벌린 그 남자의 격렬한 식탐, 꿀꺽 삼키고 나서 그의 얼굴에 감도는 찬란한 희열, 그 숭고한 삶의 증거 앞에 나는 지독한 박탈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세상으로 다시 나가리라. 그리고 저 치열하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리라.

영문학자, 수필가 장영희<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태어난 지 1년 만에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 후유증으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으나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일하며 많은 수필과 번역 작품을 남겼다. 2001년 유방암, 2004년 척추암을 이겨내고 다시 강단에 섰으나 2008년 간암으로 전이되어 다음 해 유명을 달리했다.

 

 

“스님, 임종게를 남기시지요.”
“분별하지 말라. 내가 살아온 것이 그것이니라. 간다, 봐라.”

법정 스님<간다, 봐라>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 경전을 번역하던 중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자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거처를 마련해 홀로 지내다 2010년 폐암으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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