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기사 요약글

'아버지와 아들'의 속마음 들여다보기

기사 내용

김성남(71세)

FATHER’S SAY 아들 사랑에서 손주 사랑으로


"아들이 태어나던 날 나도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온 세상이 핑크빛이고 아름답게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앞서 나온 딸이 나중에 서운하다고 말할 만큼 유독 아들에게 마음이 갔다.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께 꽃과 과일 바구니를 돌렸으니 말 다 했지."


뭐든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절대 아들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던 일도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자퇴하고 싶다고 말하는 아들에게 어느 부모가 쉽게 ‘그래라’ 할 수 있겠는가. 화를 내기보다는 설득에 나섰다. “꼴찌라도 좋으니 졸업장만 받자. 출석부에 체크만 해다오.” 설득에 설득을 더해 간신히 졸업을 시켰다. 그다음엔 딸에게 말해 동생이 대학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 부탁했다. 대학교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걸 그놈은 알까.

한없이 어리게만 봤던 아들이 일을 하고 결혼도 해 가정을 챙기는 것을 보면 언제 저렇게 컸나 싶어 안쓰러우면서 대견하다. 하지만 어릴 적 혼내지 않아서 그런지, 철없는 모습이 종종 보여 한숨이 나올 때도 있다.‘뭐 좀 고치라’ 몇 마디 하면 귀담아 듣지는 못할망정 질색한다. 본인은 잘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입장에서는 글쎄올시다.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 가족 모두가 체했던 날이자 손주가 생겼다는 기쁨에 잠 못 이루던 날이었다. 한 해를 감사히 보내고 의미 있는 새해를 맞이하자 싶어 저녁을 먹자 했는데, 예상치 못한 아들의 혼전임신 고백은 잊지 못할 기억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태어난 손주는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사랑스럽다. 특히 춤추고 놀 때 보면 제 아버지 판박이라 웃음이 난다. 그러면서 아들 어릴 적이 생각나 미안한 마음도 동시에 든다. 풍족하게 살게 해주고 싶어 아낌없이 퍼주긴 했지만 표현은 거의 하지 못했다. 그때는 살기 바빠 용돈을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공부를 더 시켰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사회 일등은 아니니까.

아들이 남편으로, 아버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안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한들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니 지금처럼 성실하게 하나하나 이뤄간다면 나보다 더 훌륭한 아버지와 남편이 될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살다가 힘이 들어도 항상 나와 가족이 뒤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들의 앞날을 평생 응원해주는 든든한 아버지로 남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은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아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나요?
무뚝뚝한 자신을 닮아 애정 표현 한 번 하지 않는 아들이 내심 섭섭한 아버지와 쑥스러움에 지금껏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한 아들을 만나 애끓는 부정의 속내를 들어봤습니다.

 

김도현(35세)

SON’S SAY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은 아들

 

"기억 속의 아버지는 표현은 서툴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 만큼 ‘가족 바보’셨다. 특히 아들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린 시절 뭔가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셔도 결국엔 내가 원하는 걸 다 이루도록 도와주는 아버지셨다."

 

나는 참 많이 못되고 철없는 아들이었다. 말대꾸는 기본, 학창 시절 반항도 많이 했다. 크게 화를 낼 법도 한데, 아버지는 날 유리 다루듯 어르고 달래며 바른길로 인도하셨다. 학교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도, 군대를 잘 다녀올 수 있었던 것도,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버지 덕분이라는 걸 지금은 안다.

아버지께서는 평생 게으름이라는 것을 모르셨다. 지금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물론 여전히 일을 놓지 않으시며 가족을 챙긴다. 사회생활을 하고 보니 그런 아버지의 성실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는다.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일 자체가 아직 나에겐 버거운 일인데, 일생을 성실함으로 인정받으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 나는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랐으니 나도 아버지처럼 잘하는 날이 오겠지.

내가 결혼을 하게 된 계기는 두고두고 우리 집의 사건(?)으로 회자된다. 연말을 앞두고 아버지가 가족 식사를 하자고 하면서 나와 누나에게 애인이 있으면 함께 와도 된다고 했던 날이었다. 그때 지금 아내의 뱃속에 우리 첫째가 있었다. 몇 차례 “누나보다 먼저 결혼하면 어떨 것 같아요?” 말을 흘리긴 했지만 어떻게 정식으로 고백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였다. 결국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요리가 나오기 전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질렀다. “엄마 아빠, 할아버지 됐어요.” 그 후로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 급체해 하루 종일 집 안에서 토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워보니 한없이 퍼주는 부모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철없는 자식의 태도가 화가 나면서도 뭐든 다 해주고 싶으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내가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애들 해 달라는 거 다 해주면 버릇없어진다”며 아버지를 나무라곤 했는데, 지금 내가 아내에게 같은 말을 듣고 있다.

여전히 난 철없는 아들이다. 어른으로서, 남자로서의 조언임을 잘 알면서도 철없이 대들고 뒤돌아 후회하는 일도 여전하다. 이제는 좀 더 상냥하고 부드러운 아들로 그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 아버지를 꼭 닮은 좋은 남편, 존경스러운 아버지로서 말이다.

 

이선구(60세)

FATHER’S SAY 아들과 친구가 되고 싶은 무뚝뚝한 아빠

 

"우리 아들은 친구들에게 치이면 어쩌나 걱정할 정도로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리더십이 있어서 골목대장으로 동네를 누볐다. 운동을 하거나 장난치다가 다친 적도 많았는데 운동 신경이 워낙 좋아 넘어지는 것도 잘 넘어져 상처 하나 없는 말끔한 무릎만 봐도 괜히 뿌듯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표현하는 게 쑥스러워서 하지 않았더니 어느새 무뚝뚝하고 엄한 아버지가 되어 있더라."

 

사실 내가 생각해도 보수적이고 멋없는 아빠다. 아들이 고등학생 때 머리에 무스를 발라 고슴도치처럼 앞머리를 뾰족하게 세워서 벌컥 화를 낸 적이 있다. 그런데 아내가 “덩치가 작으니까 커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사춘기 아들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너무 미안하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무심한 아빠여서.

이런 아빠 밑에서 컸는데도 우리 아들은 성격이 다정하고 긍정적이다. 한때는 남자가 너무 박력 없는 거 아닌가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요즘 사회생활을 하고 가정을 돌보는 모습을 보면 나에게 없는 면이 있어서 한편으로 대견하다. 또 집안 전체 일을 파악하고 이것저것 생각해 의견을 내놓는 것을 보면서 ‘역시 내 아들’이라는 자부심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안 차는 부분도 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 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다. 이제 아버지가 됐으니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자기계발을 열심히 하면 좋겠는데 여전히 게임에 시간을 쏟고 있더라. 가족들 다 있는 데서 며느리에게 아들이 계속 게임만 하면 내게 일러바치라고 말했다. 요즘은 어떤지 며느리에게 물어봐야겠다.

손주가 태어나면서 아들을 비롯해 가족들에게 많이 유연해졌다는 말을 듣는다. 손에 담배 냄새가 나면 아이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담배까지 끊었으니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아들이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손주는 정말 이렇게 예뻐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예쁘다. 하루라도 사진을 보지 않으면 눈에 가시가 돋을 정도로 매일 보고 싶고 통화하고 싶다. 게다가 손주가 태어난 후 사업이 더 잘되고 의원으로 당선도 됐다. 다 우리 손주 덕이다. 복덩이 같으니.

아들은 나와 달리 아버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안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한들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니 지금처럼 성실하게 하나하나 이뤄간다면 나보다 더 훌륭한 아버지와 남편이 될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살다가 힘이 들어도 항상 나와 가족이 뒤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들의 앞날을 평생 응원해주는 든든한 아버지로 남고 싶다.

이종현(35세)

SON’S SAY 변하고 있는 아버지가 좋은 아들


"어린 시절 아버지는보수적이고 아주 무서운 분이셨다. 식사 자리나 동생과 놀 때 조금만 부산스럽거나 시끄러워도 많이 혼났던 것 같다. 유달리 자식들에게 엄격했던 아버지라 그랬는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덤덤한 부자 사이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데면데면한 관계로 사춘기를 맞이한 어느 날,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된 날을 기억한다. 당시 아버지 사업이 부도를 맞게 되어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좋지 않은 집안 분위기로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나를 따로 불러 하시는 말씀이 “지금 이러이러한 일 때문에 이렇게 됐지만 아빠가 노력해서 좋게 만들 거니까 지금은 불편해도 같이 이겨내자”였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아이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 가족 구성원으로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후로 속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때부터 조금 물렁해진 것 같다.

아버지는 어디서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셨다. 사람들을 지휘하고 이끄는 모습은 나에게는 없는, 본받고 싶은 모습 가운데 하나다. 예전부터 아버지는 향우회 회장, 사무국장, 위원장 등을 역임하시다가 지난여름 경기도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지금까지 두 번의 낙선 후 세 번째 도전에서 이룬 결과다. 나는 당선의 기쁨보다 그 연세에도 꿈을 좇고 계신다는 생각에 마음이 뭉클했다. 하지만 그런 카리스마는 한편으로 불편함을 자아낼 때가 있다. 특히 가족들과 의사 결정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한 번 옳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직진이다. 결과는 민주적인데 과정은 한없이 보수적이랄까. 좀 더 부드럽게 이야기하면서 설득해갈 수 있는데도 불도저가 따로 없다.

그런 아버지가 요즘 변했다. 바로 손주가 태어나면서부터다. 아기를 볼 때 눈높이를 맞추고 목소리 톤도 높여서 말하면 좋다고 했더니 세상에 들어본 적 없는 하이 톤으로 손주에게 어설픈 애교를 피우신다. 게다가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가 집 안 곳곳에 붙여놓은 손주 사진을 보며“잘 자라” 인사한 후에 잠자리에 드신다고. 아버지 안에 그런 다정함이 있었다니.

내 행동과 표정을 따라 하는 아들을 보면 느끼는 게 많다. 내가 좁게 보고 작게 행동하면 내 아들 역시 좁은 세상을 볼 것이고, 내가 크고 넓게 생각하면 아들이 더 큰 세상에서 살겠구나 생각하니‘아버지도 내게 더 큰 걸 보여주고 싶으셨구나’ 깨닫는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아버지와 대화가 늘었다. 아버지 역시 함께 어디 가고 싶다는 생각을 슬쩍 내비치신다. 아들이 좀 더 자라면 아버지와 ‘부자 여행’을 가야겠다. 아들아 빨리 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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