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제발 이러지 마세요

기사 요약글

2013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3개 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직업으로 '항공기 승무원'이 1위로 뽑혔다. 도대체 비행기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전직, 현직 승무원들에게 직접 들은 사례로 재구성한 ‘진상 승객의 유형’

기사 내용

 

 

 

#명령형

 


덩치는 최홍만 같은 남자 손님이 무지막지하게 큰 짐을 통로에 턱 내려놓고 딱 한마디 했다. “올려” 어르신도 마찬가지지만 젊은 사람의 반말은 특히 기분 나쁘다. 낑낑거리며 들어보려다 결국 “죄송하지만 같이 올려주실 수 없겠냐”고 부탁 했더니 다짜고짜 네가 할 줄 아는 게 대체 뭐냐며 소리를 지른다.

 

순간 승객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얼마 전 승무원이 짐을 올릴 때 표정을 찌푸려 기분이 나빴다는 항의가 들어온 터라 마음이 더 무겁다. 동료는 짐이 무거워 표정이 일그러졌을 뿐이라고 했다. 당황스럽지만 침착하게 손님의 눈치를 살폈다. “손님, 제가 불편하게 해드린 게 있습니까?” 그제서야 남자가 주절주절 하소연을 시작한다. 자기는 덩치가 커서 넓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좌석여유가 없다며 바꿔주지 않은 게 불만이었다. “손님, 그러셨습니까, 제가 대신 사과 드립니다”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했더니 그제서야 누그러진 기미가 보인다. 오늘도 힘든 비행이 예상된다.

 

 

#황당형

 

 

왜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을까. 어째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재킷을 벗어 건네며 비싼 옷이니까 이코노미 말고 퍼스트 옷장에 걸란다. 여긴 이코노미 좌석인데. 식사는 됐고 커피나 한 잔 타오라던 그는 화장실 수도꼭지가 불량이라 옷이 젖었으니 지금 당장 고쳐 놓으라는 억지까지 부린다. 비행시간이 이렇게 긴데 왜 승무원들은 옷을 안 갈아입냐는 항의에선 할 말이 없다.

 

식사는 됐다더니 얼마 후 배가 고프니 일등석에 제공되는 닭고기 메뉴를 요구한다. 금지규정이지만 단칼에 거절하면 화를 낼 것 같아 “이미 식사시간이 지나 메뉴가 떨어졌을 수 있다”고 둘러대자 회사에 컴플레인을 걸겠다며 서류를 가져오란다.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 지친다.

 

 

 

 

#성추행형

 

 

사례1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중견 그룹의 부사장이 비즈니스 석에 탑승했다. 계속해서 양주를 마셔대던 그가 기껏 콜 버튼을 눌러놓고 예쁘장한 아가씨 얼굴이 보고 싶어서 불렀다는 황당한 소리를 한다. 사람을 위 아래로 훑으며 키가 크네 마네 하는데 너무 불쾌해 담당 직원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사례2

 

나름 잘 알려진 시사평론가가 계속해서 후배에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추근댄다. 참다 못해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얘기까지 전했는데 “누구는 결혼 안 할거냐”며 능글능글하게 받아 친다. 하기야 공항에서 기습적으로 승무원의 핸드폰을 빼앗아 전화번호를 확인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뺨이라도 한 대 때려야 할 만한 상황이 많지만 우린 승무원이니까 웃으면서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해야 한다.
 

 

사례3

 

기내 면세물품을 팔고 있던 중이었다. 단말기에 승객의 신용카드를 긁는데 가슴 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싶어 봤더니 한 남자손님이 내 가슴을 만지고 있는 게 아닌가. 큰 소리로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하고 정색을 했는데도 무안해하기는커녕 “내가 아가씨 이름이나 좀 보려고 한 건데 뭐 이런 걸로 화를 내냐”며 되려 큰소리다. 옆에 있는 다른 남자와 웃음을 주고 받는데 수치심에 몸이 떨렸다. 그 동안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거나 엉덩이를 친 경우는 있었어도 가슴을 만진 건 처음이었다.

 

나는 한국인으로 동남아 항공사에 취업한 케이스인데 나를 현지인으로 착각해 승무원 몸매가 좋다는 둥, 살결이 뽀얗다는 둥 낯뜨거운 얘기를 주고 받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손이 벌벌 떨린다. (승객이 여성 승무원을 성희롱 하는 사례는 이 밖에도 많다. “나 무서우니까 좀 안아줘, 오늘 밤에 만나자”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도적으로 승무원의 신체를 만지거나 볼에 입맞춤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폭행형

 


승무원에게 손을 대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다. 한 번은 “게이트에서 다 확인했는데 왜 또 귀찮게 티켓을 보여달라느냐”며 끝까지 티켓제시를 거부하던 한 승객이 주먹으로 승무원의 얼굴을 가격한 일이 있었다. 더 황당한 건 그런 손님을 탑승시킨 채 목적지까지 갔다는 것. 몇 년 전 제주에서 출발한 국내선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 승무원 폭행은 정말 엄하게 다스려야 된다.

 

 

 

 

서비스냐 안전이냐?

 

 

아무리 서비스도 좋다지만 승무원들은 왜 이런 비이성적인 요구에 웃음으로 응답할 수 밖에 없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고객만족, 고객감동 서비스를 표방하고 나선 기업문화에 있었다.

 

항공사 6년차 승무원 최모씨의 말이다. “핸드폰에 회사 전화번호가 뜨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혹시 내가 비행하다 뭐 실수한 게 있었나? 그래서 누가 회사에 항의라도 한 걸까? 별별 생각이 다 들죠. 만약 고객이 내 이름 앞으로 항의를 넣었다. 그럼 진짜 회사 생활 피곤해지는 거에요. 좀 중하다 싶은 사례면 한 두 세달 정도는 쉬는 날도 없이 회사에 불려 다녀야 되고요. 불만 사례에 따라 징계 등급을 매기는데 아예 진급 자체가 안 되는 심한 타격이 오기도 해요.

 

진짜 힘든 건 나 때문에 팀 전체평가에 악영향을 준다는 건데 사람인 이상 자기한테 피해가 오면 벌써 탓을 하게 되잖아요. 정상적인 조직생활이 힘들어 지는 거죠. 그러니 더럽고 치사해도 그냥 웃는 거에요. 회사에서 서비스 정신을 강조하지만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는 서비스라기 보단 항의 받지 않도록 몸 조심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어요. 승무원 자살이 종종 일어나는 거 아시죠? 개인적인 고통도 있었겠지만, 승객, 회사에서 오는 이런 압박감도 분명 큰 몫을 할거에요.”

 

 

 

 

‘서비스’에 가려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승무원의 존재 목적은 ‘안전’에 있다. 승무원 예비 교육에서조차 안전교육 보다 스마일 교육에 더 공을 쏟고 있는 실정이니 법까지 들먹여 가며 ‘고객님’을 잡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때문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연맹 항공협의회는 과거 “승무원의 최우선 업무는 안전 활동”이라며 “무릎 꿇기 등의 노예 서비스를 폐지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항공노동자들의 정당한 자기 방어권을 제한하는 각종 평가제도를 개정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당하고도 웃어야 하는 승무원들의 뼈아픈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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