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의 심리학,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기사 요약글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의 저자 정신과 전문의 양창순 박사의 마음 다스리기.

기사 내용

 

 

어느 산속마을에 이리와 여우가 살았다. 둘은 사이가 나빠 티격태격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마을의 다른 동물들도 둘 사이 잦은 마찰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어느 날 마을의 리더인 사자가 둘을 호출했다. 여우가 사자의 거처에 도착하니 이리가 먼저 와 있었다. 여우는 이리와 사자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재빨리 몸을 숨겼다. 이리는 사자 앞에서 여우 흉을 보는 데 열중해 있었다.

 

이리는 없는 이야기까지 마구잡이로 지어내는 중이었다. 뚜껑이 열린 여우는 당장 뛰어 들어가 이 상황을 바로잡기로 했다. 그러나 앞발을 내딛다 말고 급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평소 사자가 지병이 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여우는 몹시 억울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그리고 이리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린 다음 사자에게 진중한 자세로 고했다. 사자가 앓고 있는 병을 고치려면 이리 가죽을 둘러쓰는 방법밖에 없다고. 평소 꾀바르고 경박한 여우가 그토록 진중하게 구는 것을 본 사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고, 결국 이리는 죽은 목숨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짐작했겠지만 출처는 이솝 우화다.

 

 

 

 

살다 보면누구나 이 여우의 처지가 되는 경우가 여러 번 있다. 왜 내가 참아야 하는지 억울한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상담을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도 ‘왜 나만 참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때마다 이 여우를 생각한다. 참아서 득을 본 ‘꽤 훌륭한’ 예이기 때문이다. 즉, 참는다는 것은 비생산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을 절제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때를 기다리는 일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여우의 사례에서 보듯이 딱 한 걸음이다.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도 대부분의 상황은 똑바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똑바로 볼 수만 있어도 인생의 많은 부분이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왜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왜 나한테만 이런 힘든 일들이 생기는 걸까?’ 우리는 자주 이렇게 한탄한다. 어찌된 셈인지 나만 빼고 사람들은 다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만 빼고 다들 돈도 잘 버는 것 같고, 나만 빼고 다들 성공한 인생을 척척 살아가는 것 같은데, 언제나 나만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쓸데없는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한번 그런 생각이 들면 웬만해서는 멈추기가 어렵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사교성이며 친화력이며 유머 감각까지 어떻게 나만 빼고 그렇게 다들 잘났는지. 결국 나만 어리석고 실수투성이라는 생각에 휩싸인다. 아무리 나 자신이라고 해도 봐주기가 어렵다.

 

이런 생각은 주변 사람들을 봐도 그렇고, 임상경험을 봐도 그렇고 예외가 없는 것 같다. 나이도 성별도 별로 상관이 없다. 사회적 지위나 돈이 있으면 좀 다를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생각보다 불필요한 것들에 발목을 잡힌 채로, 생각보다 힘들게 살아간다. 정신과 전문의인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다가 ‘모든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나를 구하려면?’이라는 질문이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앞서 소개한 이솝 우화가 떠올랐다. 여우처럼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선다면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한 나의 반응을 조절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으로 충분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나만 억울해서 죽을 것 같고, 나만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돌아버릴 것’ 같은 순간에 여유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쉬운 일이라면 굳이 지금 이 지면을 할애해서 긴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쉽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이므로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일어난 일에 대한 반응도 제각각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다. 저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그와 관련해 적절한 명언을 남겼다. ‘인간이 고통 받는 것은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 때문이다.’ 요즘식으로 풀이하자면 ‘힘든 일 자체가 스트레스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한 나의 생각이 나를 힘들게도 만들고 즐겁게도 만든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한 걸음 물러나서 현재 내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의 반응을 조절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변화는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그 한 걸음을 시작으로 때로는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다. 여우가 목숨을 구한 것처럼.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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