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제, 화해했습니다

기사 요약글

한 부모 밑에서 피를 나눈 형제자매는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한편 기대와 애정이 큰 만큼 서로에게 실망하거나 화를 내는 일도 잦은 것이 사실입니다. 사소한 대립이 심각한 다툼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의절한 채 서로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요. 어쩌다 받은 상처를 양보와 이해로 봉합한 형제들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기사 내용

 

 

 

부모 봉양 문제로 인한 동생과의 갈등

배병현 (가명 64세)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지도 벌써 5년이 됐다. 막내가 세 살 때 병으로 남편을 잃고, 남의 집 빨래며 생선 장사 등으 로 억척스레 5남매를 길러온 양반이다. 안타깝지만 거동이 불편한 데다 약간의 치매 증상까지 찾아온 어머니를 집에서 모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장남인 내가 곁에서 식사도 챙기고 재활도 돕고 싶지만 생업을 포기한 채 부모 봉양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동생들과 상의해 어머니를 고향의 한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했는데 그 과정에서 바로 아래 동생과 마찰이 생겼다.

 

고지식한 데다 어딘지 모르게 꼬인 구석이 있는 그 녀석은 요양 병원이 거론되자마자 얼굴을 붉혔다. “장남이 있는데 왜 어머니를 남의 손에 맡겨야 하냐”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조카들이 다 출가했으니 방이 남을 것이고, 형수가 집에 있는데다 아직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지 않다는 둥 나름의 이유를 조목조목 대며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당시 아내는 손목 염증으로 고생 중이었고 나 역시 직장에서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 등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런 사정을 알 턱이 없는 동생은 단지 장남이라는 이유로 나를 몰아세우기 바빴다. 다행히 녀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 뜻을 따랐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동생도 내 반응을 떠보려고 그냥 한번 해본 소리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점이 더 화가 났다.

 

고향에서 제수씨와 함께 작은 과일 가게를 운영하는 동생은 서울에 있는 나나 다른 동생들에 비해 어머니를 자주 찾아뵈었다. 모범생처럼 자랐던 다른 형제들과 달리 학창 시절 술을 먹거나 싸움을 하는 등 크고 작은 문제를 자주 일으켰던 녀석이 철들고 나서는 유독 어머니를 위했다. 가족 채팅방에 어머 니의 소소한 모습이 담긴 사진, 동영상을 올리거나 건강 상태, 근황을 틈틈이 전하는 등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 고마웠지만 부담이 되는 적도 많았다.

 

술을 먹고 식구들 한 명 한 명을 저격하며 죄책감을 유발한 것이다. ‘회사 일이 바쁘다지만 매 형은 왜 병원에 찾아와 보질 않느냐. 처가 일에 관심 없는 건 내 진작부터 알았다’, ‘엄마가 적금까지 깨서 작은형 집 대출금을 보탰는데 형은 왜 그 고마움도 모르고 엄마에게 신경을 안 쓰냐’ 휴대폰에 녀석의 도발적인 메시지가 뜰 때마다 싸움과 사과가 반복됐다. 그러다 머지않아 다른 동생들도 이골이 났는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데면데면 멀어져갔다.

 

냉대와 무시로 점철된 우리 남매들 사이에 변화가 일어난 건 지난해 봄의 일이다. 폐렴으로 어머니의 상태가 나빠지면서 다들 주말마다 병원에 모였는데, 어느 날 막내의 제안으로 다 같이 어머니의 빈집으로 몰려가게 된 것이다.

 

약속이나 한 듯 이불을 털고, 방을 닦고, 환기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나 와 동생들은 어릴 적 옹기종기 붙어살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농담과 웃음을 주고받았다. 훈훈한 분위기에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는 중에 녀석은 겸연쩍은 얼굴로 그간의 일을 사과 하고 싶다며, 앞으로 술 마신 채 연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 너무 많다고, 그게 민망 해서 오히려 더 화를 냈다며, 본심과 다른 거친 말을 쏟아놓고 뒤돌아 늘 후회했노라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진심을 전할 기회가 생겨 기분 좋다고 너스레를 떠는 녀석에게 화를 낼 만큼 모진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날 이후로도 우리는 크고 작은 언쟁을 벌이곤 했지만, 예전처럼 무시나 경멸로 상처를 주지는 않는다. 서로의 본심에 대한 확신이 생겼기 에 가능한 일이었다.

 

 

 

 

재산 분배로 인한 오빠와의 갈등

성현주 (가명 55세)

 

 

외아들로 자라 늘 외로움을 탔던 아버지는 유독 동기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덕분에 우리 3남매는 어른이 되어서도 함께 전국 곳곳을 여행할 만큼 사이가 좋았다. 그런 호시절이 있었건만 각자 가정을 일구고 바쁘게 살다 보니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서로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위안으로 삼으며 다들 잘 살고 있겠거니 한 것이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오빠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고, 올케와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를 듣게 된 건 대학가에서 옷 가게를 하던 남편의 사업이 한창 활기를 띨 무렵이었다. 마침 가게 확장을 할 계획이라 오빠에게 장사를 배워보지 않겠냐고 물었건만 손아래 동서 밑에서 일할 수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딴에는 생각해서 한 제안인데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도 야속했고 무엇보다 장사 자체를 깔보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져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기저기 구직활동을 하는 눈치였던 오빠는 기어이 사업을 하겠다며 증여를 요구하고 나섰다. 신도시 개발과 함께 10억 가까운 토지 보상금을 받은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사업 자금을 마련해주셨는데, 그 돈으로 엉뚱한 주식 투자에 뛰어들어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결국 무일푼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올케와 이혼까지 해 홀아비 신세가 된 오빠는 본가로 들어와 부모님의 주름살을 늘렸다. 골방에 틀어박혀 게임과 술, 담배에 기대 살던 오빠는 나나 언니가 엄마에게 쥐어준 용돈까지 넘보는 듯했다.

 

오빠에게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낀 건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시며 시작된 재산 분배 때문이었다.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재산 얘기를 꺼낸 오빠는 선심 쓰듯 언니와 나에게 각각 3천만원을 주겠다며 거드름을 피웠고 현재 살고 있는 4억원가량의 단독주택과 아버지의 예금은 자신의 몫이라며 어머니는 걱정 말라는 여유까지 부렸다.

 

얄미웠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언니와 나는 법정까지 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른 채 3천만원만 받고 지리멸렬한 싸움을 피했다. 진작 오빠에게 학을 뗀 남편과 형부는 아예 입을 닫았다.

 

천만다행으로 주식에서 손을 떼고 작은 카페를 차려 그럭저럭 살고 있는 오빠였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선 언니와 나는 늘 냉정하게 그를 대했다. 남매 사이의 불편한 기색을 느낄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던 엄마는 그래도 자식이라고 오빠를 감쌌는데 그게 또 꼴불견이라며 쏘아댄 적도 많다.

 

언제까지고 위풍당당한 허세를 떨 것 같던 오빠가 위암에 걸려 수술을 받게 됐다는 연락을 받은 게 일 년 전이다. 바짝 말라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짠했고, 무엇보다 암으로 남편을 잃어본 엄마가 애면글면하는 게 가슴 아팠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뭔가 깨달은 바가 많아 보이는 오빠는 언니와 내가 병실에 들어설 때마다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누구 하나 드러내 사과하고 용서한 적은 없지만 점차 서로가 서로에게 많이 부드러워진 걸 느꼈다. 눈빛만 봐도 의중을 알아차리던 젊은 그 시절처럼 우리에게는 딱히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너희들 잘 지내는 모습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 좋다”는 불쌍한 우리 엄마 때문이라도 미우나 고우나 서로 보듬어야겠다.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언니와의 갈등

송희경 (가명 52세)

 

 

언니에 대한 나의 자격지심은 역사가 꽤 길다. 어릴 적 세 살 위 언니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자매인데 어쩜 이렇게 안 닮았느냐’는 소리를 숱하게 들어온 나는 그 말이 생김새의 차이가 아니라 외모의 우열을 에둘러 한 것임을 언제부턴가 깨닫게 됐다.

 

예쁜 데다 공부까지 잘했던 언니는 정해진 코스처럼 무난히 명문대에 들어갔다. 프릴 블라우스를 곱게 차려입고 집을 나서던 언니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꼭 여대생이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턱없이 낮은 성적과 때마침 어려워진 아버지의 회사 사정이 더해져 나는 허름한 회사의 경리로 취직했을 뿐이다.

 

내세울 것 없는 나와 달리 언니는 나날이 대단해졌다. 졸업과 동시에 큰 무역회사에 취직해 부모님의 기를 한껏 살려주더니 몇 년 되지 않아 자동차 부품을 생산한다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간 것이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밍크코트에 백화점에서나 볼 법한 비싼 핸드백을 들고 친정에 들어서던 언니의 화려한 모습이 나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회사에 드나들던 거래처 직원과 결혼해 그럭저럭 화목한 가정을 꾸렸는데도 나는 늘 집 크기를, 남편의 자상함을, 아이들의 성적을 내심 비교하며 언니를 의식했다.

 

인생은 롤러코스터라고 했던가. 순탄하게 돌아가던 사돈어른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언니는 하루아침에 서민으로 전락했다. 안타까우면서도 묘한 위안과 동질감을 느끼는 나 자신이 어찌나 경멸스러웠는지 남들은 모를 것이다. 고급 아파트에서 허름한 빌라로 집을 옮긴 언니는 친정에 찾아와 분식점이라도 시작하겠다며 돈을 부탁한 모양이었고, 원래부터 큰딸이라면 끔찍이 위하는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팔았다.

 

쉬쉬하던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나는 언니를 찾아가 미친 여자처럼 악다구니를 썼다. 어떻게 부모 노후 자금에 손을 대느냐고, 언니 시집갈 땐 기죽지 말라고 없는 돈 쥐어짜 혼수 해주던 그 양반들이 나한텐 얼마나 박하게 굴었는지 아느냐고, 어릴 때부터 나는 별 볼 일 없는 자식이라 숱하게 차별당했다고. 그 뒤 며칠을 내리 앓은 나나 얼빠진 표정으로 그 독한 말을 다 듣고 서 있던 언니나 감히 서로에게 연락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엄마가 울며불며 속상해한 지 일 년째, 어렵게 차린 분식점마저 접었다는 언니의 소식을 듣고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다. 원망이나 욕, 그것도 아니면 무시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각오했는데 언니는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스트레스로 공황장애까지 생겼지만 그 와중에도 동생인 네 걱정은 되더라며, 그간 의도하지 않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하다고 울먹였다. 언니를 생각하며 미안함과 후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미움과 원망을 되풀이했던 나는 복잡한 감정이 일순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그간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매듭을 풀어야 할지 고민했는데, 언니의 진심 어린 목소리를 확인하는 순간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녹아내렸다. ‘아! 우리가 핏줄이었지. 그래서 이렇게 쉽게, 금방 마음의 빗장이 풀어지는 걸 테지.’ 이것저것 재고 따지며 망설이느라 흘려보낸 시간이 그렇게 무의미할 수 없었다. 서로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 우리 자매가 전보다 훨씬 더 가깝고 애틋한 사이가 됐음은 물론이다.

 

혹시 외면한 채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면 딱 한 발만 내딛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처럼 허무하리만큼 너무 쉽게 응어리가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핏줄이란 그렇게 오묘한 끌림이 있는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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