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학자 최재천 교수가 말하는 ‘인간의 번식 후기를 위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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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생태원 원장 최재천. 대학에서조차 보직을 맡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최재천 교수가 2016년까지 가지고 있던 직함이다. 경영과는 거리가 먼 과학자지만 그는 지난 3년간 자신이 꿈꾸고 기획한 국립생태원을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고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이화여대로 돌아왔다.

 

그의 연구실 이름은 ‘통섭원’이다. ‘모든 사물은 다 통한다’는 뜻. 통섭원 문에 색종이를 오려 만든 하늘색 시계가 붙어 있었다. 시계에는 삐뚤삐뚤한 손 글씨로 ‘할아버지 선생님께’라고 적혀 있었다. 제자의 딸이 10년 전 만들어준 시계다.

 

연구실 내부에 들어서면 양쪽 벽면을 꽉 채운 책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가득했고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희귀본도 많다. 책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많은지 ‘책을 빌려 간다’는 내용의 포스트잇이 곳곳에 붙어 있다. 통섭원은 작은 도서관인 셈이다.

 

책상 벽면에는 수박, 생쥐, 나비 등으로 구성된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있었다. 곳곳에 팬레터가 붙어 있는데, 그중 하나에 유독 관심이 갔다. ‘대한민국 여자들이 사랑하는 남자, 최재천 교수님에게’라는 롤링 페이퍼였다. 고은광순 씨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여성계 인사들의 글이 써 있었다. 궁금해하는 차에 가방을 멘 최 교수가 여유롭고 평화로운 웃음을 지으며 통섭원에 들어왔다.

 

 

여성계 인사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2005년 호주제 위헌 소송 당시 헌재에서 최종변론 일에 증언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법이 과학에 의견을 묻는 의미 있는 자리였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재판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헌재 역사상 최초로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15분 강연을 했어요.

그 강연을 위해 헌재를 미리 답사했고, 재판관들이 어떻게 나올지 혼자 시뮬레이션도 수없이 했지요. 제 예상대로였어요. 그리고 마무리 발언으로 보편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죠.

‘자연과학자로서 제가 관찰한 어느 동물 사회에도 호주제라는 것이 없다. 만약에 있어야 된다면 자연계에서는 번식의 주체가 암컷이기에 암컷이 중심일 수밖에 없다. 수컷이 중심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문화권에 골고루 나타나는 습성이면 그게 우리 종을 대변하는 습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 세계에서 호주제를 가진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자연과학자인 저로서는 이것을 인간 보편적인 습성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죠.

결국 위헌 판정이 나고 저는 그해 남성으로서 유일하게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어요(웃음). 그때 여성계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이 써준 글이에요.

 

 

지난 일이지만, 답사하고 예행연습까지 한 것이 더 놀랍습니다. 삶도 철저히 준비하는 편인가요?

 

내가 우리 사회 기준으로 성공한 축에 속한다면 ‘그 비결이 뭘까’ 생각해봤어요. 별것 없는데 하나 있다면 시간 관리예요. 하버드에서 배운 것입니다.

하버드 학생들은 하루에 많게는 10가지가 넘는 일을 해요. 새벽에 일어나 축구하고, 수업 듣고, 실험실에서 일하고, 오케스트라 활동하고 대학 내에서 사회활동으로 너무 바빠요. 그런데 시험 때면 당당해요.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올까 궁금했어요.

제가 기숙사에서 사감을 했는데 하루는 담당한 학생이 파티를 해서 기숙사 방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룸메이트가 밤 12시 즈음에 들어와요. 술 한잔하랬더니 ‘레퍼런스 때문에 안 된다’고 들어가요. 저는 이해가 안 가 데리러 갔죠.

‘뭘 하는데, 맥주 한 잔도 못한다는 거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이 과제를 다음 주까지 내야 해서 못 마신다’는 겁니다. 그 친구가 너무 당당하게 이야기해서 순간적으로 ‘야, 이거 뭐가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와 점심 먹으며 물었어요. ‘오늘 할 일을 일주일 전에 마친다’는 거예요. 가령 내일 내야 할 리포트를 일주일 전에 써놓고 그 내용을 조금씩 다듬어 A를 받는다는 겁니다. 일주일을 앞당겨 사는 거죠.

놀라서 다른 학생들에게 말했더니 다들 “저도 그런데요” 하는 겁니다. 왜 저렇게 여유만만할까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죠. 저도 그 방법을 이용했죠. 20년 넘게 일주일을 앞당겨 살아왔어요. 예를 들면 일간지에 매주 칼럼을 기고하는데 일주일 전에 써놓고 제출할 때까지 50번 정도는 고쳐서 줍니다.

 

 

일주일을 앞당겨 생활하려면 어떻게 훈련해야 합니까?

 

쉽게 말해 2주 전에 일주일 남았다고 계속 머리에 입력하는 거죠. 자꾸 속여야 해요. 열심히 속이면 어느 날부터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돼요. 인간은 유일하게 자기를 속일 줄 아는 동물이거든요.

제가 아직까지 관찰한 바 이 세상에 다른 동물은 자기기만을 못 해요. 하지만 우리 인간은 할 수 있어요. 난 할 수 있어!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다고 거짓말하면서 용기를 북돋잖아요. 자기기만 기술을 개발하면 자기가 속아요.

 

 

지킬 수만 있다면 삶이 굉장히 여유롭겠는데요.

 

여유만만해지죠. 게다가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일주일을 벌어놓으면 시간에 끌려다니지 않아요. 은퇴 이후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주변 사람들과의 호흡을 맞추는 것도 훨씬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자기 스케줄에 여유가 있으면 수시로 남들 일에 낄 수 있어요.

이걸 알려줘도 실제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저는 확신해요. 그렇게 하면 삶의 질이 달라져요. 꼭 한번 도전해보셨으면 해요.

 

 

12년 전에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는 책을 쓰며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조언했습니다. 생물학자가 왜 인생 2라운드에 관심을 가지냐는 오해도 받았을 것 같습니다.

 

모든 생물 중 고령화가 문제인 건 인간밖에 없어요. 연어는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알 낳고 죽어요. 꽃이 시들면 그 식물은 죽는 거고요. 생물은 이 세상에 번식하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번식이 끝나면 모든 생물은 죽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번식이 끝나도 안 죽어요. 다른 생물에게 없는 번식 후기가 있어요. 기간도 점점 길어져요. 그렇지만 번식은 더 못 해요. 남성은 운동 등으로 정자 생산을 좀 더 연장할 수 있지만 여성은 50대 중반에 완경을 통해 타고난 난자를 다 써버립니다.

번식은 여성이 기준이에요. 그러니 200년을 살아도 번식기는 50년뿐인 거지요. 이는 인구학적, 사회적 문제 이전에 생물학적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책도 냈어요. 생물학적으로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근원적인 문제를 찾기가 힘들어요.

 

 

번식 후기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번식기는 자식을 위해 살아요. 그러나 자식이 둥지를 떠난 번식 후기는 드디어 나를 위해 사는 시간이지요. 인류 역사에 그런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예전에는 환갑 근처에 돌아가셨으니까요. 현대인에게는 그 시간이 생긴 거잖아요.

그래서 일단 할 일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평생 한 가지 일만 하다가 갈 순 없어요. 그럼 어떻게 준비하느냐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너희는 인류 역사에서 직업을 7~8가지 갖는 첫 세대가 될 것이다”고 말해요. 그런데 지금은 기껏 한다는 준비가 20대 초반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다예요. 이때 배운 기술로 평생 7~8번 직업을 갈아타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므로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21세기는 지식의 시대이고, 끊임없이 또 배워야 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죠. 끊임없이 새로 배우고 배운 지식을 써먹어야 한다는 겁니다.

 

 

배움이 새로운 기회를 보장할까요?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특히 지식의 반감기가 짧아져서 20대 초반에 배운 것을 60대 중반에 써먹으려면 효용가치가 없어요. 미리 배워본들 소용이 없는 거죠. 어쩔 수 없이 평생교육의 시대가 된 겁니다. 배우면서 새로운 일을 하고 다시 배우면서 다시 새로운 일을 하는 거죠.

 

 

노후 준비가 잘 돼 있으면 일을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요?

 

착각해선 안 돼요. 아무리 부자라도 사람이 100세까지 40년을 놀고 먹을 수 있을까요? 지겨워서 못 삽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살할 겁니다. 일은 경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정신적, 사회문화적 문제도 포함돼요.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의 존재감이 있어야 해요. 번식 후기에는 하다못해 노는 것도 준비해야 해요.

 

 

노는 것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하루는 외부 강연을 하는데, 노는 것도 준비하라고 말하니까 어느 할머니가 손을 들더니 주변을 바라보고 “노는 것도 10년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해요. 학교 교장 선생님이셨는데, 당신이 주부 볼링 클럽의 회원이래요.

그분이 “내가 퇴임하고 30~40대와 볼링을 친다면 어떨까? 처음에는 다들 ‘교장 선생님 오셨냐’고 반기지만 실력이 형편없으면 나중에는 ‘아니, 퇴임했으면 집에나 있지 여긴 왜 와’ 하면서 환영을 못 받을 것이다. 그걸 예상하고 10년 전부터 즐길 놀이를 개발해 볼링을 잘 쳐요. 그래서 젊은 주부들이 ‘왜 이렇게 잘 치냐’며 함께 치고 싶어 해요. 사람들의 숲에서 놀고 싶으면 미리 준비하세요” 하는 겁니다.

제가 뒤에서 박수를 쳤습니다. 저보다 더 훌륭한 강의를 하셨다고요. 그분 말씀처럼 번식 후기를 위해 노는 것도 다부지게 준비해야 합니다.

 

 

자연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는 주장도 많습니다. 어디서 살아야 할까요?

 

미국의 맨해튼에 사는 사람은 대부분 노인들이에요. 나이가 들면 전원생활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일단 병원이 멀어요. 그리고 나이가 들면 누가 나를 안 찾아와요. 아무리 마당발이라도 일이 벌어지는 곳에 내 발로 찾아가야지, 나를 찾아주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내 한복판에 사셔야 해요.

 

 

단절과 고립은 나이가 들면서 감내해야 할,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요?

 

반값 등록금이 이슈였을 때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홍익대 총장님들께 공동 프로젝트를 제안했어요. ‘신촌을 실버타운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었죠. 노인은 노인끼리 모여 사는 것을 싫어해요. 젊은 사람과 놀고 싶어 해요. 같이 놀지 못해도 젊은 사람 옆에 있고 싶거든요.

미국의 한 연구팀이 은퇴한 사람들에게 ‘제일 살고 싶은 곳이 어디인가’를 조사했는데 1위가 ‘대학 캠퍼스 옆’이었어요. 신촌에 대학이 네 곳이에요. 여기를 젊은 학생들과 노인들이 같이 얽혀 사는 실버타운으로 조성해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면 어떨까 싶었죠.

나이 든 사람들은 재산의 절반을 대학에 기부하고 강의든 도서관이든 자유롭게 이용하면서 젊은이들 곁에서 살고, 젊은이들은 그들의 기부금으로 대학을 다니는 모습, 얼마나 멋집니까?

 

 

생물학자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을 연구하는 학자 같습니다.

 

그게 생물학이에요. 생물학은 범위가 넓습니다. 제가 또 생태학자잖아요. 호주제 폐지를 이야기하고, 이모작 인생을 이야기하고, 통섭을 이야기하니까, ‘왜 생물학자가 그런 것을 하느냐’ ‘외도가 심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죠. 저 바람 안 피웠거든요(웃음).

우리나라에서는 생물학 하면 세포, 초파리, 개구리만 생각해요. 그렇다면 인간은 무생물인가요? 여성 문제, 고령화 모두 생물학의 범주에 있고, 인간 삶의 모든 것이 다 생물학이에요.

 

 

자연과학자인 교수님에게는 어떤 죽음이 웰다잉인가요?

 

제가 죽기 전에 불후의 저술을 남기겠다고 떠든 것이 있어요. 제목이 ‘생명’이에요. 몇 천 페이지짜리 책을 쓰겠노라 다짐하고 조금씩 쓰고 있는데, 생명을 바라보는 모든 각도를 총정리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지금까지 정리한 바에 의하면 생명의 보편적인 속성이 죽음이에요. 이 세상에 모든 생명은 죽음을 맞이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생명의 본질이 죽음이죠.

그런데 이건 ‘개체’ 입장에서 본 거고,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번식하는 한 생명은 안 죽어요. 내 아들의 몸에 내 유전자가 벌써 전해졌거든요. 내가 죽어도 내 유전자는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어요.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지구에 사는 생명의 역사는 태초에 생명의 늪에서 자기복제를 시작한, DNA인지 RNA인지 모르지만 그 녀석의 일대기예요. 버섯으로, 비둘기로, 인간으로 변신하면서 지금까지 오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생명은 안 죽어요. 한계성과 영속성을 동시에 갖죠. 죽음은 ‘나라는 개체의 죽음이지 내가 죽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전통사상에 ‘혼’이란 말이 있어요. 어쩌면 ‘혼이 DNA인가’ 싶어요. 저는 죽었지만 제 혼은 아들의 몸에, 다시 내 손자의 몸에 이어지잖아요.

그래서 죽음은 내 연극이 끝나는 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지요. 삶의 흔적을 남기기보다 마치 이 행성에 오지 않았던 듯 떠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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