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학교 앞 분식집 평가 랭킹 1위, 숭덕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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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학교 앞 분식집 평가 랭킹 1위, 숭덕분식

 

40년 동안 지킨 분식집 평가 1위의 맛

 

Since 1977. 무려 40년이다. 옛날에는 분식집이 좀 많았나. 그러나 이제는 거의 문을 닫았다. 먹거리의 변화다. 치킨과 피자에 밀렸다. 그래도 살아남은 집이 있다. 그게 숭덕분식이다.
“탁자 두 개 놓고 시작했어요. 앉아서 먹는 아이들보다 밖에 서서 먹는 사람이 더 많았죠. 먹고살자고 시작한 가게가 벌써 이렇게 되었네(웃음).”
인터뷰를 하러 일부러 나온 어머니(임경호, 66세)다. 지금은 둘째 딸 엄지영 씨가 대를 이었다. 그이는 가끔 나오는 정도다. 그 대신 남편(엄규복, 74세)이 딸을 도와주러 자주 나오는 편이다. 메뉴가 꽤 있다. 라면과 냉면, 쫄면 같은 면류에 오뎅과 핫도그, 두 가지 버전(?)의 떡볶이가 있다. 김밥도 맛있기로 유명하고 튀김은 2014년<한겨레신문>에서 진행한 서울 시내 학교 앞 분식집 맛 랭킹 조사에서 1위를 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래도 널찍한 떡볶이 판에 더 눈길이 간다. 인터넷 검색을 해도 떡볶이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온다.“국민학교 때 자주 오던 집이야. 떡볶이 진짜 맛있었지” 하는 추억담이다. 분식집은 어린 시절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국민학교’를 나온 세대인 필자는 숭덕분식이 눈물 나게 반가웠다. 옛 분식집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서서 먹는 아이들이 몇 개 더 먹고 그랬지(웃음). 그냥 눈감아줬어요. 배고픈 시절이었으니까요.”
어머니의 마음처럼 푸근하다. 마음 한쪽이 뜨거워진다. 내가 그 시절, 그렇게 서 있던 초등학생이었을 것이다. 맵고 단맛, 그것은 지금도 우리 입맛을 지배하는 엄청난 위력의 맛이기도 하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 펼친 튀김집

 

현재의 자리는 원래 가게가 아니다. 원래 가게는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5만원짜리였다. 돈 벌어서 옮겼을까?
“아니에요. 그 얘기는 긴데. 하여튼 원래 자리에 있던 집이 무너졌어요. 낡아서. 그래서 가게를 뺐어요. 이 자리로 옮긴 게 2001년이에요.”
숭덕분식은 정릉과 길음동 일대에서 유명한 분식집이었다. 이 근처엔 학교가 워낙 많다. 그땐 학생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전교생이 1만~1만5000명이던 시절이었다. 숭덕초교도 그랬다. 한 반에 80여 명씩 15반, 20반이 보통이었다. 2부제 수업을 했고, 저학년은 3부제도 했다.
“학생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우리 애들도 다섯이니까(웃음).”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도시 이주를 늘렸다. 지방의 농촌 인구를 도시로 보내야 했다. 그게 공장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쌀값을 낮게 매기는 저곡가 정책도 한몫했다. 쌀값이 떨어지니 농촌 살림이 피폐해졌다. 도시로, 도시로 청춘들이 몰려들었다. 구미의 공단, 서울의 구로공단 등 수많은 공단에서 물건을 만들었다. 도시에서 사들인 머리카락으로 가발을 만들었고, 수출할 수 있는 건 뭐든 만들어 팔았다. 수출입국, 산업화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학교에 보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친 서울 변두리의 인구 폭발은 그렇게 일어났다. 학교가 모자랐다.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우리도 용인과 금산에서 각기 서울로 온 거예요. 남편과는 저는 제 친정인 용인서 만났지요.”
그리고 임신한 몸으로 서울로 이주했다. 이불 보따리 하나 들고 시외버스를 타고서.
“처음에는 공덕동에 살림방을 얻었어요. 친정아버지가 오셔서‘뭘 도와줄까’ 하시기에 제가 그랬어요. 뎀뿌라 장사하게 연탄아궁이랑 오징어 다리 한 관만 사 달라고. 밀가루 묻혀서 쇼트닝으로 튀겼는데 맛이 있어서 잘 팔렸어요.”
이 집 튀김은 앞서 말한<한겨레신문> 설문에서 1등을 했다. 내력이 있는 튀김인 것이다. 그때 팔던 오징어 다리 튀김은 여전히 있다. 기름은 쇼트닝에서 식물성기름으로 바뀌었다. 쇼트닝은 소나 돼지의 기름으로 굳혀 만드는 유지로, 원래 미군부대에서 나왔다. 한국의 소와 돼지 사육량이 늘면서 국산이 공급되었다.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염려로 중국집과 튀김집의 쇼트닝은 이제 거의 완전히 퇴출되었다. 이 기름은 비누나 소시지 등을 만드는 데 여전히 쓰이고 있다.

 

고난과 결핍이 함께했던 학교 앞 분식 시대

 

처음 가게는 무허가였다. 리어카로 행상을 하다가 단속을 당해 경찰서 유치장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즉결심판을 받고 풀려난 뒤였다. 그때는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고, 이런저런 풍속범과 노점상을 단속해 즉결심판에 많이 넘겼다. 벌금을 내고 풀려나거나 구류도 많이 당했다. 일종의 짧은 구치소 생활이다. 벌금을 못 내면 구류를 살던 시절이었다. 가게를 얻어야 그런 험한 꼴을 덜 당했다. 그래도 무허가였으니 늘 불안했다. 나중에 정식으로 등록하고, 상호를 숭덕스낵으로 냈다가 그 후 숭덕분식으로 개명해 지금에 이른다.
“떡볶이를 우린 첨부터 순 쌀로만 했어요. 무궁화제분 같은 밀가루 제품 쓰는 경우도 많았는데 우린 안 했어요. 떡은 쌀이다. 이런 생각이 있었으니까. 아내가 그 좁은 가게에서 고추장도 다 담가서 썼어요. 지금도 순 쌀이에요. 건강한 음식인지는 모르지만, 정직하게는 했어요.”
남편의 설명이다. 정직. 부부의 눈길과 표정에 써 있는 표식이다. 1980년대 초에 즉석떡볶이의 인기가 서울 시내에 슬슬 퍼지기 시작했다. 신당동에서 시작, 광화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분식집에서 디제이가 음악을 틀어주는 경쟁이 벌어진 것도 광화문 시대였다. 그즈음에 숭덕분식도 즉석떡볶이를 시작했다. 검고 반짝거리는 우묵한 프라이팬에 당면과 떡, 양배추와 오뎅에 매운 양념을 넣어 끓이는 방식이었다. 이 요리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화력의 변화였다.
“처음에 연탄아궁이가 여덟 개였어요. 이것저것 끓이는 데 화력이 많이 쓰였어요. 그러다가 가스가 나오면서 즉석이 가능해졌지.”
1인분에 400원. 50원으로 시작한 일반 떡볶이가 100원 정도 하던 때였다. 가족 외식의 시대가 열리기 전이었다.‘마이카’라는 자가용도 없었다. 아버지는 늦게 귀가했고 늘 고단했다. 아이들은 용돈으로 알아서 주린 배를 채웠다. 그때가 바로 학교 앞 분식 시대였다.
“눈만 뜨면 가게에 나왔어요. 하루 종일 일하고 밤 열한 시, 열두 시에 닫고 우리는 남은 일 처리하고 새벽 한두 시에 집에 들어갔어요. 아휴, 지금은 그렇게 못 해.”
고난과 결핍의 시대, 1980~90년대에 들이닥친 풍요를 앞둔 그 시절의 이야기였다. 떡볶이는 그렇게 우리에게 왔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수많은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만들어 낸 최고 인기 음식이기도 하다.‘B급 미식’의 정점에 있는 바로 그 떡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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