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내용
‘문향과 예향의 고을’, 강릉을 잘 아는 이들은 흔히 그렇게들 부른다. 이곳에 뿌리를 둔 이들이 조선의 정신과 이념 그리고 문학과 예술을 대표하며, 오늘날에도 우리 삶의 지표로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말이다.
매월당 김시습에서부터 사임당과 율곡 모자, 난설헌과 균 오누이, 초허 김동명 그리고 향교의 선비들까지.
‘강릉산수갑천하’라고 했던가. 강릉의 천하제일 산수가 길러낸 시대를 넘나드는 인재들. 제법 거드름을 피울 만도 하지만, 그럼에도 강릉은 그 오랜 세월의 광영을 기름지게 내색하지 않는다. 강릉도 그들도, 긴 세월 우리의 마음속에서 떠나가지 않는 이유다.
강릉의 보물, 오죽헌
신사임당과 이율곡 두 모자는 나란히 우리나라 화폐의 모델로 지금도 우리네 삶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모자가 이토록 존경받는 사례는 세계 최초의 일로 그들의 이름은 이 땅 위에 감히 거룩하고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 신사임당은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여성상으로 추앙받는다. 조선 후기 강릉부사와 영의정을 지낸 정호는 사임당을 군자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여자라도 덕이 이미 온전히 갖추어졌고 재주 또한 통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면 어찌 여자라하여 군자라 일컫지 못하겠는가!”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사임당은 도덕적으로 올발랐고 한 분야가 아닌 다방면에서 골고루 뛰어났다. 지극한 효녀요, 어진 아내, 7남매의 훌륭한 어머니였으며 학문이 깊고, 시문과 그림, 글씨, 바느질과 자수까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도달한 여성이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백대의 스승 율곡을 키워낸 삶이다.
강릉을 대표하는 문인 허균은 ‘율곡선생의 학문은 바로 어머니 사임당의 태교에서 얻어졌다’고 했다. 율곡은 훗날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그리고 행하지도 말라고 한 사임당의 태교법이 선비가 몸을 닦는 데에도 필수 덕목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철학과 사고를 그대로 이어받아 크게 성장한 아들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모자의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오죽헌'이다. 기와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하여 오죽헌이라 이름 지어진 이 집에서 사임당은 서른 세 살 되던 해에 율곡을 낳았다. 용이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방 '몽룡실'에는 지금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오죽헌에 남아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어제각'에서 찾을 수 있다. 1788년 정조 임금은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와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궁궐로 가져오게 하여 친히 살펴본 뒤,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리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보냈다. 이 명을 받아 당시 지은 집이 바로 어제각이다. 후세의 임금마저 찬사한 율곡 이이 선생의 면모를 가만히 되새겨볼 수 있는 곳이다.
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은 강릉에서도 가장 경치가 뛰어난 경포대 근처 호숫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초기 대학자 서거정은 우리나라 제일 경치는 관동이고, 관동에서 강릉이 으뜸이며, 그중에서도 경포대와 한송정이 제일이라고 했다. 제일의 경치에서 피어난 모자의 향기는 강릉을 넘어 대한민국과 언제까지나 함께할 것이다.
주소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전화 033-660-3301~3308
홈페이지 https://www.gn.go.kr/museum/index.do
남매를 기리는 문학공원,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기념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이율곡과 함께 강릉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누나 허난설헌은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여인으로 짧은 생을 살다 간 천재 시인이었다. 초희라는 깜찍한 본명의 허난설헌은 어린아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천여 편이 넘는 시를 썼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여성이 글을 배우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때였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에 부딪쳐 그녀의 시는 조선 땅에서 빛을 보지 못했지만 훗날 명나라에서 극찬을 받으며 조선에서도 새롭게 조명 받게 되었다. 이런 난설헌은 자신에게 세 가지의 한이 있다고 탄식한다.
첫째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가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셋째가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다.
그녀에게 족쇄와 같았던 결혼생활, 아이들의 연이은 죽음, 아버지 허엽과 오빠 허봉의 죽음 등은 결국 허난설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 그녀의 나이 27세. 세상을 뜨기 전,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시 한 수를 남겼다.
이승에서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일생 동안 지었던 모든 시들을 모조리 불태워 한 줌의 재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고 결국 모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녀의 동생 허균은 난설헌의 사후 그녀의 시를 엮어 난설헌집을 만들고 이를 중국과 일본에 알리는데, 이 시집은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경포호와 맞닿은 울창한 송림 속에 자리한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은 때문인지 그 기운이 오묘하다. 광채가 흐르는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음산하고, 주위의 나무들이 올곧게 하늘로 뻗은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유분방한 곡선을 띤다. 두 오누이의 성정과 안타까운 심정이 경포의 숲 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만 같다.
주소 강원도 강릉시 난설헌로193번길 1-29
전화 033-640-4798
휴관일 매주 월요일
입장료 무료
INFO. 호서각장서터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의 소나무숲 안에 특별한 공간이 있다. 지금은 안내판만 남아있는 호서장서각터가 바로 그것. 이곳은 허균이 1604년 중국에서 구입해온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사설도서관 호서장서각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유일의 사설 도서관으로 책 만 권을 모아 당시 지역 향교의 교생과 유림들이 책을 빌려볼 수 있게 했던 곳이다.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
‘색은행괴’, 퇴계 이황이 늘 숨을 곳을 찾고 기이한 행적을 일삼으며 방랑과 은둔으로 평생을 마친 김시습을 평한 말이다. 조선 전기의 사상가 이자 문장가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를 세상에 꺼내놓은 김시습에게 강릉은 열세 살에 여윈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한 곳이면서 유랑 생활의 거점이었다. 때문에 강릉에서는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을 세워 그의 문학과 얼을 계승하고 있다.
아담한 단층 한옥의 기념관에서는 김시습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와 금오신화 애니메이션을 관람할 수 있고,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매월당집, 금오신화, 대표적인 한시 ‘동봉육가’ 등을 영상과 활자본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금오신화 5편 중 하나인 ‘이생규장전’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어 소설 속 주인공들과 함께 추억을 남길 수 있다. 김시습은 임종 무렵에 지은 시‘야생’에서 자신의 생을 요약했다.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은 그의 마지막 바람을 담고 있는 소박한 현장이 아닐까.
나 죽은 뒤 내 무덤에 표할 때,
꿈꾸다 죽은 늙은이 라고 써준다면,
나의 마음 잘 이해했다 하리니,
품은 뜻 천년 뒤에나 알아주리.
주소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85
전화 033-644-4600
휴관일 매주 월, 화요일 / 설날, 추석 당일
입장료 무료
시인의 어린 시절 그대로, 초허 김동명 문학관
일제강점기 일본의 지배에 항거하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단 한 편의 글도 일본어로 쓰지않은 시인 김동명. 정제된 언어와 형식, 적절한 이미지와 비유 등으로 자연을 노래하면서 이를 조국애와 종교적 성찰로 승화시킨 작품들 <파초>, <내 마음은> 등을 통해 시대와 역사 앞에 고뇌하는 식민지 시인의 지성과 순수 서정을 엿볼 수 있다.
초허 김동명 문학관은 이러한 시인의 어린 시절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가 8살까지 살았던 초가에는 산문 <어머니>에 등장하는 코쿨이 재현되어 있어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각별한 그리움과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해볼 수 있다.
집 뒤편의 작은 언덕에 오르면 아담하고 정겨운 시골마을이 펼쳐진다. 바다와 호수, 해와 물, 나무 등 어린 시절 이곳에서 꽃피웠을 시인의 감성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아늑한 분위기에 차 한 잔 마시고 싶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시인이면서 정치인으로 또 교육자이자 아버지로 살아갔던 시인의 숨결이 묻어있는 유품과 자필 원고들 속에서 김동명의 체취가 느껴진다.
주소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샛둘1길 30-2
전화 033-640-4270
휴관일 매주 월,화요일 / 추석, 설날(신정,구정)
입장료 무료
과거 최고의 교육기관, 강릉향교
강릉이 ‘문향과 예향의 고을’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래도록 지켜져 내려온 문학을 숭상하는 지역의 문화와 풍습 때문일 것이다. 자제가 부모의 품을 벗어날 정도로만 성장하면 향교에 들어가 학문을 닦는 것이 강릉의 오래된 모습이었다. 이렇듯 강릉향교는 과거 지역 인재를 양성했던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던 곳으로, 그 규모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향교로 알려져 있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명륜당은 강학공간으로 동재와 서재로 이루어졌다. 1413년부터 시작된 이곳의 역사는 꾸준하게 이어져 1909년 화산 학교를 비롯한 초·중·고 6개 학교가 문을 열었고, 근대교육이 시작됐다.
강릉향교의 역할은 인재 육성의 전당으로서만이 아니었다. 강릉향교의 제사 공간을 대표하는 대성전에서는 유교의 성현들에 대한 제사를 담당한다. 공자를 비롯한 5성과 공문십철, 송조육현 등의 중국 성현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설총과 최치원, 정몽주, 이황, 이이 등의 18현도 동무와 서무에 봉안되어 있다.
대부분의 향교가 중국의 7성현과 우리나라 18선현을 포함한 25선현만을 봉안하고 있지만 강릉향교는 총 136위를 배향하고 있다. 이러한 점만 봐도 강릉이 가지고 있던 학문적, 사회적 위상을 잘 알 수 있어 강릉향교는 강릉 문예탐방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목적지 중 하나라 말할 수 있다.
주소 강원도 강릉시 명륜로 29
전화 033-648-3667
문향의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강릉의 도서관들
오늘도 강릉에는 여전히 문학과 예술의 향기가 피어나고 있다. 매년 '대한민국 독서대전'을 개최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강릉의 위상을 재확인 할 수 있다. 그 중 문향의 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밑거름에는 강릉의 도서관들이 있다.
강릉시립도서관을 비롯한 관내의 모루 도서관, 작은 도서관, 학교 마을 도서관 등 모두 99개의 도서관들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도서관’이라는 목표 아래 지난 2006년부터 조성되어 강릉을 ‘책 읽는 도시’로 만들어놓았다.
또한 도서관의 이색적인 외관과 프로그램 등도 이러한 목표에 한몫을 한다. 2011년 10월 개관한 강릉대도호부 관아 내에 위치한 관아 작은 도서관은 마치 조선시대 궁궐의 도서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곳을 찾은 주민들에게는 유익하고 잠시 들른 여행객들에게는 흥미로운 모습이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며 점점 종이책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여전히 책의 향기를 퍼뜨리는 강릉의 노력이 무척이나 반갑다.